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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에 대한 아련한 고찰

  • 작성자 Hicky
  • 작성일 2009-11-05
  • 조회수 557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다. 우리 아파트는 산을 뒤에 끼고 있어 꽤 높은 편이다. 단단하게 알이 박힌 종아리가 터져 나갈 만큼이나 다리에 힘을 주어 언덕을 오른다. 이 언덕이 오를 때만 좀 힘들어서 그렇지 다 오르고 나면 꼭 산 정상에 오른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든다.

언덕을 주욱 걸어 올라오면 유치원이 자리한 골목을 따라 빼곡하게 차들이 늘어서있고 드문드문 세워진 전봇대에는 다 붙지도 않은 과외나 주택매매 전단지가 달랑거린다. 심심할 때 전단지 아래에 오징어 다리처럼 오려놓은 전화번호 부분을 뜯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전단지를 붙인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일이다. 미안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종이를 질근질근 구겼다가 쪽지도 접어봤다가 하는 소소한 재미를 던져주는 일에 대해서는 고마운 마음이다.

드물게 시멘트 벽돌로 도배를 해놓은 집도 있기야 하지만, 거의 다가 양철 대문집이다. 양철 대문집 벽에는 물때가 가맣게 끼어있고, 위에는 밤손님들 들어오실 때 각오 좀 하시라는 도전장 같은 창살이나 깨진 유리병 조각들이 꽂혀있다. 사자나 호랑이가 악하고 입을 벌린 그 안에 걸려있는 링 모양의 문고리는 볼 때마다 사선 문양의 팔찌같다. 양철 대문들은 하늘색이나 검은색, 분홍색 따위의 다 마른 페인트 조각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 이리저리 못 같은 날카로운 것으로 긁힌 자국이 보이고, 문의 여기저기에는 불그런 녹이 슬어있다. 파충류의 마른 피부가 쩍쩍 갈라지듯이 녹이 슬어있다. 내가 다섯 살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살던 집의 대문이 딱 이런 모양새였다.

그 때는 지금 동네의 아파트가 아닌 다른 동네의 주택에 살았었다. 담벼락 하나만이 집집마다의 경계선이었던 그 시절, 도장으로 찍어놓은 듯 똑같이 녹이 슨 양철 대문집들은 어찌도 그리 정겨웠던가. 빨간 고무 다라이에 물을 찰박이도록 받아놓고 팬티 바람으로 들어앉아 있으면 언 집 딸이 저래 빵실빵실하그로 이쁘게 생겼노, 구수한 사투리가 짙게 밴 말소리가 사근사근 스며들었다. 옆집 오빠가 놀러 왔어도 부끄럼 없이 한 다라이에 비집고 앉아 물장구를 칠 때가 있었다. 발가벗은 아이들이 행여나 부끄럽지나 않을까 녹슨 대문은 끼익, 둔탁한 잡음을 내며 스르륵 닫혔더랬다.

담벼락 너머로 김장하는 매운 내가 솔솔 날아들면 으레 여자들은 와글와글 모여 그 집에 끼어들어 한 몫 거들겠다고 모이곤 했다. 고무장갑을 하나씩 끼고, 그게 없으면 하다못해 맨 손이라도. 조물조물 치대진 김치들이 김치통 안에 다소곳이 모여들면 그제서야 여자들은 갓 지은 밥을 한 숟갈씩 들고 와 김치를 쭉쭉 찢어 입에 넣었다. 나도 물론 콧물을 줄줄 흘려가며 주는 것을 모조리 받아먹곤 했다.



아파트로 향하는 언덕은 아직 끝이 아니다. 낮은 콘크리트 언덕 두 개를 더 올라가야 비로소 우뚝 서있는 아파트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라인 계단으로 약간 거칠어진 숨을 내몰아쉬며 올라가니, 자전거가 한 대 보인다. 난간에 비스듬히 기대 선 자전거 역시 차체와 바퀴살에 녹이 슬었다. 오죽 녹이 많이 슬었으면 난간에 채워둔 자물쇠에까지 녹이 올라붙었다. 자전거 바퀴가 헛바퀴를 돈다.

예나 지금이나 운동신경과는 일찌감치 작별인사를 한 나였다. 어릴 때 또래 애들이 빨빨거리며 타고 놀던 세발자전거도 나는 타지 못했다고 하니 말은 다 한 셈이다. 그런데 두발자전거라니,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다. 나는 필사적으로 싫다고 했다. 더구나 아파트 주차장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엎어져 팔뚝이 다 갈린 남자애까지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더더욱 싫었다. 자전거는 보기만 해도 싫었다. 저 안장 위에 내가 타는 순간 타이어가 팡, 하고 터져버리진 않을까 얼토당토않은 상상까지 해 가면서.

타기 싫은 나를 억지로 태워 가르치려다 되려 성질이 난 엄마 때문에 자전거 기피증이 가속화되던 어느 날, 나는 아빠의 손에 이끌려 버스를 탔다. 세상에, 도착한 곳이 종합 운동장이라니. 나는 혼자서라도 버스를 타고 갈 작정이었다. 게다가 정류장 앞에 서 있는 내 앞을 쌩하니 지나가는 자전거란. 그러나 아빠는 부드러웠다. 한번만 타 보고, 아니면 타지 말자. 꽤 오래 뜸을 들였던 것 같다. 에라이, 모르겠다 싶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그 날, 나는 안장 뒤에 든든히 버티고 있는 손길에 따라 자전거를 탔다. 그 날은 하늘이 맑았다. 탈 수 있게 된 이후로 아빠는 자전거 한 대를 샀다. 지금은 타지 않는 그것에 녹이 파고들었다. 어린 날의 달달 떨리는 발끝의 감촉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녹이다.



인터넷을 하는데 검색어에 ‘녹 말끔히 지우는 법’이라는 키워드가 뜬다. 제법 사람들이 많이 들어가 보는 모양이었다. 무심코 나는 마우스 커서를 옮긴다. 새로이 뜬 창에는 옷에 묻은 녹이며, 가구에 묻은 녹, 시계에 낀 녹 등등 다양한 물건들의 사진 이미지가 뜬다. 바득바득 구석에 알뜰히도 묻은 녹 자국을 보며 나는 잠깐 웃는다. 안 쓰는 칫솔에 치약을 묻혀 문지른 후 백반 녹인 물로 헹구어 내라, 녹 제거 전용 세제를 가지고 지워서 코팅 액을 발라라 등등. 별별 녹 제거 방법이 다 있구나 싶은 나다.

녹이 스며든 손목시계를 지우는 방법을 일일이 사진을 찍어 설명까지 곁들여 놓은 걸 보면서 나는 조금 착잡해진다. 스펀지로 손목시계를 문지르는 손은 이윽고 시계를 말끔하게 닦아냈다. 스펀지에는 붉은 기가 어린다. 손목시계가 은빛으로 반질거린다.

자전거 녹 지우는 방법도 있었다. 자전거 샵에서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녹 제거제를 뿌린 후 잘 입지 않는 티셔츠 따위로 몇 분 문지르면 된다고 한다. 녹이 낀 자전거와 닦아낸 자전거를 손수 비교한 사진까지 첨부되어 있었는데 확실히 닦아낸 자전거가 성능 좋고 잘 달리는 것처럼 보이긴 한다. 그러나 내 눈길은 여전히 녹슨 자전거에 향해있다.

녹은 주변 환경에 따라서도 생기지만, 시간이 흘렀다는 증거로 생기는 것이다. 시계 침이 한 칸씩 자리를 옮길 때마다 저도 모르게 어딘가에 정착하여 조금씩 스며드는 녹. 녹슨 물건을 보면 누구나 다 ‘저게 오래 된 물건이구나’ 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외관상 보기 좋지 않다고 어떻게든 지워보려 애를 쓴다.

어린 시절 내 곁을 지켜왔던 물건이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나도 나이가 들고, 물건도 나이가 들었다. 나이가 들었다는 걸 나는 훌쩍 자란 키로, 내 물건은 녹으로 이야기한다. 나와 함께 과거를 지내었으므로, 내 유년을, 내 과거를 제일 잘 기억하며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 바로 녹이다. 불그스런 기가 담뿍 서린 그것은 녹이다.

그런 녹을 지워버리면, 말끔한 티가 나는 물건을 바라보고 있자면, 나는 무엇을 추억해야 하나. 내 유년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오래된 벗 같은 녹이 사라지면, 나는 무엇으로 하여금 내 어린 시절을 추억해야 하나. 자전거에 찰싹 달라붙어있던 그 녹이 사라지면, 나는 무슨 수로 무릎이 다 까져가며 배웠던 자전거 페달의 감촉을, 굳건했던 아빠 손아귀의 느낌을 추억할 수 있을까. 양철 대문에 번지듯 퍼져있던 그 녹이 사라지면, 나는 어떻게 부끄럼 없이 까르르 웃으며 함께 목욕을 하던 동네 오빠의 얼굴과, 코끝 아릿한 김치 냄새를 그려낼 수 있을까. 

Hic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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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칸이 붙은 책상마다 사각사각, 하고 필기를 하는 소리가 들린다. 더러는 이어폰을 끼고 있고, 맥 없이 사물함을 열었다 닫았다 하기도 하며, 피곤에 못이겨 잠시 눈을 붙인 애들도 있다. 그 사이에 나도 있다. 빽빽하게 필기가 된 교과서를 들여다보며 폭폭 한숨을 쉬기도 하고 공연히 펜으로 낙서를 하기도 한다. 못 그리는 그림을 페이지 모서리마다 그려넣어 작은 애니메이션을 꾸며보기도. 몇 번의 애니메이션 관람 끝에 나오는 것은, 역시나 한숨이다. 폭폭.  팔랑팔랑 종이를 넘기는 짝꿍과 그걸 몰래몰래 훔쳐보는 나. 베개로 쓸 만큼 두꺼운 그 책은 올해의 수시모집 정보가 들어있는 책이었다. 어느 학교를 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슬쩍 눈알을 굴려 보다가, 정체된 교실의 공기도 그렇고 여러모로 답답한 나는 짝꿍에게 조곤조곤 말을 건다. 어느 학교 보고 있어? 왜 물어봐? 아니, 궁금해서 그냥… 말 없이 보여주는 짝꿍. 아, 그렇구나. 요즘 경쟁률이 장난 아니라던데. 우리랑 동갑인 애들이 좀 많냐, 완전 터지잖아! 짝꿍은 맞다면서, 내 어깨를 툭툭 쳐가면서 이야기한다. 그 수근거림을 들었는지 옆 분단에서 굳은 표정으로 영어 모의고사를 풀고 있던 또 다른 친구가 다가온다. 나도 그 학교 원서 쓰려고 그랬는데! 이러다가 같이 가면 동기되겠네? 우린 숨죽여 쿡쿡 웃는다.  요즘 들어 그런 농을 자주 던지긴 했다. 어느 대학교 앞에 놀러갔을 때, 그 학교 셔틀버스가 지나간 적이 있는데 같이 놀러간 친구보고 "야, 저게 우리가 같이 타고 다닐 버스다!"라고 했더니 감격스럽다는 얼굴로 고맙다고 하지를 않나. 그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책장을 넘기면서, 꼭 자매끼리 엎드려 잡지를 같이 훑어보듯이 손으로 찍어가며 보는 우리. 어느 새 두 명이 더 붙는다. 우린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러다가 책을 덮고 세로로 세워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 "네가 갈 곳은 여기다"하고 놀기도 했다. 그랬으면 좋겠다가 반, 이것만큼은 안된다가 반.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개가 숨 넘어가게 짖기도 하고 새가 구욱구욱 우는 소리도 들린다. 손을 멈추고 창을 바라보면, 맑은 날엔 달빛이 흐르듯이 하늘을 적신다. 참 멋진 광경이라고 생각한다. 그걸 보지 못할 땐, 친구들끼리 달 좀 보라며 가리키기도 하고, 구름을 가리키기도, 앞뒤로 박수를 짝짝 치면서 어이고! 어이고! 소리를 내는 운동장의 아주머니들을 가리키기도. 미간을 찌푸리는 애들 사이로 우린, 또 웃는다. 쿡쿡.  수능을 알리는 디데이 달력의 일수가 두 자리로 줄었을 때, 수시 원서로 한창 바쁠 때 우린 더 많이 얘기를 하곤 했다. 물론 공부하는 다른 애들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쉬쉬하면서. 난 어느 대학에 원서를 넣었는데 면접 반영 비율이 40이 넘어가더라, 나는 1차에서 2배수 밖에 뽑지 않더라, 하는

  • Hic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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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icky
  • 2010-07-25
지붕 밑에서

 당신이 평소에 생각하던 집의 이미지를 그려보세요.  그것으로 당신의 심리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시시콜콜한 심리테스트 따위일 것임을 잘 알지만, 나는 문장을 훑었던 눈길을 백지로 돌려 펜 끝으로 그려내는 나의 집을 한참 들여다본다. 집 그리기란 아주 간단하다. 먼저 사다리꼴의 지붕을 그린 후에, 귀찮은 듯이 사다리꼴의 아랫변에 선을 두 개 적당한 간격으로 긋고, 바닥만 메워주면 된다. 심심하다 싶으면 문과 창문도 좀 그려 넣어보고, 특별한 미적 감각이 있는 이라면 굴뚝에서 피어나 허공으로 흩어지는 연기를 섬세하게 그려 넣어도 좋다. 나는 내가 그린 집 그림을 한번 더 들여다보고, 설명을 읽는다. 예상대로 별 거 아니었다. 창문과 문만 본단다. 창문이나 문이 그려진 사람은 개방적이고 소통을 하려 노력하는 사람이지만,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았다면 소극적이거나 소통에 있어서 다소 문제가 있다고 한다. 나는 창문과 문 두 가지가 모두 그려져 있었으므로 괜히 으쓱거린다.  그러다 친구들은 어떤가 싶은 생각이 든다. 와글와글 모여들어 한바탕 이야기 수레를 뒤집어 엎던 아이들이 일순 조용해졌을 때, 나는 침묵을 깨려는 듯 말한다. 너희, 심리테스트 해 볼래?  이면지 등을 들고와 모두가 자리에 앉았을 때 나는 지시문을 읽는다. 또박또박 군더더기 없이 읽는다. 집부터 시작하여 해, 하늘, 구름, 뱀, 우물 등등 그려야 할 것들을 차례로 그리는 아이들의 종이가 잡다한 그림들로 가득 차기 시작한다. 뱀을 꼭 실지렁이처럼 그린 녀석에게는 장난기 서린 비난도 서슴지 않고 퍼부어준다. 아이들의 종이가 다 찼다. 나는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기나긴 설명을 들은 아이들의 입에서 레몬같은 탄성이 터져나온다. 아, 내가 이랬었나, 에서부터 이건 사기라며 다시 하면 나야말로 인격 완성의 신선이다, 하는 철학적인 농담까지 내뱉던 아이들의 그림을 찬찬히 뜯어본다. 나도 그렇지만 친구들의 그림 실력 역시 고만고만하다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찰나, 나는 아이들의 집 그림을 비교해본다. 그러고 보니 하나같이 사다리꼴의 지붕 밑에 직사각형의 형체가 그려진 집이다. 창문이나 굴뚝같은 다른 요소들이야 천차만별이라도, 어찌 집 모양이 다 비슷비슷하게 생겼다. 나는 묻는다. 너희 혹시 어디에 살아? 그들이 대답한다. 우리 집? 아파트. 여기서 좀 먼데, 우리 학교 앞에 버스정류장에서 버스 타고 40분 정도? 우리 집은 되게 가까워. 요 앞 빌라잖아.  아, 그래? 나는 머리를 긁적인다. 죄다 아파트 내지 빌라에 사는 아이들이다.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든다. 근데 그럼 너희가 사는 집에는 지붕이 없는데 왜 지붕을 다 그렸어? 내가 묻자 다들 대답을 못 하다가 하나가 얘기한다. 보통 집하면 이렇게 그리잖아. 하긴, 나도 그렇게 그렸으니 내가 그들의 자리에 있었어도 저런 대답은 충분히 나왔을 것이다. 똑같이 지붕이 덮인 그들의 집. 나는 공연히 그 지붕의 눈이 시린 하얀 여백에 색칠을

  • Hicky
  • 2010-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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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빌라로 이사오기전에 10년정도 살던 동네가 생각나네요. 큰 철대문 안에 집들이 모여살았는데..거기 슬었던 녹과 친구들과 함께붙였던 스티커따위는 지금 새 페인트로 덮였죠 ㅜㅜ

    • 2009-11-14 14:09:07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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