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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기행문

  • 작성자 이혜민.
  • 작성일 2007-01-19
  • 조회수 736

작년에 다녀와서 쓴 금강산 기행문을 고쳐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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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기행문


 

송나라시인 소동파는 이렇게 말했다.

“원컨대 고려국에 태어나 한번만 금강산을 보았으면.(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

그리고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께서 천지 창조하신 6일중에서 마지막 하루는 오직 금강산을 만드는데 보내셨을 것이다.” 

또한 육당 최남선은

“금강산은 보고 느끼기나 할 것이요, 형언이나 본 떠낼 것은 못됩니다.” 라고 하였고,

시인 고은은

“이 절경을 보고 실성하지 않을 놈이 있다면 그놈이 실성한 놈이다.” 라 하였다.

이처럼 일찍이 ‘나 이름 있소’하는 사람들이 모두 한마디씩 한, 금강산에 처음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의외로 마음속엔 두려움이 먼저 일었다. 다름 아닌 북한이라는 ‘적국’에 간다는 사실이 먼저 앞섰기 때문이었으리라. 사실 북한에 갔었을 때도 남측에서 느끼던 ‘자유’란 것이 상당히 구속된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일말의 불안감 내지 불만은 금강산의 신경(神景)으로 상쇄되고도 남았다.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가방을 꾸리고 학교에 올 때 까지만 해도 내 마음은 정신적 공황 상태였다. 지난 일 년 간 모든 것을 바쳐서 쌓아 올린 것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졌으니 그 상황에 처한 그 누구라도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하지만 이 일에 대해 적는 것은 이 글의 논지에 어긋나므로 이 정도로 줄이겠다.) 하지만 버스에 올라타고 그대로 몇 시간 움직이자 이제는 그러한 생각보다는 금강산의 절경에 대한 기대감 또는 북쪽에 간다는 두려움 등이 혼합되어 나를 덮쳐왔다. 누군들 그러지 아니하겠는가! 그러나 내설악휴게소에서 어머니께서 싸주신 도시락을 먹자 이젠 그런 상념  따위는 사라지고 쉬고 싶었는데 잘 되었다는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오색약수터에서 차가 멈췄을 때, 그리고 특유의 약수 맛을 보았을 때 나는 예전에 여기에 오지 않았던가 하는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거기서 학교에서 금강산에 가서 힘들지 않도록 미리 등산연습을 한다고 생각하며 추억을 되새기며 시키는 대로 주전골까지 올랐다. 여러 명의 도선생들이 모여서 위조동전(지폐가 없었으므로)을 만들다가 딱 걸렸다는 이곳은 그래서 아직까지 ‘돈을 만들던 곳’ 이라는 곳의 주전골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으니 돈이 최우선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보다 더 찬란한 이름이 있을까 싶었다. 그 근처에 있는 절인 성국사에서 반야심경의 두 주인공 중 한분이신 관자재보살님께 문안을 올린 뒤 마지막으로 야릇한 맛을 내는 오색약수의 뒷맛을 느끼며 차에 올랐다.

그 후 북으로 올라가길 몇 시간. 드디어 금강산 콘도에 도착하여 방에 올라 쉬었다. 그 사이에 아래층 여상 애들에게 수작을 걸려는 몇몇 애들이 나의 휴식을 방해했다. 그러나 방에서 바라다 보이는 싸한 바다 그리고 바다냄새는 나의 풀어진 마음을 더욱 녹아내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내려와서 밥 먹고 올라와서 TV를 보다가 레크리에이션이라는 것을 하였다. 방에 올라와서는 그저 놀다보니 어느새 저 먼 동쪽 끝에서 서서히 동이트기 시작했다. 덕분에 나는 일출을 볼 수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잠을 깬 나는 급한 대로 대충대충 씻고 밥을 먹었다.

밖에서는 모든 것을 씻어 내리기라도 하듯이 비가 내렸다. 순간 이 비가 우리가 가는 길과 우리가 구경할 금강산을 씻어주기 위해 내리는 것 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비는 화진포 해수욕장을 그냥 지나치는데 큰 일조를 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비는 3인의 독재자(이승만. 이기붕, 김일성)의 별장을 지켜보는 것 까지는 막지 못했다. 김일성의 별장은 본디 ‘화진포의 성’이라는 건물이라고 한다. 여기는 지금 안보역사 전시관으로 꾸며져 강렬한 반공교육의 장소가 되어있다. 이렇게 잔인한 아이러니가 있을 수 있을까. 건물의 옛 주인이 평생에 걸쳐 이룩한 작품(걸작이라고는 못하겠다.)을 지금 이 건물은 ‘생지옥’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김일성이 살던 그대로의 모습이 재연 돼 있었다. 그 다음은 이기붕의 별장이었다. 그다지 볼 것은 없었지만 그저 한 시대를 풍미했었고, 누군가의 오른팔의 별장이라는 사실에만 주목했다. 심지어 이렇게 검소한 삶을 산 사람이 왜 그런 부정선거를 저질렀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승만 별장 가는 길에 있던 고인돌은 고대사와 현대사의 절묘한 조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아주 좋은 하나의 묶음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꽤 많이 걸어 도착한 이승만 별장은 이기붕의 별장 못지않게 검소했다. 이승만이 평소에 검소했다는 소문만은 사실인 듯 했다. 여기서 이기붕이 그 검소함을 이승만에게 배운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남측 관광을 모두 끝낸 나는 콘도에서 최후의 만찬(?)이라 할 정도로 맛있는(그러나 북에서는 이보다 더 맛있는 밥을 먹었다.)밥을 먹었다. 그리고 한참을 기다려 임시여권이라고 하는 관광증을 받게 되었다. 더 북으로 올라가 통일전망대의 남북출입사무소에 다다르자 드디어 적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들어간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미 그 전에 북한에서는 단지 ‘북측’ ‘남측’ 이란 표현 외에는 ‘대한민국’ ‘ 남한’ 따위의 글을 쓰지 말라는 교육을 받은 상태여서 내 머리는 혼란스럽게 되어 있는 상태였다. 어쨌든 남북출입사무소 즉, 남측 CIQ를 통과하고 나서 들었던 첫 생각은 ‘ 이제 나는 조국 대한민국의 보호로부터 벗어났다.’ 라는 사실이었다.

그 후 버스는 북으로 북으로 올라가 남방한계선인 금강통문에서 출경허가(출국이 아니다!)가 나기를 좀 기다리다가  통과해서(나는 그 문이 자동문이라는 사실에 적지 아니하게 놀랐다.) 좀 올라가다보니 바로 옆의 비스듬히 꽃혀 있는 콘크리트 말뚝이 지나갔다. 내 가슴엔 설렘과 일말의 기대감, 희망 등이 존재했었나보다. 그 때문인지 내 옆을 잠깐 스쳐간 약간의 빨간 락카가 발라져있던 그 콘크리트 말뚝은 아직까지도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다름 아닌 여기가 군사분계선. 이른바 휴전선임을 나타내주는 표시였기 때문이었다. 북방한계선을 넘자마자 인민군과 그 초소가 보였다. 인민군을 보자마자 아이들은 하나같이 탄성을 질렀다. 신기했다. 그 후로 3일간 지겹도록 볼 사람들이었지만 그 때에는 왜 그리도 신기하던지……. 그 후 한 십분 쯤 달렸을까? 이상한 문을 통과한 후 바로 북측 통행검사소가 나왔다.

북측 통행검사소에서는 꽤나 험상궂게 생긴 아저씨 한분이 우리들을 위협적으로 노려보며 무뚝뚝하게 도장을 찍어주고 계셨다. 그 다음 엑스레이기 위에 일회용카메라 5개(!)를 올려놓고 엑스레이를 통과했다. 북한에도 이런 신식 기계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을 때 “저거 다 우리 돈으로 사준 거잖아!”라는 말이 나의 놀라움을 깨뜨렸다. 그리고 앞에서 거의 협박하는 듯한 얼굴로 엄청난 카리스마를 내뿜던 도장 찍어주는 아저씨와는 달리 내 인사에 화답해준 문가에 서있던 인민군 언니의 미소는 역시 남남북녀라는 말은 되새기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짐 검사를 마친 나는 버스를 타고 곧장 숙소로 가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장전항을 한 바퀴 돌아보고는 숙소로 돌아갔다. 내가 여기서 참 불만이 었던 것은 다름 아닌 차창 밖을 찍지 못하게 하는 거였다. 솔직히 내가 웬만큼 차창 밖을 찍고 난 후에도 가이드 언니가 그런 말을 해서 (혹은 내 귀에 그제야 들린 건지도 모르겠다.)겨우 사진기를 거두었다. 장전항의 호텔해금강(국내최초의 해상호텔 이라 한다.)을 구경했다.

그 후 구룡마을에 처음 도착하여 컨테이너박스에서 묵었다. 사실 컨테이너박스라고는 하지만 사실 시설이 그리 나쁜 편은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이곳이 북한이라는 사실을 깜박깜박 잊으며 살았을까.

짐을 푼 후 평양 교예단의 공연을 관람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사실 공연을 보는 도중에 잠이 들었었다. 앞부분이 너무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날 밤을 거의 새운 탓도 있었으리라.)하지만 선원 복을 입은 원숭이형제들(이렇게 말고는 달리 부를 만한 호칭이 없다.)이 철봉에서 온갖 묘기를 부리는 것이 거의 원숭이를 능가할 정도였다. 내가 잠을 깬 것이 그 시점이다.  덕분에 나는 공연의 하이라이트만 골라서 본 듯했다. 특히 내가 제일 감명을 받은 것은 다름 아닌 쟁반 받기에서였다. 처음에 그 아저씨가 쟁반을 비록 몇 개를 떨어트리기는 했지만 그 정도면 대단하다고 놀랐었다. 누군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랴. 하지만 그 아저씨는 스스로가 스스로의 공연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번 더하겠다고 했을 때 내가 받은 감동은 거의 충격에 가까웠다. 순간적으로 내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것을 머릿속으로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저 사람들이 저런 고난이도의 일반사람들은 할 수 없는 저전 묘기를 부리는 이유를. 처음에는 그저 관객에게 잘 보여서 돈을 벌기 위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을 본 후 나는 깨닫게 됐다. 저 사람들은 관객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성취감이랄까, 일종의 달성감등을 느끼기 위해 혹은 느끼면서 이런 공연을 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렇지 않고서는 어찌 그러한 재시도의 의지가 나올 수 있겠는가? 그러한 부끄러움을 느끼며 나는 공연장을 나왔다. 나는 거기서 공중 그네타기나 북한판 개콘같은 외면적인 즐거움뿐만 아니라 서커스의 일종의 정신까지도 읽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후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거나 친구들과 마피아, 원카드를 한 것에 대해서는 생략하고자 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날 밤 나는 다음날 있을 메인이벤트 즉, 금강산등반을 위해 일찍 잠들었다는 것이다. 다음날 아침은 날씨마저 여기는 북쪽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듯이 유난히도 추웠다. 온몸이 마구 덜덜덜 떨릴 정도였다. 시간이 흐른 후 햇빛 덕에 괜찮았는데, 그게 또 금강산 등반에는 상당한 짜증거리 중 하나가 되었다. 어쨌든 씻고 근처 온정각에서 밥을 먹고, 등산할 채비를 갖춘 후 차에 올랐다.

 지나가는 길에 당시에 대웅전만이 복원되어 있던 신계사 터에 들렸다. 거기서 이름이 잘 생각이 안 나서 만약 다시 만난다면, 죄송스러운 심정으로 대하고 싶은 스님이 한분 계셨는데, 그분의 설명이 상당히 재미있어 좋았으나, 아쉬운 점은 신계사지 3층 석탑을 보지 못 했다는 것이다.(정말 신기한 것이 있다. 왜「나의 북한 문화유산 답사기 하 금강예찬」에는 나와 있는 석탑이 왜 내가 가니까 없는 것 일까? 내겐 그것이 아직도 미스터리다.) 신계사 터에서 설명을 듣고 애들과 기념사진을 찍은 뒤 (아직도 대웅전에서 부처님께 인사를 못 드린 것이 매우 서운하다) 차를 타고 구룡연 코스 전용 주차장에서 내려서 본격적인 등산을 시작했다.

사실 나는 이번 등산을 과거 문인들이 그러했듯이 유람내지 탐승한다는 기분으로 천천히 올라가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기에는 산이 너무 가팔랐다. 덕분에 나는 과거 문인들이 어떻게 금강산에 올라갔는지, 왜 근대이전의 작가들의 서화에서는 상팔담이 안 나오는지 되새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 많은 과객들을 일일이 의자 가마에 져 나르던 옛날 스님들의 엄청난 수고를 생각하니 절로 숙연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금강산을 등반하며 들었던 잡념 중에 하나가 6.25때 (북에서는 이를 소위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국군이 금강산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이 금강산의 입장에서 볼 때 훨씬 다행이었더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먼저 설악산의 물과 금강산의 물을 비교해 볼 때 설악산의물이 3급수라면 금강산의 물은 1급수이기 때문이다.(내가 그 물을 마시고도 안 죽은 이유) 게다가 설악산에는 온갖 가게들과 필요이상의 주차장들이 그나마 있는 설악산의 풍광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친다. 반면에 금강산은 어떠한가? 생태계에 무해한 지저분한 바위글씨를 제외하면 거의 생성당시 그대로의 천혜의 환경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공산주의는 인간에게는 매우 불편한데다가 극악무도한 제도지만 자연 환경에게 있어서만은 상당히 나쁘지만은 않은 제도라고 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유동인구가 적고 여행 및 거주지이전의 자유가 없으니 자연환경이 깨끗할 수밖에.) 그 때문에 금강산은 곳곳의 흉한 바위글씨를 제외하면 진짜 장관이었다.

나는 내 잡념과 금강의 경치에 도취되어 힘든 줄도 모르고 계속 올랐다. 하지만 중간쯤 올라가자 힘에 부쳤다. 만약 여기가 금강산이 아닌 다른 평범한 산이었다면 거기서 그냥 머물러 앉았거나 내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가 어디인가? 계속해서 산에 올라가니,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금강산의 선경(仙境)은 점차로 기기묘묘해졌다. 이런 경치는 금강문을 들어서자 더욱 아름다워졌다.

올라가는 길에  모든 사람들이 웃고자빠질 글씨가 금강산에 떡하니 매우 큰 글씨로 새겨져있었다. 다름 아닌 “자주, 자립, 자위”였는데 만약 제일 마지막 두 글자만 본다면……. 얼마나 웃겼는지는 이만 줄인다. 그 외에도 연주담, 비봉폭포 등을 지내가며 보았는데, 연주담의 경우 내가 상팔담에 가기 전까지 가장 아름다운 호수라고 생각했을 정도이다.

그리고 드디어 구룡폭포에 이르렀다. 사람이 많아서 그리고 시간이 없어서 제대로 찍히지도 않은 사진 몇 장만 그저 찍고 내려와서 상팔담으로 올라갔다는 사실이 아까웠다. 단지 그 유명한 김규진의 미륵불을 확인했다 정도로 의의를 두고자 한다.

상팔담에 올라가는 길은 여태까지 왔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여기까지 경사가 30°정도였다면(이정도도 힘이 들었는데) 이 길은 경사가 거의 70°~80°(!!!!)에 육박했다. 그래서 북한 측에서 자국 주민들을 위해 14개의 철계단을 만들어 절벽을 올라가게 해놨고 나는 지금 그 길을 따라 올라간 것이다. 사실 근대이전까지 만해도 여기에는 길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춘원이나 육당 같은 분들이 기행문을 쓰기위해 상팔담에 나무뿌리를 잡고 목숨을 걸며 올라갔다고 한다. 내 몸집에 거기를 다 올라갔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하다고 할 정도로 너무 가팔랐고 몇 번을 쉬며 올랐는지, 너무너무 힘이 들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상팔담에 와보지 않고는 금강산을 논하지 말라는 말 한마디만 믿고 그렇지 않아도 체력이 다 떨어져가는 돼지 한 마리를 이끌고 나의 정신은 겨우겨우 그곳에 다다랐다.

내가 상팔담에 올라 8개의 호수를 보고 제일 처음 든 생각이 ‘금강산에 대한 어떠한 묘사도 금강산에 있어서는 단지 모욕일 뿐이다.’ 이었다. 어찌 나 따위의 필부가 이 위대하고도 장엄한 금강산을 모욕할 수 있단 말인가? 굳이 문자로 표현한다면 내가 어쩌다가 신선세계에 초대받아 선계(仙界)에 들어선 기분이랄까? 내 친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말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내가 상상하기를 마치 옥황상제의 어린손녀가 백옥경 높은 망루에서 놀다가 어쩌다 떨어트린 8개의 옥구슬과도 같은 8개의 호수와 주변 산신들이 옥구슬에 대한 찬양하기위해 위를 향해 높이 부른 아름다운 노랫가락과 같은 봉우리들이었다. 후에 어쩌다가 풍악산의 상팔담의 사진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본 봉래산의 상팔담과는 비교가 안 되는 말 그대로 한 폭의 풍경화였다. 내가 봉래산의 상팔담의 위대함을 기억하며 그 사진을 보니 만약 내가 가을에 그곳에 올랐다면 감동에 취해 거기서 그대로 떨어져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팔담을 구경하고 아래의 다른 경치들을 구경하는데, 올라갈 때 느껴졌던 일종의 경외심이 싹 사라졌다는 사실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상팔담의 경치를 한번 눈에 박으니 다른 경치는 성에 차지 않았나보다. 상팔담에서 내려오는 길은 올라가는 길보다 훨씬 쉬웠다. 길은 같은 길인데 어찌 이리 다를 수 있을까 란 생각을 하며 내려왔고, 상팔담의 풍경에 취해 주차장까지 어떻게 내려왔는지 기억도 잘 안 난다. 그냥 돌 2개 줍고 물 한 병 떴다는 사실만이 기억날 뿐이다. (그것들은 오는 길에 겨우겨우 북한 세관원에게 안 들키고 가지고 오게 된다.)

내려와서 버스를 타고 밥을 먹고 좀 뻗었다가 바다에 가게 되었다. 남측 고등학교에서 처음으로 단체로 가는 바다여행이라고 해서 괜히 기대도 했었지만 역시 북측은 북측이었다. 솔직한 표현으로 내가 지금 바다에 묘사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짜증이 난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북한바다는 다를까봐 바닷물을 핥아봤더니 역시 짜긴 짜더라.(하긴 바다가 다 같은 바다지 북한바다라고 다른 바다일까?)  나는 거기서 한 일이라곤 바다에 손 넣고 물 좀 마셔보고 책을 읽으며 상팔담의 전설이 다른데서 이사 온 전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뿐이다. 버스를 타고 숙소에 돌아와서 어찌어찌 놀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어제아침에 비하면 오히려 따뜻한 날씨였다. 씻고 밥을 먹으러 가는 김에 기념품도 사왔는데, 그게 그만 애들한테 미움을 사버렸다. 내가 방송을 못 들은 탓도 있지만 어쨌든…….

버스를 타고 삼일포를 구경하려갔다. 「나의 북한 문화유산 답사기 하 금강예찬」에는 삼일포를 제일 마지막에 구경하는 이유가  잘 나타나있다. ‘……98년에 처음 관광을 시작했을 때 3개 팀으로 나뉘어져 가가 만물상 구룡폭포 삼일포를 돌아보았다……(중략)……먼저 구룡폭포와 만물상을 사람들이 삼일포를 보았을 때 어떻게 이런 황홀한 후식이 있냐며 즐거워했다.’ 즉, 삼일포는 힘든 등산을 마치고 편히 쉬면서 볼 수 있게 하기 위해 제일 마지막 코스로 선정되었던 것이다. 육당의 ‘금강예찬’에도 삼일포가 마지막 코스였다고 되어 있으니 삼일포는 예나 지금이나 금강산 등반객의 마지막 휴식처라 하겠다. 나는 솔직히 삼일포 뱃놀이를 즐기고 싶었다. 나중에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상당히 절망하기는 했지만……. 4명의 화랑도 여기서 뱃놀이를 즐기다가 모임에 늦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지금 호수 주변을 돌며 대리 만족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만으로도 충분히 수려한 경치였다. 특히 사선정은 내 시선을 끌었다. 거친 바람인 금강내기만 없다면 그리고 여기가 남한이라면 내가 저 정자를 사서 책을 한가득 쌓아두고 살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여기도 금강산과 마찬가지로 쓸 것은 많은데 문자화하기 힘들다.

어쨌든 삼일포참관(관광의 북한식 표현)을 마지막으로 북한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친 나는 다시 남으로 돌아가기 위해 북측 CIQ와 남측 남북출입관리소를 통과했다. 그리고 한반도를 장장 7시간에 걸쳐 횡단하여 학교에 도착했다.

지난 3박 4일간의 금강산과 북한여행이라는 경험은 내게 꽤 많은 것을 선사하였다. 특히 상팔담의 신경(神景)은 내 머릿속 한편에 오래도록 보존될 것이다. 내가 구경한 금강산의 광경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이 제일 적당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춘원이나 육당, 수졸(유홍준)과 같이 글을 잘 쓰는 축에도 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후에 내가 문장공부를 열심히 해서 다시 금강산에 가게 되었을 때 그제서야 나는 금강산을 말로써 표현할 수 있으리라.

이혜민.
이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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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을 '적국'이라고 표현했는데 표현대로라면 적국에서 유람을...?

    • 2007-01-23 20:3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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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기가 훨씬 수월해졌네요 ;ㅁ;)/

    • 2007-01-20 14:3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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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글을 중간중간 한씩 띄어달라는 뜻이였던거 같네요. 그야 글쓴이의 의도상 안할수도 있지만 데몽님이 원하신건 그것인듯 ㅋ 전 이것도 괜찮다고 봅니다만.

    • 2007-01-20 13:3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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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단을 나눈다고 나눴는데... 더 나눌까요?

    • 2007-01-20 11: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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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단 나누기가 필요한 시대군요 ^^ 데몽님, 혜민양께서 금방 응해주실거라 생각합니다. 그때가서 정독해야지 ㅋㅋ(농담이구 다 읽었습니다. ㅋ)

    • 2007-01-20 02: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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