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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절로 길어진 글

  • 작성자 관리자
  • 작성일 2006-09-29
  • 조회수 138

 

 

저절로 길어진 글



학교생활은 자잘하고 사소하지만 끔찍하게 지긋지긋한 면이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나는 일어, 수학, 윤리를 듣기 위해 학교에 다니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하필이면 윤리 시간에 상담실로 내려오라는 전갈이 온다. 마리아를 쓰던 나는 상담실로 불려가던 소녀의 심정으로 미끌미끌 계단을 미끄러진다. 그리고 상담실에는, 한눈에도 정식은 아니구나 싶었던, 역시 가정교사였다 교육청으로 발령이 났다는 상담사님이 지키고 있다.

이럴 땐 강산이 두 번 변하도록 청소년 상담을 했다는 여자와 동거한 1년 6개월의 경험이 소통에 큰 도움이 된다. 15분 동안 줄곧 손목시계를 보고 발가락을 꼬물거리며, mbti에 대해서는 상식이 있으니 약식 테스트가 필요치 않음을 설명하고, 보는 사람마다 비관주의를 느끼게 하는 모양인 나의 태도에 대하여 적당히 언급한다. 낙관도 비관도 하는 법이 없다고, 그러나 신의 의지로 모든 것이 최선을 향해 흘러감을 믿는다고. 그러한 엉성한 논리 안에 나의 절망을 끼워 넣어 드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가겠노라 허락을 구하고, 상담사는 학기 초에 쓴 조사서를 훑으며 상담을 매우 부담스러워하는 학생이라 끄적이고, 그리고 나는 다음날 최근에 믿는 종교가 있느냐는 담임의 질문에 답을 해야만 한다. 굳이 내가 의미하는 신은 우주라고 말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요, 그냥 성당 다니는데요.

한동안 난 무언가에 져버린 기분을 느낀다. 아예 항복하고 올바른 생활에 몸을 담근 것이, 벽에 몸을 내던지고 부서지는 것보다 옳지 않게 여겨진다. 음악시간에 리코더 수행평가를 치다말고 연습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고, 그렇다고, 연주를 중단시켜 집중력이 흩어진 데에 얼마간의 불쾌함을 드러내며 대꾸한다. 점수 잘 받기 싫나. 틀렸으면 틀린 대로 주시면 됩니다. 자리에 들어가.

그러고는 전보다 더 잦은 지적을 당하고, 별안간 불려 세워져 네 꿈이 뭐랬냐는 물음과, 성적만 좋으면 뭘 하며 머리에 엉뚱한 것만 들어찼다는 모욕. 성적이 좋기는커녕 나쁘다는, 지극히 사실에 입각한 답을 할 새도 없이. 그 입에서 꿈틀대는, 너 같은 게 선생이 되면 볼 만하겠다는 그 말은, 듣지 않아도 들린다.

나는 생각한다, 충분히 분노할 만한 상황이라고. 마흔 명 남짓 가운데 1등으로 들어온 건 하찮다면 하찮은 일이고, 그런 이유로 근거 없이 날 모범생 정도로 취급하는 데에 무감했고, 선생인지 영화감독인지를 내 꿈이라 이야기하고 나서 다감한 격려를 받을 때부터 이미 <나에게 여지없이 실망할 것>을, 반항은 취미가 아니지만, 확실히 예감했는데. 내가 교무실 앞에서 비꼼을 당할 만치 잘못할 것이 무엇인지 선생님이란 분이 알려주지 않으니 알 수가 없고, 그래서 그냥 내가 싫은가보군, 그러려니.    

담임이 슬럼프냐고 달래기에 대충 고개를 끄덕인다. 네 이상이 현실에 좌절하구나, 그럴 듯한 진단, 무슨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라고 깔끔하게 결론도 내린다. 처음부터 학교가 싫었다, 고 말하고 나서야 내가 애초에 유치원도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싫어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어느새 말없이 담임의 고충에 동조하고 안타까움을 느낀다. 중학교 때부터 봐서 담임이 얼마나 교직에 맞지 않는가를 짐작하기에. 선생님, 선생님도 참 안됐군요.



 

그리고 이러한 일이 있다. 한근시간, 교과서에 박열이 왜 없는가를 물었다가 애매한 답을 들으며 수업을 통째로 잡아먹고, 다음에는 사회주의에 대한 짧은 언급에서 편견을 느낀 내가 자동반사적으로 민주주의에도 흠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빚어진. 사회주의에 대해 배운 것도 없이 민주주의가 무결한 양 믿고 지낸 데에 얼마간 놀라워하던 차, 한근 선생님 역시 사회주의는 잘 알지 못하는군, 그런 발언은 어쩌면 당연하지, 고개를 끄덕인다. 종교, 인종, 사상에 대한, 머리도 꼬리도 없는 말토막에 그동안 얼마나 놀라왔나.

단지 모르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혹은 전의 무엇과 미묘하게 모순 되는 것을 느끼면 불편해지는 것이다. 단순하게는 괴테가 영국의 소설가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와 유사한 종류의, 그게 아니라고 작게 중얼거리게 되는 그런 것.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말을 배울 무렵부터 내게는 더듬이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닐 수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화를 내는 일은 여간해서는 없다. 참는 것이 아니라 화가 났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때다. 화를 잘 내는 것도 무척이나 어렵다는 생각을 하고, 필요에 따라 화를 내는 때도 생긴다.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지만 약간은 머리가 아픈 문제에서,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보다 적당히 감정적으로 대처하는 편이 편리할 때는 그렇게 한다. 때때로 거짓된 분노 속에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런 맥락에서, 도저히 너그러워질 수 없고 앙금이 남는 사람이라면 굳이 대면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싫으면서 그렇지 않은 척하는 건 익숙하지 않다. 내가 누군가에게 화를 낸다면, 그건 대체로 그 사람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따져 묻는 것과 큰소리로 말하는 것이 싫다. 선택할 자유가 있는 작은 문제를 거절하는 데도 앞사람만 들릴 만한 목소리로는 이백 번쯤 같은 말을 되풀이해야 하지만, 그런 방식을 고치지 못한다. 거의 끝에서야 내가 말을 안 듣고 고집이 세다는 것, 겁은 많아도 내가 나이고자 한다는 것, 겉으로만 잘하겠다는 소리도 여간해서는 잘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와 가늘고 굵은 실로 연결된 사람 개인에게는 그러지 못하지만, 그가 속한 제도에는 뻗대고 대들고 약 올린다. 내 일신만 무사하다면 얼마든지.

교무실에서 내 말이 떠돌지언정 공공연히 얻어맞지나 않는 것을 운으로 여긴다. 당연한 문제로 여겨지기 쉽지만, 내가 체벌 없고 육식동물의 야만성이 희미한 곳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은 진정 뒤로 넘어져도 호박이 굴러든다는 나의 행운을 증명하는 예가 될는지 모른다. 물리적 폭력 이외의 것이라면 지치지도 않고 겪어내 왔다. 여러 가지 불행을 껴안고 살아가는 존재들과 수도 없이 부닥치고 울부짖고 깨지면서.




최근 내 학교 문제는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일단 나는 셀 수도 없는 지각으로 벌점이 징계 수준을 초과했고, 그런 까닭에 가벼운 징계가 닥쳤구나 싶었는데, 친절하며 사려 깊은 담임이 내게 그것을 무마시켰다고 말하고, 여느 때처럼 일을 성사시키는 동안의 노력을 늘어놓는다. 내게 한 마디도 않았지만 그럭저럭 반응 없이 허공을 보다가, 받게 되어 있는 거면 받겠다고 해 담임을 의아하게하고, 사실은 학급 전체를 그런 방법으로 운영한 것을 알게 된다.

그 저녁에는 아무 거나 씹어 삼켰고, 비슷한 때에 생선을 먹어 탈이 나는 일, 강제로 들어간 영어보충에서 벗어나려 앓는 시늉을 한 끝에 보건실에 누운 일이 있다. 나는 한 달 남짓 안에 마무리해야 하는 드라마를 쓰다 햇볕에 씌어 얼핏 잠을 잤다. 다음번에는 안 먹힐 방법이라 약간은 고심하며,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느슨하고 좋은 학교가 왜 이토록 싫은 것인지 생각하면서.

그 다음에 설문지가 배포된다. 학교의 장단점과 홍보전략, 인근 학교와 통합된 이후에는 어떤 모습이 좋을까를 묻는 종잇장. 우리 학교라고 한다면야 조금의 특수성을 제외하면 다른 학교와 다를 바가 없다. 다만 학교에 대해 말한다면 학교 역시 하나의 제도에 불과하다는 판단을 내리기 직전이었다.

내가 무엇을 기괴하게 써놓은 것도 아니다. 연약하신 담임을 놀라게 해 죄송하기는 하지만, 참 쓸모없는 짓거리에 생각도 짧았지만, 난 단지 학교가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편이 좋으리라고. 웃던지, 불러서 또 타이르던지, 아무래도 좋으며 그만한 가치도 없는 생각의 조각이기도 했고. 그런데 세상에 그게 교무실을 한 바퀴나 돌았을 줄이야. 놀림당한 어린아이의 기분을 이해할 처지가 된 것 같다. 나는 자주 솔직하고 싶지 않은 충동을 느끼지만, 그래도 대체로 솔직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을 뿐이다. 전처럼 한 마디로 그치지 않고 대여섯 줄로 불어난 것은 무슨 심리였는지 알 수 없지만.

어제 가정 선생님이 나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대단히 간단한 문제였던 것이다. 경직된 사고, 꼬아서 보는 자세. 그리고 이번에도 비관주의. 역시 오래 살면 무엇이건 잘 알게 되는 걸까. 할 수만 있다면 내 머리를 열어 그 안에 든 것을 보태거나 덜어주고 싶은 듯. 통영에 거주하는 중년 여성과 부산에 거주하던 중년 남성, 한때 나와 같이 살았던 이십 대 초반의 젊은 여성과 마찬가지로, 아니 여기에 내 가족까지 무더기로 묶어서, 의학팀을 구성해보는 건 어떨까. 아, 모르겠다.

예의가 없었을까. 그런 점이라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인정한다. 버릇도 예의범절도 모르고, 알 생각도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합당하게 대우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어릴 적에는 반말이었다가, 크면서 존대를 했다가, 지금은 다시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가정 언어생활을 보더라도, 예의 따위는 벌써 어디에 버려둔 상태다.

그냥 어른이란 이유로 존경받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런 건 뭐랄까, 무척 슬프다. 내가 살아있는 생명이므로, 여간해서는 상처입지 않는 강철이지만 그래도, 그래도 때로는 나도 마음에서 피를 흘리니까.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나>로서 존중받고, 존중하고 싶었다. 나는 친할수록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데 지극히 동의하고 있다. 언제나 그렇다.




뭐가 가장 큰 문제인지 생각한다. 알 것 같은 기분이다. 얼마 전만 생각해도, 오히려 그때는 더 단단하고 확고부동해 겁도 없이 늘 척척 대답했다. 학교에서만 유령으로 지냈지, 칼날처럼 서로 다른 것을 잘 자르는 존재였다. 틀림없이 그런 것이, 지금 이 순간 내가 말하는 것은 진리, 라는 식의 사고방식이, 있었다. 그러던 게 이제와 감당 안 되게 휘몰아치는 혼란이 되어, 알던 길도 무섭게 낯설어지는 그 불안정 속에 있다.

편협할까. 내가 알기로, 편협이란 내가 <안다>는 인식에서 나온다. 어떤 은근하고 비겁한 우월함. 너는 결코 모르는 걸 내가 아는데, 늦지 않게 알려드리지. 이런 것도 모른다면 곤란하다고. 한 번에 얼른 이해해주신다면 좋겠지만, 여러 말 시키면 피곤해. 그래, 그렇다. 나는 모조리 편협할 수도 있다. 그리고 내가 편협하다면, 당장에 무너져버린다. 무시무시한 계곡으로 추락해버린다. 나는 일어나지 못하고, 삶을 잊고, 숨을 뱉지 못한다. 말하자면 끝장이다. 그 이상은 없다.

어디에서 시작하건 늘 나 자신에게 돌아온다. 무슨 일을 보건 예외 없이 내 생각을 한다. 자의식 과잉, 작고 큰 일 모두에서 나와 싸우느라 진땀 흘린다. 내 궤변을 용서한 적 없고, 나를 괴롭히고, 모든 것이 내 문제가 되어 자기혐오와 자기애를 자극한다. 비정상적이라는 말이면 된다. 딱 한 번만 내가 형편없다는 생각을 해버리면, 늪처럼 헤어 나오지 못해서 끅끅댄다. 단추라도 달린 것처럼, 두세 가지 단어만 있으면 한참동안 악몽에 시달리게 만들 수 있다.

오랫동안, 내게는 나의 사상을 세우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기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지적인 독립을 이루고 싶었고, 앎이 필요했다. 무지가 죄를 부른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두려웠고, 나의 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상하지만, 어쩔 수 없이 늘 같은 것을 생각해왔다. 누군가가 말하던 신념, 삶의 목표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내게만 대수롭지 않은 것이 있었지만, 또 참을 수 없이 중대한 문제가 있었고, 무너지면 나를 주워 담았다가 고통스러우면 고통이 지나가게 기다렸다. 유별나다는 것이 내게는 지독한 상처여서, 난 내가 계속 유별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줄곧 나로서 살 것, 그리고 사라지지 말 것, 결코, 무슨 일이 있어도 평범해지지 말자고.

무너지기를 바랐다. 누군가가 쌓아올린 것이. 동시에, 전에 생각하고 원하던 것을 더 깊이 생각하며 원한다. 내가 지나치게 극단으로 치닫지 않는지,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고, 현실성을 얻기는커녕 더 증발하고 있는 게 아닌지 두렵다. 어떻게 살아야 옳은지 몰라서, 마치 글을 읽어내지 못하고 잠을 자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것 같다. 걷는 법을 몰라서 가만히 서 있는 사람 같다. 그냥 살면 살아지는 걸 아는데, 돌에 걸리고 구덩이에 빠지고 길을 잃어서 헤맬까봐, 다치는 게 무서워서. 웃기게도 떨고만 있는 셈이다.

참을 수 없다고 느끼더라도, 내 안에서 빠져나올 힘을 찾고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생각한다. 내가 오해받기 쉬운 동물이라도, 자주 많은 것에서 도망치고 싶을 만큼 나약하더라도, 스스로 수은보다 해로운 것에 중독 되지 말자고 생각한다. 나와 분리되지 않는 우주인 신이 있다면, 내가 전화를 들고 숫자만 누르면 언제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또 다른 하느님이 있고, 그래서 난 모든 면에서 더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말 형편없더라도 아무려면 어때, 그냥 다시 열심히 살자, 무엇이건 더 나아지는 법, 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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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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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3-19
[수필] 1월 월 장원 발표

안녕하세요, 김병운입니다. 수필 게시판에서는 처음 인사 드립니다. 올해는 박서련 작가님과 소설/수필 게시판을 함께 살펴보고 번갈아가며 월장원을 선정해보려고 하는데요. 홀수달 발표는 제가, 짝수달 발표는 박서련 작가님께서 맡는다고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수필 게시판 1월의 월 장원 발표하겠습니다. 이달에는 18편을 살펴보았고요. 장원 후보는 아래의 두 편입니다. (눈금실린더) (식빵연필) 그리고 장원작은 (식빵연필)입니다. 이 글은 &lsquo;죽다&rsquo;와 &lsquo;시들다&rsquo;의 용례를 살피며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이미지에 보다 정확히 가닿으려는 작가의 분투가 담겨져 있는데요. 자신이 선택한 언어에 대한 탐구적 자세 뿐만 아니라 작가의 의도를 관철하기 위한 쓰기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쓰기 사이에서의 고민, 추구하는 문학관을 조금씩 벼리는 과정 등을 두루두루 확인할 수 있어서 인상적이었습니다. 내 글이 더 나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안고 단어 하나 술어 하나에 매달려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글이 아닐까 싶네요. 감사합니다.

  • 관리자
  • 2024-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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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읽으면서 공감도 많이 가고 생각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 2006-10-05 23:17:03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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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줄곧 나로서 살 것, 사라지지 말 것" 이라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매우 흥미로운 글이네요.

    • 2006-10-04 22:07:54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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