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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니아적 취미생활에 대한

  • 작성자 신혜련
  • 작성일 2007-06-10
  • 조회수 173

나의 마니아적 취미생활에 대한 고찰

 

 

나는 취미생활을 매우 존중한다. 지금은 취미보단 주 종목이 되어버린 글쓰기도, 내 주 수입인 의상제작도 처음엔 취미생활이었다.이 외에도 여러가지 취미를 갖고있지만 가장 나를 대표할 수 있는 취미는 역시 인형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람들은 인형에 대해서 잘 모른다. 특히나 내가 주로 가지고 노는 구체관절인형에 대해서는 '돈 많이 드는 인형' 으로만 분류할 뿐이다.  물론 구체관절인형은 가격이 비싸다 . 관리비는 인형을 구입하는 비용보다 더 든다.

무섭다고 , 징그럽다고 하는 사람조차 있다. 그렇기때문에 인형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서로 몰리기 시작했고 그들은, 그리고 나는 '마니아' 라는 말로 뭉쳐서 분류되었다.

 

마니아들은 자신의 세계에 몰입하면 몰입할수록 점점 전문가가 되어간다. 전문가 로서 끝내면 좋을텐데 그 분야에 대한 애정이 과해지고 애정은 결국 집착이 된다.

 

사람들은 마니아중의 마니아를 '오타쿠' 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지금 내 주위의 사람들은 나를 '오타쿠' 라고 부르곤 한다. 물론 오타쿠는 좋은 말이 아니지만 장난스레 던지는 그 말을 나 또한 장난스럽게 받아들인다.

 

여기서 나를 오타쿠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위에서도 언급한 '인형'이다. 실제로도 인형에게 보이는 내 애정은 일반인들이 보기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고 인형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진을 찍을땐 기분이 좋았나봐. 표정이 좋지 ?"

라고 말하며 흐뭇하게 말하기도 한다.

 

 소위 인형계(界) 라고 불리는 세상에서 나는 신혜연 이 아닌 쇼우가 되어 활동한다. 인형계에 입문한지도 6년이 지났다. 회원수 4000명을 향해 달려가는 커뮤니티를 대표하는 운영자이기도 하고 두명의 인형을 가지고 있는 오너(owner)이기도 하다.

 이미 인형계에서는 자신의 인형을 자식과 같이 보살피는 것이 일반화 되어있다.가끔 '자식같다' 하는 의미를 잘못 해석하고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요." 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 인형이라기 보단 '아이' 처럼 대하고 내 자식처럼 사랑한다. 인형계는 그러한 마음을 '마인드' 라고 하여 돌아가고 있으며 오너들 또한 그 마음을 소중히 여기고 아이들을 보살핀다.

 

 사람들은 인형 하나에 몇만원씩, 많게는 백만원이 넘는 돈을 쓰는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대단하구나' 라던지 '미친거 아냐 ?' 하며 넘어간다. 그렇기에 나는 인형을 가르키며

"이거 사는데 얼마나 들었어 ?"

라던가

"이 인형 무척 비싸다며. 너 돈 많구나?"

하는 질문을 들으면 기분나쁘기 이전에 속이 상한다.내 애정을 '금액'으로 환산하여 계산하는 이들이 야속하기만 하다.

 

 취미생활을 많이 하다보면, 게다가 그 세계의 정점이라 할 수 있을만큼 깊숙히 관계되어있다면 이미 취미생활은 실생활이 되어버리고 끊을래야 끊을 수 없을 정도로 내 생활의 일부가 된다.

 

만약 그 취미생활이 마니아적인 것이라면 이야기는 조금 심각해진다. 게다가 나처럼 '숨길 수 없는' 그리고 '돈이 많이 드는' 취미생활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문제는 더욱 심화된다. 우선 집안 내에서 부모님과의 마찰이 일어나고, 주위 사람들에게서 이해받지 못한채 겉도는 상황도 발생한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까지도 감내하면서까지 행하는 취미생활이라니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일까 !

 

 지금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달리고 있는 나는 이러한 취미생활에 대해서 자주 고민한다. 수능을 100일 앞둔 7월달에 인형 행사를 준비하고있는 내 꼴이라니 한심스럽기 그지없지만 포기할 순 없다.

 공부도, 인형도,

한 쪽은 삶의 의무이며 한 쪽은 삶의 의지이다. 내게서 인형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으리라는 것을 부모님은 안다. 물론 이해해주신다기 보다는 포기하셨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잔소리와 호통, 어르고 달래기 심지어는 체벌을 통한 훈계에서조차 뜻을 굽히지 않는 나를 보며 한숨 쉬는 부모님께 마지막으로 일침을 가한 말은

 

"이렇게도 좋은걸 어떻해."

 

 

 

사람들은 취미생활을 통해 배움을 얻는다고 한다. 나에게 '인형'을 통해 얻을 수 있는게 있긴 있냐 하고 물으면 나는 조용히 침묵으로 일괄한다.

물론 인형을 통해서 소중한 인연들을 만났고 신용,신의 같은 중요한 정신적 배움이라던가 의상제작에 필요한 여러가지 재봉방법, 심지어는 이 비싼 인형의 원형을 제작하는 실용적능력을 터득한 것 까지 말 할 것은 많지만…….

 

 

그러나 어찌 설명할까

인형의 눈을 통해 진정한 나를 발견하곤 한다는 것을

 

신혜련
신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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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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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혜련
  • 2007-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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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있다. 무언가에 그만큼 빠질수있다는 건 대단한거 같아요.

    • 2007-06-15 20: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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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쩔 수 없는거지... 사람들은 빨간 지붕의 예쁜 집보다는 얼마얼마짜리의 집이란 말이 더 이해가 잘되니까.

    • 2007-06-15 19:3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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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 나도 오너였을 때 '돈 많네...' 이 말 제일 속상했음ㅇㅇ

    • 2007-06-14 20:01:58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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