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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강

  • 작성자 박은유
  • 작성일 2011-06-07
  • 조회수 165

할아버지는 강같은 사람이었다. 늘 한없이 차가웠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시는 분이셨다. 나는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었다. 교육열이 높았던 할머니는 내가 일곱 살 되던 해 나를 대리고 제주도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일곱 살 때까지만 해도 나는 제주도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왔지만, 그 뒤로는 십년 가까이 할아버지를 본적이 없었다.

언젠가 내가 많이 아팠을 때,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내 옆을 지켜 주셨다. 나는 나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는 할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나는 할아버지가 나를 조금 더 신경 써주고, 보듬어 주길 바랐었다. 할아버지는 그런 내가 아프고 힘들어 할 때 마다 주춤거리시다가, 엄마나 할머니를 불러 나를 지켜보게 하셨다. 어린 내 눈에는 그저 할아버지가 내게 관심이 없었기에 그러는 것으로 보였다. 할아버지는 내게 그저 무서운 사람, 조용한 사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할머니를 따라 서울에 올라온 뒤 점점 할아버지를 잊어 갔다.

시간이 지나자 할머니는 여전히 직장을 다니는 엄마를 대신해 나와 동생을 돌보아주셨고, 무뚝뚝하셨던 할아버지는 이제 얼굴조차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까마득해져만 갔다. 수입이 일정하지 않았던 아버지는 집안 형편을 문제로 10년 가까이 할아버지를 뵈러 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중학교 때 수학여행을 제주도로 가게 되었다. 할머니는 내가 제주도에 간다는 소리에 할아버지께 전화를 걸으셨다. 그 소식을 들으신 할아버지는 제주도 공항에서만이라도 나를 보시겠다며 제주도 공항으로 나오시겠다고 하셨다. 나는 친구들이 할아버지를 보는 것이 싫었다. 내 기억 속 할아버지는 늘 과묵하고 엄격하시기만 한 분이셨기에 거부감도 컸다. 또 시간도 많이 지난 후라 나는 할아버지의 옷매무새며 얼굴에 묻어날 세월도 걱정이 되었다. 나는 제주도에 가는 전날 까지도 할머니께 할아버지를 보기 싫다며 때를 썼다. 결국 많은 고민 끝에 마중 나온 할아버지를 보았을 때, 나는 많이 놀라고 말았다. 언제나 정갈하시던 할아버지의 옷매무새는 후줄근했고 까맣던 머리카락들이 하얗게 새어 몇 가닥 남아있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나를 보자마자 세월에 페인 얼굴로 주름진 웃음을 지으셨다.

“보고 싶었다. 많이.”

할아버지는 내손에 꼬깃꼬깃한 삼 만원을 쥐어주시며 말씀하셨다.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눈물이 맺혀있었다. 나는 그렇게 무뚝뚝한 할아버지가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시고 계신 것이 무서웠다. 한편으로는 언제나 엄격하고 원칙적인 것을 중요시하셨던 할아버지가 많이 약해진 것 같아 속상했다. 하지만 나는 할아버지가 창피했다. 나 말고는 아무도 수학여행을 와서 할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다. 또 애써 친구들에게 할아버지를 들켜 쓸 때 없는 변명 따위를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친구들이 화장실에 갔다 오는 틈을 타 할아버지께 삼 만원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할아버지의 손을 빼버렸다. 할아버지의 거친 손이 자꾸만 내 손에 닿는 게 어색했다. 할아버지는 섭섭해 하시는 것 같았지만, 난 일부러 억지웃음을 지어보이곤 할아버지와 있던 자리에서 재빨리 빠져 나왔다. 언젠가 할아버지를 또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또 어린 나에게는 할아버지와 구구절절이 얘기를 하는 것보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수학여행을 다니는 내내 할아버지가 쥐어준 꼬깃꼬깃한 삼 만원이 마음에 걸렸다. 많이 약해진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떠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굽은 등이 내 머릿속을 휘감았다. 할아버지는 밑바닥이 보이는 강처럼 너무도 약하게 흐르고 계셨다. 나는 제주도에서 본 할아버지의 생각에 친구들이랑 노는 일이 전처럼 재미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수학여행을 다녀온 후 얼마 있다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섭섭해 하시던 할아버지의 표정이 떠올랐다. 나는 다시 할아버지를 뵈러 제주도에 가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할머니만 제주도에 가게 되셨다. 엄마는 제주도에 가고 싶어 하는 나를 말리며 말씀하셨다.

“할아버지는 너를 마중 나오기 전부터 몸에 자잘한 돌 맹이들이 자라고 있었데. 간 암이라고 하셨나? 네가 어릴 때 널 얼마나 좋아하셨는데.”

나는 그 순간 할아버지가 내게 쥐어주시던 꼬깃꼬깃한 삼 만원과 할아버지의 거친 손이 떠올랐다. 어릴 적 지워졌던 할아버지의 기억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휘감아 나갔다. 할아버지의 굽은 등이 머릿속에 요동치는 것 같았다. 나는 할아버지가 혼자 감춰오시던 아픔이 얼마나 컸는지, 왜 그때 잘해 드리지 못했는지 후회했다. 누군가가 강에 돌을 던지듯 퍼지는 잔잔한 아픔이 나에게도 퍼지는 것 같았다. 집안 형편을 문제로, 십년 가까이 할아버지를 뵈러 가지 않은 내가 미워졌다.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할아버지가 언제까지나 건강할 것이라는 미련한 생각 때문에 할아버지께 못되게 군것 같았다. 할아버지의 메마른 강 위로 들어난 돌무더기가 내 눈 앞에도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차마 쓰지 못한 주머니 속 삼 만원을 조몰락거렸다. 내 손을 놓지 않으시던 할아버지의 까칠한 손이 생각났다. 겉으로 담담하게 아무렇지 않은 듯 나를 배웅하시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세월을 담은 미소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내가 아플 때마다 뒤에서 남모르게 걱정해주시던 할아버지의 낮은 목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몸 안에 쌓인 돌멩이들을 안고 얼마나 힘드셨을까. 할아버지의 잔잔한 아픔이 가슴 속, 동심원을 그리며 넓게 퍼지는 것 같았다.

박은유
박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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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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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은유
  • 2010-10-03
할머니의 비디오가게

 아주 오래 전 우리 집은 작은 비디오 가게를 했었다. 어린 내 눈에는 매우 커 보였지만 할머니는 우리 가게를 손바닥만 하다고 했다. 비디오들은 마치 성처럼 꽂혀 있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싶으면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어떤 칸에 있는 비디오테이프는 거꾸로 뒤집혀 있었고, 또 어떤 것은 초록 테이프나 빨간 테이프를 감고 있었다. 할머니는 매일 비디오테이프를 대여해 준 다음 빈 곽을 제자리에 꽂아 놓느라 바빴다. 할머니는 평일에 손님이 없을 때면 나를 위해 텔레비전을 틀어 놓았다. 하지만 주말만 되면 후줄근한 옷차림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비디오를 빌려가는 사람들에게 정신이 팔려 나를 신경써주지 못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 헙니다." 할머니는 사람들이 비디오를 빌려 갈 때마다 한 마디씩 해주셨다. 할머니가 무슨 말씀을 하시든 나에게는 너무 어려운 말들이었다. 손님이 없을 때면 비디오 가게는 내 놀이터가 되었다. 나는 좁은 가게 안을 열 번도 더 돌아다니다 힘이 빠지면 할머니를 졸랐다. 그 시간쯤이면 일 나간 엄마가 무척이나 보고 싶어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내게 용돈을 쥐어 주시면서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슈퍼마켓에 보내곤 하셨다. 슈퍼마켓은 내가 꿈꾸던 세상이었다. 그 곳에는 내가 먹고 싶은 과자며 사탕이 가득했다. 나는 그 당시 아이들이 모두 침을 흘리던 구슬 아이스크림을 매일 먹을 수 있어 행복했다. 할머니는 내가 꿈꾸던 세상에 나를 보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슈퍼마켓에 가는 것도 재미없어지면 나는 할머니께 징징거려서 탕수육을 시켜먹기도 했다. 탕수육은 먹음직스런 소스에 담겨 할머니와 내 앞에 펼쳐졌다. 할머니와 나는 바삭바삭한 돼지고기 튀김을 집어 들고 소스에 찍어 호호 불어가며 먹었다. 그렇게 탕수육 한 그릇을 비우고 나면 할머니는 어김없이 일어나 비디오테이프를 정리하셨다. 반납이 늦은 비디오테이프에는 줄을 그어 놓았고, 늘어 난 테이프는 손가락으로 감았다 풀었다, 를 반복하면서 고쳐보시기도 하셨다. 시간이 지나 엄마와 아빠는 회사를 꾸준히 다녀 진급했고, 할머니와 나는 여전히 그대로 비디오 가게를 지켰다. 하지만 DVD니 인터넷이니 하며 세상이 달라지자 조그만 비디오 가게를 찾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갔다. 주말에 간간히 오던 아저씨들도 점점 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박스에 ‘폐업처분 비디오 모두1000원~3000원’이라고 써 붙여 비디오 가게 앞에 붙여 두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오지 않았다. 종종 추리닝을 입은 아저씨들이나 학생들이 간간히 비디오를 한 두 개씩 사갔다. 폐업 마지막 날, 할머니는 내게 탕수육 대자를 시켜 주셨다. 나와 할머니는 장판을 깔아놓은 조그만 합판 쪼가리에 앉아 오물오물 탕수육을 씹었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할머니는 비디오케이스를 정리하다고 비디오를 바로 꽂았다. 그리고 '인생은 아름다워' 테이프를 미리 못 사놨다고 아쉬워 하셨다. 나는 '인생은 아름다워'가 무엇인지 몰랐으나 할머니가 엄청나게 좋아하는 비디오라는 생각이 어

  • 박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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