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일기 - 영원한 햇살

  • 작성자 관리자
  • 작성일 2007-03-05
  • 조회수 266

 

 이건 일기야. 난 지금 몹시 흥분해있어. [이터널 선샤인]이라는 영화를 보는 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어. 지금 생각하는 모든 것, 최근의 일, 쓸 수 있는 모든 것을 글로 옮겨보면 어떨까? 난 영화를 다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허둥지둥 노트와 샤프 등을 찾기 시작했어. 원래 쓰고 있던 스프링 노트를 꺼냈다가 내팽개치고 어제 받은 윗부분에 스프링이 달린 노트를 꺼냈어. 그 와중에 침대 모서리에 무릎 부근을 긁혔지. 아직도 화끈거려. 샤프를 집어드는 데 며칠 전에 백일장에서의 일이 생각났어. 샤프 심 하나를 빼서 D에게 빌려주고 확인해보니 샤프 심이 달랑 하나, 그것도 4cm를 겨우 넘는 것밖에 없더라고. 난 그걸로 백일장에서, 쓰고자 하는 것을 다 쓸 수 있을지 고민했어. 그런데 다 쓰고도 지금 이렇게 또 쓸 수 있더라고. 그래도 불안해서 동생에게 샤프 심 다섯 개를 받아왔어. 몽당 샤프 심을 샤프에서 빼버릴까 고민했지만 결국 빼지 않고 이렇게 쓰고 있어. 지우개도 내가 누운 침대에 올려져 있어. 잠깐! 난 분명 모든 것을 글로 옮기겠다고 결심했는데. 지우개로 지우고자 한 것들도 분명 모든 것에 속하는데 왜 나는 지워서 그것을 소멸시키는 걸까? 난 정말 몇 번 지우개를 쓰기도 했어. 그래도 이 글은 글틴의 생활글에 올릴 테니까 사람들이 오탈자를 보며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 되잖아. 글틴? 생활글? 이 글을 읽은 사람이 모르면 무척 난감하지. 소설에서도 사람들이 모를 만 한 건 자연스럽게 설명해야 하지. 좀 있다 언급하겠어.

 

 난 노트의, 글을 쓰는 줄 칸 윗부분의 공백에 '일기'라고 썼어. 물론, ''는 실제로 안 썼지. 일기라고 이름 짓기 전에 미셸 투르니에의 책 [외면일기]가 생각났어. [외면일기]를 간단히 설명할게. 바로 외면에서 일어난 일을 쓴 일기인데, 우린 흔히 내면일기를 쓴다고 할 수 있어. 우린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쓴단 말이야. 그런데 [외면일기]는 자신의 외면, 그러니까 주위의 일들을 포착해서 그대로 옮긴다나? 웃기지. '외면에서 일어나는 일이 최고인가? 내면일기는 안 되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난 이 일기를 내면일기라 지어볼까 생각했지. 내 마음속을 표현하고 싶어서. 그런데 문득 내가 외면의 일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진실일기라 칭할까 했어. 모든 것을 진실하게 쓰고자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결국 일기라 칭했어. 진실은 내가 아는 범위 너머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왜 이 일기를 쓰는지 궁금하지? 마음에 위안이 되어서? 글쟁이의 본성? 관심 받고 싶어서?

 난 지금 누구에게 말을 걸듯이 쓰고 있어. 마치 친한 친구에게 속 시원히 털어놓듯이 말이야. 그렇다면, 나는 지금 친구 대신 노트에 내 마음을 털어놓는 거잖아! 그럼 난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어서 쓰는 건가? 그럼 왜 내 마음을 털어놓고 싶었던 걸까? 이 글을 읽는 독자여, 말을 해봐! 뭐? 아, 어제 새벽에 D와 대화한 것이 생각나서? 물론 그것 때문일지 모르지. 하지만, 그게 정확한 답은 아냐. 답은 좀 있다 말해주지.

 

 얘기 나온 김에 D와 있었던 일을 얘기할게. D는 메신저프로그램 너머에서 내게 글틴을 잠시 떠난다고 말했어. 메신저도 삭제한 채 한동안 접속 안 한대. 한동안 글을 올릴 때만 글틴에 들른다나? 이제 글틴에 대해 설명해야겠군. 글틴은 청소년 문학 지망생들을 지원하는 인터넷사이트야. 이야기글, 생활글, 비평&감상글, 시 장르 같은 데에 자신의 글을 올리면 평가를 받을 수도, 장원에 뽑혀 상품을 받을 수도 있지. 글틴의 회원들은 실제로 만나기도 해. 2월 28일 날 정말 우린 실제로 만났어. 나와 D는 서울에 가서 글틴 회원들을 만났지. D는 그것에서 무언가를 깨닫고는, 한동안 글틴을 떠난다고 했어.

 

  D와 내가 서울로 올라간 것은 백일장을 치르기 위해서였어. 우린 전날에 모여서 글틴 사람들과 흥청망청 놀았지. D는 그것이 싫었대. 자기는 문학을 향한 꿈을 위해 온 건데, 이제는 그게 아니라고 했어. D는 계속 현실과 마주하길 겁내고 이렇게 모여서 맘에도 없는 소리를 진실처럼 말하며, 놀고 위안하고 회피를 하고 있는 거래. 꿈을 망각할 정도로 말이야.

 

 그 말을 들으니 내가 참 바보 같았지 뭐야. 그제야 나도 깨달았지. 나는 분명 백일장을 치르러 온 건데 어느 순간 주객전도 되어버렸어. 놀기만 하다가 심지어 이렇게도 말했지. "백일장 수상 기대하지도 않아. 그냥 노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백일장 전날에 글틴 사람들끼리 술을 마신 것도 생각났어. 난 그때 술을 처음 마셨지. 맥주 두 캔 반이나. 내 좌우명 중 하나 알려줄게. "난 술이나 담배 같은 거 하지 않고 최대한 멀쩡한 정신으로 세상을 느껴보고 싶다." 난 내 이상을 망각해버리고 놀기만 한 거야.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어찌나 부끄럽던지.

 D는 계속 얘기했어. 우린 언제나 현실로부터 회피하고 있다고, 가까운 곳에서 행복을 안 찾고 먼 곳을 상상하며 쾌락을 찾는다, 풀이하자면 그런 내용이었지. 이제 가까운 곳에서 모든 것을 행복하게 느끼고 꿈의 길을 걷고 싶다는 내용의 말도 했어. 그래서 떠난다고. 또 우린 그저 평범한 사람들뿐인데 괜히 자기 자신을 특별 취급한다고 했어. 우리가 문학 지망생이라는 이유로 너무 자기 자신을 과장해서 여긴다고 말이야. 자기보다 불행한 자도 많은데 자기가 가장 불행하다고 여기거나, 남들을 비하하면서 자신을 추켜세운다고 말이야.

 

 순간 그 애가 너무나 대단해 보였어. 온몸에서 전율이 일어나고 부끄럽지만 눈물도 나려 했어. 나도 그 애처럼 진심으로 깨달은 거야. 나도 맞장구치며 마음속에서 애써 숨겨오던 것을 꺼냈지. 나는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를 예로 들었어. 내가 마치 거기서 나오는, 사회로부터 도망쳐 정신병원에 숨어 사는 자들 같다고 했지. D도 공감했고 우린 계속 마음의 소리를 필터 없이 내놓으며 대화했어.

 

 그러다 대화는 끝나고 D는 메신저에서 나갔지. 이제 한동안은 인터넷에서도, 현실에서도 D를 만날 수 없는 거야. 나는 D가 정말 좋은 애라고 생각했어. 내게 이런 깨달음을 주다니 말이야. 심지어 자주 대화하는 G나 J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었어. 신께서 사람에게 사랑하는 자를 선택할 권리를 주신다면 당장 D를 선택하겠노라고 말이야. 문제는 실제론 그렇지 않다는 거지. D에게 사랑의 감정이 안 느껴졌거든. 아, 주제넘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하여튼 나는 넘치는 깨달음의 기쁨에 블로그에 한동안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을 그만 하겠다고 선언하는 글을 올렸어. 그리고 잠을 청했지. 앞으로 좀 더 적극적으로 살기로 몇 번이나 다짐을 하면서 말이야. '청소년 대산 문학상을 준비할 테고,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야지!' 그렇게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 잠이 들어버렸지. 무척 좋은 꿈을 꿨어. 그런데 깨어나고 보니 기억이 안 나는 거야! 꿈에 대해서 떠올리면 막연한 행복함만 느껴지는 거 있지! 그래도 일단 행복한 꿈인 건 분명하고 그걸로 충분하잖아? 난 시작이 좋다고 생각했어.

 

 난 학교에 등교했어. 등에 맨 가방엔 글을 쓸 노트와 소설책 한 권이 들어있었어. 나는 학교에서도 새사람이 되기로 결심했지. 오늘은 수업이 없었어. 1학년 입학식이 열렸거든. 2학년인 나는 교실에서 빈둥거리는 수밖에 없었지.

 

 그날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자면, 난 새 시작을 하지 못했어. 예전과 같았을 뿐이야. D처럼 가까운 곳에서 행복을 느껴보려고 했는데. 나는 그저 예전과 똑같은 '나'일 뿐이었어. 한 친구가 머리를 깎은 것을 보고 이상하다고 몇 번이나 비난을 했는지 몰라. 신입생들이 4층으로 올라갔다기에 친구와 함께 4층을 힐끗거렸고 주제넘게 풋풋한 1학년을 꼬시자는 얘기를 하기도 했어.

 

 내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건 정말이지 커다란 실수가 아닐 수 없었어. 나는 이번 1학년 여학생이 예쁘다는 말에 무심코 그런 소리를 꺼낸 거였어. 사실 나는 사랑 없는 연애는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거든. 그것에 대해 글을 써본 적도 있고 말이야. 나의 만행은 그것뿐만이 아니야. 두 시간 동안을 의미 없이 교실을 배회하거나 휴대폰 게임을 했고, 나머지 두 시간 동안은 잠을 자거나 멍하니 앉아있었어. 가방에 들어있는 노트와 소설책은 끝내 밖으로 나오지 않았지. 그 순간 나는 잊고 있었어. 새 시작을. 새벽에 D와 했던 대화는 더 이상 내 마음에 와 닿지 않았어. 교실에서 나는 특별해지고 싶어서 남을 깎아내리고 나 자신을 추켜세웠어. 글틴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멍하니 앉아있었고, 담임선생님이 말씀하실 때 계속 졸았어.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수업이 모두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어. 방에 들어와서도 반사적으로 컴퓨터를 켰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했을 것 같아? 내 블로그에 들어가서 새벽에 내가 올린 글을 살펴보았어. 아무도 댓글을 안 달았지 뭐야. 나는 실망했어. 글틴에도 들어가 그곳의 있는 블로그에도 내가 한동안 떠난다고 글을 올렸어. 그리고는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불법다운로드해서 보기 시작했지.

 

 영화의 남 주인공, 참으로 나와 닮았다고 생각했어. 소심하고 낙서를 좋아하지. 그 조엘이라는 남자가 '왜 항상 나에게 조금만 관심을 보이는 여자를 만나면 곧바로 사랑에 빠져버리는 걸까'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척이나 공감됐어. 나도 그럴 때 사랑까진 아니더라도 갖가지 공상을 하거든.

 

 영화를 보다 난 재생정지를 하고 치대에서 잠이 들었어. 너무 졸렸지 뭐야. 한 세 시간을 잤던 것 같아. 일어나니까 저녁이었어. 대학교 기숙사에 다니던 형이 막 집에 돌아와서 짐을 내려놓고 있었지.

 

 형이 거실의 부모님께 가자, 나 홀로 방에 남게 되었어. 그 순간, 나 울었다.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며, 안면근육이 경련하는 것을 느끼며 말이야. 그제야 난 그날 내가 무척이나 멍청한 짓을 했음을 깨달은 거야. 왜 하필 그 순간 깨달았는지 모르겠어. 그 순간 내 마음이 적나라하게 보였고, 나는 너무나도 창피했어. D가 그날 동안 내가 한 짓을 보면 분명 실망할 것 같았어. 나 또한 실망해서 이렇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으니까. 결심한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나의 결심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거였어? 새벽의 깨달음의 환희가 그 순간 너무나도 생생히 떠올랐어. 그것이 낮잠을 자고 일어난 부스스한 나와 어찌나 대조가 되던지. 나는 나의 초라함을 견딜 수가 없었어.

 

 나는 잠이 덜 깬 거라고 생각하고 찬물로 세수를 하고는, 노트를 꺼내 소설을 쓰려 하며 애써 잊으려 했어. 나는 두 시간 동안 안절부절 집 안을 배회하다 방으로 돌아와 노트를 마주하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지. 그러다가 겨우겨우 써낸 게 뭔지 알아?

 

 "마음속의 그놈이 이제 눈에 보여. 그런데 그놈이 너무 무서워."

 

 나 그렇게 쓰고는 또 울었어. 너무나도 서러워서 말이야. 나 어릴 때 잠을 설치다가 죽음을 생각해 본 적이 있어. 어렸던 난 종교 같은 것도 안 믿던 터라, 과학자의 말대로 죽으면 영혼 그런 것 없이 일말의 의식도 존재 않는 무(無)가 된다고 믿고 있었지. 그때 난 그 무를 느껴보려 했어. 그러나 난 무는커녕 공포만 느끼고 말았지. 내가 아무 의미 없는, 어떤 의사도 없는 썩어가는 시체가 된다고 생각하니 너무나도 무서웠던 거야.

 

 마치 어린 시절 그날로 돌아간 것 같았어. 내 마음이 보였는데, 너무나도 평범했어. 그래, 난 새벽에 있었던 일 이후로 깨달았던 거지. 나 자신이 평범한 사람들 중 하나뿐이란 걸. 물론 그것을 인식했다는 것은 D의 말대로라면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지. 그러나 그건 자신이 평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겸허하게 살아갔을 때나 좋은 일인 거야. 난 받아들일 수 없었어. 내가 그저 보잘것없는 한 사람뿐이라니. 내가 의미 없는 한 생명체라니. 난 그토록 특별하고 싶었는데, 천재이고 싶었는데, 최고가 되고 싶었는데, 그 누구보다도 잘난 놈이고 싶었는데. 내가 그동안 나에게 부여하던 갖가지 의미와 가치가 그저 허울뿐이라니.

 

 정말 구토하고 싶었어. 목 놓아 꺼이꺼이 울고 싶었어. 그 순간은 정말이지 죽고 싶었어. 살아갈 엄두도 안 났거니와, 난 그 순간에도 계산하고 있었던 거지. 죽음으로 인해 특별해지고 싶었던 거야! 난 유서까지 생각하기 시작했지. 그런데 이번엔 D의 말이 생각나고 내가 하는 행동이 너무나 추하게 느껴지면서 다른 의미로 또 울고 싶어졌지.

 

 내면에서 그걸 몇 번이나 반복하는 동안 외면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줄 알아? 우스꽝스럽게도 가족끼리 외식을 하러 갔어. 돼지갈비를 먹으면서 우울해하다니. 우울해도 못 먹을 게 없더구나. 그러면서도 나는 계속 속으로 괴로워하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지. 가족들이 왜 이렇게 기운이 없느냐고 물을 정도로 말이야. 난 그 순간 '내가 또 특별해지려고 하는구나! 지금 나는 누군가의 관심을 끌려고 하지 않는가?'하며 속으로 절망스러워 했지.

 

 집으로 돌아와서도 난 계속 끙끙거렸어. 난 정말 애매한 상태에 빠져있었던 거야. 내 마음이 보이는데, 그것은 너무나도 평범하고, 그런데 난 특별하고 싶고, 그러나 난 나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려고 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고, 그러다 보니 욕구와 이성이 충돌해서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그래서 난 우울한 표정을 지속 있고, 그럼 주위 사람들이 걱정을 할 테고, 결국 난 특별해지려고 하는 꼴이.

 

 방법이 없을까? 이 난관을 해결하는 방책이 없는 걸까? 무슨 짓을 해도 그건 결국 나를 특별하게 여기려는 것이었어. 그 순간 나는 모든 걸 의식하는 예민한 상태였으니까.

 

 결국, 난 잠을 자 버렸어. 잠을 자는 동안은 아무 생각도 안 하잖아? 생각해보니 어렸을 적에 죽음에 대한 공포에 떨 때도 잠이 들자 두려움이 싹 사라져버렸지.

   

 잠에서 깨어나니 오전 11시가 넘었어. 오래 잤더라고. 꿈도 꾸지 않았지. 그래도 여전히 어제의 절망이 수면이라는 아무것도 존재 않는 망망대해를 넘어 오늘까지 날 쫓아왔어. 물론 어제보단 나은 상태였지.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잊혀가는 거니까.

 

 점심 같은 아침식사를 했어. 음식은 여전히 잘 넘어가는데, 여전히 난 슬피 울고 싶었어. 형이 다시 대학교 기숙사로 떠나고 방에 나 홀로 남자 그 기분은 더해졌어. 홀로 방에 남아 생각한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라고 생각해. 혼자 무엇을 생각하든 그것에 제재를 가할 사람이 없잖아? 난 그때 누군가의 내가 너무나 모자란 놈이라고 자괴하고 있었어. 깨달은 것도 실천 못하는 바보라고 말이야. 바보라니, 그것 또한 나 자신을 차별해서 취급하는 것이라 생각이 들었고 난 또 울고 싶어지는 거야.

 

 그러다 어제보다 만 <이터널 선샤인>을 이어서 보기 시작했지. 영화에 집중해서 잠시라도 잊으려고 말이야. 영화 내용은 이래.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연인 사이인데, 서로 말다툼을 하다 클레멘타인이 하워드 박사에게로 찾아가 조엘과 함께한 기억을 지워버려. 조엘도 괴로운 나머지 자신의 기억을 지우러 박사에게로 가지. 그는 클레멘타인과 관련된 모든 물건들을 하워드박사에게 넘겨. 그 다음 그는 침대에 누운 채로 생전 처음 보는 기계로 그녀와 관련된 기억들을 지워나가기 시작해.

 

 난 기억을 지우는 장면에서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어. 나의 고민과 이상을 전부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었지. 어떻게 보면 진정한 새 시작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백지가 된 상태에서 가능한 거잖아? 마침 하워드 박사의 조수 매리가 이런 말을 하더라고.

 

 "망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

 

 나는 그보다 좋은 위안을 찾을 수 없었어! 그러고 보니 이 모든 고민이 쓸데없이 느껴지지 뭐야! 고민을 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잖아? 특히 나의 경우처럼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반복된다면 말이야. 또한 나의 고민은 남들이 보기엔 그저 우스꽝스러운 말장난일 뿐일지도 몰라. 그런 고민이라면 아예 기억을 통째로 없애는 것도 낫지 않을까? 나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느꼈지.

 

 영화가 끝나자마자, 앞에서 말했듯이 나는 글을 쓰려고 허둥대기 시작했어. 역시 앞에서 언급한 대로, 나는 생각나는 모든 것을 썼지. 참, 내가 왜 이 글을 쓰는지 알려줄게. 난 조엘처럼 기억나는 모든 것을 깡그리 그러모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넘기는 거야. 요 며칠 동안의 일을 잊으려고 말이야. 이 일기를 완성하고 나면 나는 다시는 이 글을 들여다보지 않을 거야. 그래, 난 며칠 동안의 이 해프닝을 잊을 거야. 아니, 잊게 되겠지. 어제 꾼 꿈처럼 막연해질 거야. 나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겠어.

 

 자, 여기까지가 원래 내가 쓰기로 한 일기의 내용이었어. 영화의 중간 부분, 그러니까 조엘이 한창 기억을 지우고 있는 동안 난 이런 내용의 일기를 쓰기로 결심한 것이었지. 그런데 그 후부터 영화가 내가 원치 않는 이야기로 진행되어서 생각을 좀 바꾸었어.

 

 그때 나는 이 글을 얼른 쓰고 싶은 마음에 들떠서 더 이상 영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어. 기억을 지운다는 것은 정말 완벽한 방법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었지.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을 모른다면야 우린 아예 기억 속에 지워진 사건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되잖아. 영화 속에서 조엘이 생각을 바꿔, 자신의 머릿속의 기억의 세계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클레멘타인과의 추억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보면서도 전혀 아무렇지 않았어.

 

 그런데 이야기가 점점 이상하게 흘러가더라고. 조엘의 기억을 없애는 걸 주관하는 조수를 돕기 위해 온 하워드 박사에게 매리가 알렉산더 포프의 시 한 구절을 읊어주면서부터 꼬이기 시작했어.

 

 "행복은 순결한 여신만의 것일까? 잊힌 세상에 의해 세상은 잊혀진다. 티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살. 여기엔 성취된 기도와 체념 된 소망 모두 존재한다."

 

 영원한 햇살이라니! 왜 여태 제목의 뜻을 몰랐을까? eternal sunshine(영원한 햇살)! 맘에 안 들었어. 마음속에서 빛나는, 영원한 햇살은 영원히 잊히지 않으니까. 내가 원하는 건 망각인데 말이야.

 

 매리가 자신의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을 안 것도 충격이었어. 난 그런 걸 원치 않았어. 나는 이야기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직감했어. 그래,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서로 기억을 지운 상태에서 만났는데도 다시 사랑하게 되었지. 반복이야. 머리는 잊어도 마음은 잊지 못하고 전의 일을 반복하는 거지. 그들은 다시 사랑을 반복했고, 영화는 끝이 났어.

 

 인정하기 싫지만, 이것이 진정한 결말이라고 나는 생각했어. 단순히 잊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어. 영원히 빛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그래야지 새 시작을 할 수 있는 거야! 나의 고민 속에서도 말이야, 생각해보니 영원히 빛나는 무언가가 있었어. 고민을 무릅쓸 빛나는 무언가가 말이야. 그러자 새벽에 이어 두 번째 깨달음의 전율이 나를 부르르 떨게 하였어!

 

 나는 끝을 고치기로 결심했어. 물론 말했다시피, 나는 최대한 잊으려 노력할 거야. 다시는 이 글을 읽지 않을 거야. 하지만 말이야. 마음속의 영원한 햇살은 절대 잊히지 않는 법이잖아? 그래, D와 대화하다가 얻은 깨달음, 그것은 내 마음속에서 영원히 빛날 거야. 난 그걸 언젠간 꼭 실천하고 말 거야. 물론 전처럼 그 깨달음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고 또다시 고민과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질 수 있겠지. 맞아.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또다시 싸움을 반복할지, 그래서 또다시 기억을 지우게 될지 누가 알겠어? 하지만, 영원한 햇살 덕분에 그들은 다시 사랑하게 될 거야. 그렇게 사랑하고, 싸우고, 기억을 지우고, 다시 사랑하길 반복하다가 언젠간 더 이상 싸우지 않을 날이 올 수 있을 거야. 나도 마찬가지야. 고민과 고뇌를 하다가 이렇게 또 글을 써서 망각하고자 할 수도 있겠지. 그래도 내 마음속에선 깨달음이 영원히 빛나고 있잖아? 그건 무척이나 아름다운 일이지. 그 깨달음이 영원히 빛나는 한 나는 언젠간 깨달음을 직접 실천해낼 수 있을 거야.

 

 이 일기에 새로이 부제를 붙이기로 했어.

 

 일기 - 영원한 햇살

----------------------------------

우선 내게 영원한 햇살과도 같은 깨달음을 준 D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누구 좋은 남자 있으면  D좀 데려가주세ㅇ...(퍽!) 농담입니다.

D가 누군지 알겠는 분이 많겠지만 프라이버시를 위해 그냥 쉿! ^^

그리고 글틴에서 모임을 가지고 그러는 것을 언급한 구절이 있는데,

절대 무조건 현실도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저와 D의 경우에 그렇지, 모두에게 현실도피로 적용된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관리자
관리자

추천 콘텐츠

[수필] 2024년 3월 월 장원 발표

안녕하세요, 김병운입니다. 수필 게시판 3월의 월 장원 발표하겠습니다. 이달에는 12편을 검토했습니다. 지난달에 이어 응모량이 많지 않았는데, 역시 봄이란 계절은 우리에게 글쓰기에 전념할 수 있는 상태 같은 건 쉽게 허락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최근 한 달간 아무것도 쓰지 못했던 저의 심신 상태 또한 어쩌면 전적으로 봄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무책임한 생각도 해보았고요.(이건 쓸데없는 소리네요&hellip;) 이번 봄은 글틴 여러분에게도, 그리고 제게도 많이 쓰지는 못했어도, 언젠가 쓰게 될 것들과 알게 모르게 스치고 엇갈리고 부딪히는 계절이었기를 바라봅니다. 이달의 월 장원 후보는 아래와 같습니다. (송희찬) (담) 그리고 장원은&hellip; 아쉽게도 없습니다. 송희찬 님의 는 낯선 환경 속에서 더욱 극심해지는 기침 때문에 위축되는 하루하루를 기록한 글이었는데요. 자신의 심신에 드리운 이상을 꾸준히 들여다보고 또 과감히 드러냈을 때만 획득할 수 있는 구체성과 정서적 울림이 돋보인 반면, 부정확한 문장과 단조로운 구성 등 글 전반에서 느껴지는 전략의 부재가 아쉽게 다가왔습니다. 담 님의 는 가독성과 섬세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문장이 특히 좋았던 글이었는데요. &lsquo;인디&rsquo;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를 찾아가는 개성 있는 사유와 애정하는 인디 콘텐츠들을 향한 진심은 충분히 전해졌으나, 중반 이후에 몇몇 노래와 작가 자신이 공명하는 지점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가면서 서술이 다소 파편적이고 피상적으로 느껴져 아쉬웠습니다. 다른 작품으로 향했던 시선이 작가 자신에게 온전히 돌아오기 전에 글이 멈춘 듯한 인상도 남았고요. 두 편 모두 성취한 지점이 또렷했지만 완성도가 못내 아쉬웠고, 고민 끝에 이달에는 무리하여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지 않기로 했습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지난 한 달간 수필 게시판에서 박서련 멘토님의 새 장편 소설 출간을 기념하여 미니 이벤트가 진행되었던 것 아시지요? 박서련 멘토님을 대신하여, 이벤트 결과를 전합니다. > 2월 미니 이벤트 댓글 백일장 결과 발표 댓글 장원 &ndash; 사즈 님 댓글 버금상 &ndash; 송희찬 님 두 분께는 박서련 멘토님의 신간 를 보내드립니다! 이번 달에도 수필 게시판에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그럼 저는 4월에 올라온 새로운 글들을 만나러 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관리자
  • 2024-04-19
[수필] 2024년 2월 월 장원 발표(+미니이벤트)

수필 게시판을 찾아주시는 글티너 여러분 안녕하세요, 박서련입니다. 어느덧 3월이에요. 개학을 한 지도 2주나 되었겠네요. 날씨가 많이 풀렸지만 여전히 조금은 쌀쌀하지요. 저는 요즘도 캠프 생각을 종종 한답니다. 캠프에서도 저는 수필 멘토링을 했는데, 수필 작품을 제출해준 글티너 분들께 짤막한 코멘트를 건네고 &ldquo;산문 잘 쓰는 법을 알려주겠다&rdquo;고 말씀드렸었어요. 수필 게시판에는 소설 게시판 활동을 병행하는 글티너들도 많으니 아마 아시겠지만, 수필과 소설은 &lsquo;산문&rsquo;이라는 커다란 분류에 속하지요. 산문을 잘 쓰려면 우선 좋은 골격, &lsquo;기획&rsquo;을 잘 세워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어요. 기획에는 글의 주된 소재부터 독자가 이 글을 읽었을 때 어떤 메시지를 얻었으면 하는지에 대한 생각, 어떤 문체를 구사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 분량은 얼마 정도가 적절할지라든가 흐름과 구성을 어떻게 짤 것인가에 대한 밑그림 등이 모두 포함됩니다. 이 모든 것을 두루 생각하되, 전부를 완벽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렇습니다). 이를테면 &lsquo;구성이 복잡할 테니까 문체는 단문으로 건조하게 써야지&rsquo;, &lsquo;글의 주된 소재가 되는 사건이 단순한 편이니까 감수성이 느껴지는 문장으로 정서 전달력을 높여야지&rsquo;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요. 캠프 현장 멘토링에서 말씀드렸듯, 수필과 소설 모두 산문이기에 기획에 대한 생각은 공통적으로 필수적인 한편 수필이 소설과 구분되는 지점은 시점에 있습니다. 소설에서는 일인칭, 이인칭, 삼인칭이 모두 가능하지만 수필에서는 주인공이나 화자 중 적어도 한 사람은 저자 자신인 일인칭만이 허용된다는 점에서요. (물론 자기 자신을 삼인칭의 시선으로 그려내는 변형도 드물게 있습니다만, &lsquo;저자 자신&rsquo;을 중심에 둔 메타적인 기법이어서 이마저도 아주 예외적이지는 않습니다) 멘토가 산문 잘 쓰는 법을 운운하면서 기획이 가장 중요하다, 라고 했다면 거꾸로 말해서 여러분의 작품을 볼 때 기획 자체를 읽어내려 노력하고 있다는 뜻이 되겠지요. 수필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들은 여러분의 내밀하고 진솔한 사연들을 담고 있어 얼마간 고민 상담을 들어주는 기분도 드는데요, (물론 여러분이 글을 쓴 이유는 잘 알지도 못하는 저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려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좋은 수필로 평가받는 글은 보다 진한 사연으로 이루어진 글이 아니라 좋은 기획 안에서 쓰인 글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기획은 어떻게 세우는 것이냐, 첫째로는 기획을 많이 세워보아야 하고요. 둘째로 자기가 세운 기획과 실제로 쓴 글을 비교하며 기획에 잘 맞는 글을 썼는지, 그렇지 않다면 기획보다 나은 글이 되었는지 탐구하는 자세를 지녀야 하고요. 가장 중요한 마지막, 다른 사람의 글에서 기획을 읽어내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합니다. 왜 이게 가장 중요하냐 하면 가장 기초적이기 때문이에요.

  • 관리자
  • 2024-03-19
[수필] 1월 월 장원 발표

안녕하세요, 김병운입니다. 수필 게시판에서는 처음 인사 드립니다. 올해는 박서련 작가님과 소설/수필 게시판을 함께 살펴보고 번갈아가며 월장원을 선정해보려고 하는데요. 홀수달 발표는 제가, 짝수달 발표는 박서련 작가님께서 맡는다고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수필 게시판 1월의 월 장원 발표하겠습니다. 이달에는 18편을 살펴보았고요. 장원 후보는 아래의 두 편입니다. (눈금실린더) (식빵연필) 그리고 장원작은 (식빵연필)입니다. 이 글은 &lsquo;죽다&rsquo;와 &lsquo;시들다&rsquo;의 용례를 살피며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이미지에 보다 정확히 가닿으려는 작가의 분투가 담겨져 있는데요. 자신이 선택한 언어에 대한 탐구적 자세 뿐만 아니라 작가의 의도를 관철하기 위한 쓰기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쓰기 사이에서의 고민, 추구하는 문학관을 조금씩 벼리는 과정 등을 두루두루 확인할 수 있어서 인상적이었습니다. 내 글이 더 나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안고 단어 하나 술어 하나에 매달려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글이 아닐까 싶네요. 감사합니다.

  • 관리자
  • 2024-02-26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
  • L is fatal

    펜끝의자유님, www.try-to-be-mensch.de/korea/tools/online-ime-korean.htm 에 들어가시면 웹상에서 한글을 입력해서 복사-붙여넣기를 할 수 있답니다

    • 2007-03-21 12:10:30
    L is fatal
    0 /1500
    • 0 /1500
  • 익명

    I love you.... please read my essays.. I'd like to talk with you someday.. there is no Korean font in this country's computer...America...

    • 2007-03-20 08:58:31
    익명
    0 /1500
    • 0 /1500
  • 익명

    "머리는 잊어도 마음은 잊지 못하고..." 다시 반복되는 사랑! 사랑이 지겨워지기도 할 터인데... 지치기도 할 터인데. '사랑하다 죽어버려라'는 시집 제목이 떠오르네요.

    • 2007-03-12 18:24:38
    익명
    0 /1500
    • 0 /1500
  • 익명

    말하듯이 쓰셔서 읽기에 편했습니다..

    • 2007-03-11 01:21:55
    익명
    0 /1500
    • 0 /1500
  • 익명

    Eternal sunshine of spotless mind 좋지

    • 2007-03-05 12:45:05
    익명
    0 /1500
    •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