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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 난 심장 - 내 인생 최고의 경험

  • 작성자 윤스리
  • 작성일 2011-12-17
  • 조회수 403

고장 난 심장 내 인생 최고의 경험

 

언제부터 문학을 창작할 생각을 하셨나요?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라고 대답할 것이다. 평소 글을 쓰는 걸 좋아했지만 평생 글을 쓰며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글을 잘 쓰는 재능을 타고 나야 을 쓰는 사람으로서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명문대에 진학해 학식을 많이 쌓아, 사르트르처럼 어렸을 때부터 책에 파묻혀 살아 학문과 친하게 지내 얻은 후천적 재능이나 소위 천재라 불리는 이들의 선천적 재능이 없으면, ‘예술적 재능이 없으면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난 선택받지 못한 일반인이었다. 내가 물려받은 유전자에 특별한 글재주는 들어 있지 않았고, 환경 또한 유전적 필연에 부응하여 평범했다. 평범했기에 나에게 글을 쓰는 예술가로서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도 여느 인간처럼 특별한 삶을 꿈꿨다. 어렸을 땐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은 점점 해내고 싶다는 소망으로 변해갔다. 주변 사람들이 내 먼 미래, ‘보다 내 가까운 미래, ‘현실에 관심을 가질 때쯤 나는 해낼 수 없을 거란 생각을 확고히 했다. 나에겐 문학적 재능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평범한 인생은 필연(必然)적으로 받아들여야할 운명이었다. 노력을 전적으로 무시한 건 아니다. 물론 노력으로 부족한 재능을 채운 사례가 비일비재했고, 천재는 1%의 재능과 99%의 노력으로 이뤄진다는 말도 틀리지 않았다고 믿었다. 하지만 노력도 재능의 영역이다. 미칠 듯이 좋아하는 것도 재능이라 하지 않던가. 나에게 시간가는 줄 모르게 몰입시키는, 계속 해도 질리지 않는, 하루 종일 그것만 생각하게 하는 불덩이가 없었다. 문자 그대로피를 끓게 하고, 심장을 헤비메탈의 드럼사운드처럼 격렬하게 진동시키고, 영혼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그 에너지를 느끼게 하는 뜨거운 것이 내 안에 없었다. 나 자신이 뜨겁지 못했기에 뜨거운 인생을 살 수 없는 것이었다.

 

학교 컴퓨터게임 학원의 무한반복, 일상이란 철창 없는 감옥생활. 나는 일상에 속박돼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던 모범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내가 차갑게 식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루하루가 하루란 시간을 소비하기 위한 공정(工程) 같았고, 내 육신은 하나의 기계 같았다. 연료를 공급해주는 식사, 1분기씩 성과를 산출하기 위해 보는 시험들, 그 시험을 위한 하루하루 반복되는 노동, 고장을 방지하기 위한 휴식시간, 어쨌든 기계는 1365일 풀가동된다.

 

이렇게 치열하게 살면서 무엇을 얻는가? 기계처럼 살았으니 기계처럼 눈에 보이는 결과를 남겼을 거라 생각했다. 그 결과는 초라했다. 모든 것이 평범해 타사 제품들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가격, 품질, 디자인, 크게 뛰어난 것도 없었지만 부족한 것도 없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재능 있는 분야, 잘하는 분야를 계발해 성공하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재능이 없다고 생각되는 분야, 못하는 분야를 잘할 때까지 밀고 나가 성공하는 경우도 있었다. 딱히 잘하는 것도, 딱히 못하는 것도 없었던 나는 품질은 조금 떨어지지만 가격이 싼 물건에, 가격은 비싸지만 품질이 좋은 물건에, 가격과 품질은 평범하지만 디자인이 뛰어난 물건에 밀려 시장에서 입지를 잃어가고 있었다. 무한경쟁의 시장에서 나만의 무기가 없다는 건 치명적 약점이었다. 나는 도태되고 있었다. 수많은 경쟁자들에 묻혀, 나 자신에 묻혀. 나는 알을 깨고 나가야 하는 새였다. 새란 이름을 가졌지만 온전히 새로 존재할 수 없는 미완의 새, 알 속의 새. 알을 깨트려야 또 다른 세상으로 나갈 수 있었고, ‘수 있었다. 죽기 전까지 날아야 하는 새……모든 인간은 죽기 전까지, 적어도 죽기 전에 한 번은 날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날아야 한다, 날아보지 못하고 죽을 순 없다.

 

날기 위해 필요한 건 날개가 아니었다. 꿈이었다. 꿈이란 이름의 식지 않는 불덩이를 가슴에 품어야 했다. 비상(飛翔)을 위해 나는 알 속에서 꿈을 찾아다녔다. 나만의 꿈을 갖고 나의 인생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알이란 폐쇄적 현실 속에서 꿈을 찾기란 밤하늘에서 별을 찾는 일만큼 힘든 일이었다. 도시의 불빛이 너무 밝아 보이지 않는다는 별빛처럼 현실이 내뿜는 불빛은 너무나 강렬해 이를 외면하고 내 안의 꿈이 발하는 빛을 볼 수 없었다.

 

고등학생이 되니 중학생과는 전혀 다른 일상이 펼쳐졌다. 학교. 집에서 하는 거라곤 아침식사와 취침밖에 없었기에 일상의 일부분이라 보기에도 힘들었다. 학교란 사회 안에서 하루 분의 삶이 충당되기 시작했다. 그 하루가 모여 한 달이 되고, 일 년을 채워갔다. 쉴 틈이 없었다. 방학도 없었다. 오직 대학만이 있었을 뿐이다. 대학은 고등학교의 존재이유이자 고등학생의 유일한 삶의 목표였다. 적어도 고등학교 안의 고등학생은 그렇게 생각해야 했다. 선생님도, 학생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했고,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대학이 차지하는 위상과 실질적인 기능, 그 절대적 권력에 우리는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대학과 직결되는 성적은 숫자 ‘1’ 차이로 학생들의 희망과 절망을 좌지우지했다. 성적이 오르는 학생이 살고 싶다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성적이 떨어지는 학생이 죽고 싶다란 말은 했다. 나는 그것을 똑똑히 들었다. 물론 그 친구는 아직까지 잘 살아있지만 말이다. 그냥 그 말을 들었을 때 괜히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아팠다.

 

모의고사는 끊임없이 나를 닦달했다. 이 등급으로 네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겠어? 이 등급이면 패배자 신세를 면치 못할 텐데? 확실히 내 성적은 특별하지 못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지 못했다. 나는 반사회적이었다. 시키는 일을 잘하면 성공하는 사회를 살면서 군소리가 많았다. 이걸 왜 해야 되는데? 왜 똑같은 길을 걸어야 하는 거지? 잘못된 줄 알면서도 왜 모두 침묵하고 있는 거지? 나는 반동분자였다. 나는 반항아였다.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반항은 아니었다. 나의 반항은 글쓰기였다. 글을 써봤자 모의고사 성적이 향상되진 않았다. 대학입시에 도움을 주진 않았다. 한마디로 글쓰기는 생산이 아닌 소비였다. 극단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사회적 관점에선 생산보다 소비에 가까운 게 확실했다. 하지만 나는 글 쓰는 게 좋았다. 글 쓰는 순간만큼은 모의고사 성적 같은 사회적 굴레에서 해방된 듯한 자유로운 느낌을 받았다. 글쓰기를 두고 혹자는 자기치유의 과정이라 부르고, 혹자는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라 부른다. 모두 맞는 말이다. 사막에서 살아남기와 같은 치열한 생존경쟁으로 지친 영혼을 치유하고, 거친 모래바람에 부딪혀 색을 잃은 내 안의 나를 찾아주었다, 글쓰기는.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 글쓰기가 주는 행복은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렇게 주절주절 글을 쓰다 보니 미화(美化)’한 부분이 없지 않은 것 같아 찝찝한 기분이 든다. 사실 나는 다른 또래 친구들은 다 참고 해내는 그 학업이란 것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부족한 놈이다. 다른 또래 친구들은 좋은 글도 쓰면서, 학업도 충실히 수행하는데 나는 학업은 접어두고 제멋대로 자기 하고 싶은 공부와 글만 쓰는 악동일 뿐이다. 이런 못난 아들을 묵묵히 믿어주시는 부모님이 감사할 뿐이다.

 

이 날이 오기 전까지 나는 특별한 동기 없이 글을 써왔다. 학기 말에 학교에서 독서감상문을 평가해 문화상품권을 주긴 했지만 고작 2만원 받자고 한 짓은 결코 아니었으니 말이다. 사회에 대한 비판문, 논술 형식의 글까진 썼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문학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어떻게 쓸 줄 몰랐다고 할까? 몇 번 시도는 해보았지만 시는 엉망, 소설은 막장과도 같았다. 포기가 빨라 다행이었다. 일상생활에서 느껴지는 감흥이나 특별한 사건이 없어 수필도 쓰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찮은 계기로 글쓰기 대회에 참가한 게 지금으로부터 1년 전쯤이다. 전국독서감상문발표대회. 전국대회였지만 평소 독서감상문을 주로 써왔기 때문에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샘솟았다. 평소에 가장 많이 읽는 세계문학전집이 도서목록에 있어 고민할 거 없이 그 책의 독서감상문을 쓰기로 결정했다. 200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 정성 들여 숨그네의 독서감상문을 완성시켰다. 얼마 뒤 교보문고에서 낭독공감이란 행사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는 독서감상문보단 노벨문학상 작가를 만난다는 기대감으로 낭독공감 행사장을 찾았다. 짧은 시간동안의 만남이었지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주 생생한 장면들이 재생된다. 독어독문학과 교수님 두 명을 사이에 앉아 독일어로 작품을 낭독해주시던 작가님의 육성이. 그리고 아주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 떨림이. 모든 낭독이 끝나고 행사를 마치기 전에 작가님께 질문을 드리는 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속으로 열심히 질문을 만들어봤지만 모든 질문들은 공중분해의 운명을 피하지 못했고, 그러는 동안 질문시간이 끝나고 행사도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마지막 질문자를 선정할 때 나도 손을 들었다. 결국 다른 사람에게 질문권이 넘어갔지만 그 당시 내 심장은 고장 난 듯 팔딱팔딱 격렬하게 뛰었다. 심장박동소리가 들릴 정도로 말이다. 첫 경험이었다. 격렬한 운동도 하지 않았고, 심장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내 심장은 벌렁벌렁 거렸다. 문학계의 거성(巨星)에게 질문을 한다는 생각만으로 나는 흥분한 것이다. 놀라웠다. 한 동안 멈추지 않던 심장의 벌렁거림이 내겐 마치 부활처럼 느껴졌다. 죽었다 살아난 듯 순간적으로 흘러넘치던 에너지를 또 다시 느껴보고 싶었다.

 

예선결과 발표당일 나는 낭독공감 때보단 한참 덜하지만 확실한 심장의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고장의 기미가 보이던 심장은 결과를 확인하고 마침내 미쳐 날뛰었다. 본선진출자에 내 이름이 포함돼 있었다. 어쨌든 전국 단위에서 뽑힌 5명 중 하나가 바로 나였다. 본선진출도 장담하지 못했으면서 결과를 확인하자마자 내 태도는 돌변되었다. 내가 태도를 돌변했다기보다 태도가 스스로 돌변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마 그 동안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무의식에 차곡차곡 쌓였던 것 같다. 별 볼일 없는 학업성취도를 받았지만 독서감상문 형식의 글에 있어서만큼은 적어도 교내에선 1인자라 자부하던 나였다. 하지만 교내에서 날고 기어봤자 우물 안의 개구리일 뿐, 더 큰 무대에서 내 실력을 검증받길 원하고 있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여기서마저 형편없는 성적표를 받게 된다면 나는 내 자신에게 실망했을 것이다.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의 교집합이 유일무이(唯一無二)했다. 하고 싶은 것=할 수 있는 것=글쓰기였다. 현실과 이상 간의 괴리를 최소화하기 위해선 글쓰기로 승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갈고 닦아 왔던, 세상에게 첫 선을 보인 내 칼이 적중한 순간이었다. 그 날 나는 다짐했다. 하고 싶은 것=할 수 있는 것=글쓰기, 이 등식에 해야만 하는 것을 추가하자고. 여기에 내 전부를 걸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평생 후회하며 살고 싶지 않다면 지금 이 순간부터 내 인생을 글쓰기에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첫 출발을 끊은 나는 결전의 그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앞으로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결정적 다짐을 하고 나니 심적으로 학업은 뒷전에 놓였다. 고등학교 2학년 기말고사까지 어영부영마친 나는 이후로 독서와 독서감상문 창작에 매진했다. 어찌됐든 대학진학의 끈은 놓지 않아야 했기에 겨울방학에 이과에서 문과로 전과를 마치고, ‘문예창작학과를 지망하기로 결심했다. 명성 있는 학교의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하기 위해선 실기성적과 학업성적이 필요했다. 2학년 동안 성적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지만 전과한 덕분에 탐구성적은 포함되지 않았고, 3학년 내신이 반영비율이 높았기에 나는 희망차게 고등학교 3학년을 시작할 수 있었다. 실기를 위한 소설 창작은 3월쯤에 겨우겨우 시작했다. 학원 같은데 다녀봤자 조직적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고 쉽게 흥미를 잃을 게 불 보듯 뻔했다. 그 때 당시엔 학원에 다니면 대학진학을 위해 소설을 쓰는 거란 이상한 생각에 빠져있었다. 나는 현실과 적절히 타협하는 법을 몰랐던 애송이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인생 공부가 부족했던 것 같다. 자신이 소망하는 대학에 진학한 이후에 자신이 쓰고 싶은 문학을 맘껏 해도 늦지 않은데, 늦깎이로 시작해 되지도 않는 자존심 같은 걸 지키겠다고 객기를 부렸으니……. 모든 선택엔 후회가 남기 마련이니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그러니 이 선택을 후회 없는 선택이라 자위했다. 후회 없이 여기까지 달려왔지만 그 날의 앙금은 아직 풀리지 않고 있다. 결자해지(結者解之)의 기회를 영영 놓쳐버려 지붕만 올려다보고 있는 개 신세랄까. ‘그 날에 닭을 어떻게 놓쳤는지 아직도 잊을 수 없기에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젠 '그 날' 놓친 닭을 회상하면서도 웃을 수 있다.

 

첫 번째 그 날은 정말 마음 편하게 시작했다. 혼자가기 심심해 친구와 동행했다. 대회시작 한참 전에 도착하는 바람에 친구와 나는 대회장 근처를 배회했다. 한참을 걷다 운 좋게 한강을 찾게 돼 우리는 한강으로 흘러들어갔다. 걷기가 밋밋해진 우리는 자전거를 대여해 신나게 한강 곳곳을 누볐다. 자전거를 타던 도중 아주 몸매가 좋은 여성분께 우리도 모르게 눈길을 흘렸다. 시간이 얼마 안남아 자전거를 반납하러 가며 그 여성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웠는데 그 여성이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친구의 증언을 듣고 파안대소(破顔大笑)했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던 우리는 헐레벌떡 대회장까지 뛰어갔고, 다행히 지각하지 않았다. 숨을 가누며 신원확인을 하고 있었는데 대회관계자 분께서 원고를 들고 왔냐고 물었다. 나는 사전에 대회장에 와서 또 다른 글을 쓰는 줄 알고 있어 살짝 당황했다. 이건 전국독서감상문발표대회였던 것이다. 자신이 예선에 낸 글을 잘 발표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대회관계자께 부탁해 내 원고를 챙겨들고 현장에서 원고를 수정했다. 독일어 Zeitgeist의 발음을 물어보고, 어색한 부분을 고치고 정신없이 퇴고를 하고 있었는데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발표가 이뤄지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니 본선에 진출한 5명의 중학생과 3명의 고등학생이 각각 심사위원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 국면이었다. 내가 자리에 착석하고 나보다 조금 더 지각한 여고생까지 착석을 마치고 진짜 본선대회가 시작됐다.

 

동생들이 먼저 시작했는데 첫 번째 주자로 나선 여중생이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대한 감상문을 수준급으로 써내 인상적이었다. 세 번째 정도로 나선 여중생은 집에서 직접 진흙쿠키를 구워오는 열정을 보였다. 한편으로 더 나은상을 받기 위해 발표와 직접적 연관이 없는 쇼맨십을 보여준 것 같아 씁쓸하기도 했다. 중학생들의 발표를 경청하는 동안 내 심장은 본선결과를 확인할 때처럼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태연한 척하며 짐짓 침착성을 유지하고 있던 내 심장의 울렁증이 시작된 것이다. 내 차례가 다가올수록 울렁거림은 어지러움으로, 어지러움은 통증으로 변모해나갔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고, 나는 침착하게 감상문을 읽었다. 결과는 은상. 한마디로 본선진출자 중 꼴찌그룹이었다. 심사위원께서 내 실패원인을 설명해주셨다.

 

이건 발표대회입니다. 낭독대회가 아니고요. 적어도 발표문을 암기해오는 성의는 보였어야 했는데 아쉽네요.” 나는 아쉬운 결과에 화난 것인지 발표대회임을 인지하지 못한 스스로의 무지에 화난 것인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상을 받고, 기념촬영에 임했다.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고 말이다. 표정관리가 불가능했다. 내 속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내년을 기약했다.

 

내년의 그 날은 수능+2 날이었다. 1112. 본선진출자 확인도 마음 편하게 했다. 다른 대회들을 통해 독서감상문에 있어서만큼은 확실히 자신감이 붙은 상태였다. 수능 전 틈틈이 시간을 내 원고를 수정했고, 원고를 암기했다. 작년엔 대상에게 주어지는 장관상을 노렸지만, 이번엔 좋은 발표를 보여주고 싶었다. 작년에 비해 스폰서가 부족했는지 부상도 넷북에서 전자책 단말기로 바뀌기도 했지만 상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상관하지 않았다. 낭독으로 참패를 맛보고 나는 겸손함을 배워갔다. 자만이란 내 안의 가장 큰 적을 극복하기 위해선 겸손의 미덕을 실천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두 번째 기회를 얻고 나서 1년 전 이 대회에 응모했던 원고를 보니 그 당시만 해도 본선진출자 중 내가 최고라고 자부했던 원고치곤 너무 엉성했다. 원고를 완벽하게 암기했어도 대상을 장담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나는 작품에 대한 나르시시즘을 버리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이전과 다르게 이번 원고는 서너 번의 퇴고를 거쳐 완성도를 높였다.

 

그렇게 속으로 겸손을 외쳤지만 대회 하루 전부터 숨죽이고 있던 자만의 씨앗들은 싹을 틔우자마자 꽃을 만개했다. 양귀비처럼 겉은 아름답지만 속은 마약에 중독된 초췌한 모습이었다. 글로써 경쟁자들을 압도할 수 있다는 자만심에 절어 겉은 득의양양한 표정을 띠고 있었지만 속은 또 다시 실패를 경험할 걸 직감한 듯 불안에 떨고 있었다. 수능이 끝났다는 해방감에 원고를 열심히 외워야할 시간을 몽땅 노는데 허비하고 말았다. 시간이 생기는 대로 원고를 낭독해보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 지금까지 쓴 독서감상문 중 최고 수준이라 할 만한 작품이 완성되었는데……1년만의 복수 같은 재도전을 위해 갈고 갈았던 칼을 제대로 휘둘러보지도 못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내 책임이다. 대회당일 나는 모든 것을 체념한 채 홀로 대회장을 찾았다. 그냥 내가 공들여 쓴 글을 청중들께 잘 들려주자고 마음먹었다.

 

A4 용지 두 장과 1/4 분량의 원고. 길다하면 길고, 짧다면 짧은 원고를 들고 마이크 앞에 섰다. 그 순간 나는 말도 안 되는 주문을 스스로에게 걸기 시작했다. 임기응변으로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고 생각이 내 의식을 전복했다. 낭독을 하면 작년과 똑같이 은상에 머물 거란 생각이, 그것만은 피하자는 알량한 욕심이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날뛰었다. 내 심장은 다시 고장 나기 시작했다. 내 심장에 이상(異常)이 오든 말든 발표는 계속 되어야만 했다. 1페이지 분량은 그럭저럭 넘어갔다. 어떻게든 발표를 마칠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2페이지 초반 정도를 넘기고 나는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실어증에 걸린 것처럼 말을 못했다. 당연히 장내는 싸늘한 정적에 휩싸였다. 아무도 이 정적을 깨주지 않았다. 나는 원고가 생각나지 않아 어떤 단어라도 떠올려보려 했지만 머릿속은 문자 그대로 화이트아웃(whiteout)이었다. 무겁고, 무서운 침묵이었다. 관중들의 눈 속에서 기적을 찾으려 했지만 돌아오는 건 자괴감뿐이었다. 절망적 추위였다. 도망칠 수 없는 무대에서 알몸으로 서있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수치심으로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얼굴이 벌개지고 나서야 차라리 낭독이나 할 걸하고 후회가 뒤늦게 물밀 듯 밀려왔다. 작년과는 다른 느낌의 물살이었다. 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 밤바다가 연상됐다. 내 안에선 검은 파도가 하릴없이 부서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뜨거웠던 작년의 후회엔 분노가 섞여있었다면 올해에 차가워진 후회엔 허무가 섞여있었다. 앞으로 이 대회에 참가할 수 없으니 이번이 마지막 기회인데 나는 보기 좋게 마지막을 망쳐버렸다. 처음부터 원고를 낭독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나는 결국 끝까지 원고를 보지 않은 채 발표를 마쳤다. 더 이상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강제로 종료한 것이다.

 

작년과 똑같이 은상을 받았고, 기념촬영을 했다. 나는 사진기자의 면박을 들으면서도 표정을 고칠 수 없었다. 나는 잘 알고 있다. 내 표정이 어땠을지. ‘쓰레기같았을 것이다. 그런 표정을 평소에 짓고 다닌다면 난 매일매일 누군가와 시비가 붙어 싸우고 있을 것이다. 기어코 나는 그 날누군가와 격렬히 싸우고 말았다. 나 자신과.

 

살면서 심장이 고장 난 순간이 몇 번 있었다. 위에서 말한 것만 해도 4번이나 된다. 낭독공감에서 헤르타 뮐러 작가에게 질문하는 시간, 2 때 독서감상문대회 본선진출자 확인할 때, 2 때 독서감상문대회 본선에서 발표할 때, 3 때 독서감상문대회 본선에서 발표할 때. 나는 심장이 고장 나는 기이한 체험을 통해 내 꿈을 정했고,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겼다. 하지만 가장 최근에 고장은 정말 변태적 헐떡거림이었다. 자신이 노력한 만큼 주어지는 결과를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 더 나은 결과를 받으려는 도둑심보. 나는 더 이상 내 심장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 순수한 열정으로 힘차게 뛰는 심장만을 보고 싶다. 심장이 이끌어준 내 꿈을 향해 열심히 달려간다면 그 순간이 꼭 다시 찾아올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평범한 내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순간이었던 그 순간, ‘그 날. 나처럼 평범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그 날을 찾아가길 바란다. ‘그 날은 아주 특별한 만남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심장을 미친 듯이 뛰게 만드는 사람, 사랑, 꿈과의 만남이 당신을 만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테니.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고장 난 심장, 내 인생 최고의 경험은 바로 이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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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인연

우연히 그대를 본 순간   ‘우연히 그대를 본 순간/우연히 그대를 본 순간/우연히 그대를 본 순간/우연히 그대를 본 순간’ 중독성 강한 멜로디와 반복적인 가사가 돋보이는 이정선의 ‘우연히’라는 곡의 후렴 부분이다. 가사 내용은 간단하다. 우연히 본 그대에게 내 마음을 다 빼앗겼다는 내용이다. 한순간 내 마음을 빼앗아 버린 그대를 나는 인연이라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내 우주의 중심은 ‘나’니까 단순한 우연은 있을 수 없다.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하기에, 우연(偶然)보단 인연(因緣)을 특별하게 느끼기에 우리는 수많은 우연 중 하나를 꼽아 인연으로 둔갑시키는 지도 모르겠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은 우리가 평소에 말하는 인연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준다. 인연의 겁이란 우주가 태동해서 멸망하기까지의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장구한 시간을 의미하며, 일 겁의 시간은 물방울이 떨어져 집 한 채만한 바위를 없애는데 걸리는 시간이라고 하여 힌두교에서는 43억 2천만 년을 1겁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범망경에서는 선근인연이라 하여 전생에 좋은 과보를 맺은 사람 간의 만남을 겁으로 표현한다. 1천겁에 한 나라에 태어나고, 2천겁에 하루 동안 길을 동행하며, 3천겁에 하룻밤을 한 집에서 지낸다. 4천겁에 한 민족으로 태어나고, 5천겁에 한 동네에 태어나며, 6천겁에 하룻밤을 같이 잔다. 7천겁은 부부가 되고, 8천겁은 부모와 자식이 되며, 9천겁은 형제자매가 된다. 1만겁은 스승과 제자가 된다고 한다. 우리 주변에 당연히 존재하는 인연들이 조금 다르게 보이지 않나? 불교의 관점에서 인연은 우연이란 수학적 개념보다 필연이란 철학적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모든 인연은 우연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아빠, 엄마가 생긴다. 아빠, 엄마, 형제자매 같은 가족은 인생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관계이다. 자의든 타의든 일단 가족을 이루면 가족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몇 십 년 동안 떨어져 지내면서 얼굴조차 선명히 기억나지 않는 이산가족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이유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인류학적, 심리학적 이론을 제시한다고 해도 가족에 느끼는 특별한 유대감을 설명하기엔 역부족이다. 가족뿐만 아니라 내 주위에 도저히 계산할 수 없이 복잡한 운명의 실타래를 보고 있노라면 신이란 존재에 대한 경외심이 샘솟는다.  나는 그레고리력을 기준으로 1993년 1월 대한민국의 어느 병원에서 태어나 주로 수원에서 살았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람 사는 게 다 똑같다곤 하지만 이 중 하나라도 달라지면 내 인생 전체는 전혀 다른 판도로 흘러가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빠른 생일이라 빨리 입학했더라면 지금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한 상태이다. 하지만 나는 93년생들과 함께 학창시절을 보냈고, 그들과 친구의 인연을 맺었다. 내가 만약 대한민국이 아닌 독일에서 태어났더라면, 1993년이

  • 윤스리
  • 2012-02-11
페이스오프 : 가면의 고백

  나는 몰랐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변해가는 그의 얼굴을. 가면 뒤에 감춰져 은밀한, 매일 한 꺼풀씩 벗겨지는 음란한, 얼굴의 진실을. 나는 지금 그를 추억한다.   첫 만남 D-240   나와 그의 첫 만남은 특별하지 않았다. 그것은 운명이 아닌 필연이었다. 때가 오면 그를 만날 거란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기다림 끝에 자리하는 시간의 사구(砂丘)였다.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닳고 닳은 설렘, 무심하게 침식당한 설렘 밑에 쌓인 무미건조한 기다림의 부스러기, 그 부스러기가 모여 나도 모르는 사이 거대한 모래사막이 되어있었다. 시간이 흘러 사막은 깎였고, 모래는 언덕을 쌓았다. 그것은 사막에서 으레 볼 수 있는 평범한 건축물이었다. 나는 태어나기 전부터 그와 만날 운명이었고, 마침내 만났다.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나와 그의 관계가 불편할 거란 걸. 그리고 처음부터 틀어진 관계가 영원히 회복될 수 없을 거란 걸. 걷고 또 걸어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구(砂丘)에서의 여정처럼.   물음표 D-?   나는 이과였다. 내 스스로 문과 쪽이 절대우위하단 걸 알았지만 이과를 선택했다. 그것은 어떤 치기어린 도전이었다. 우뇌와 좌뇌의 결합이란 거창한 목표로 시작한 도전은 도전다운 열정 한번 불사르지 못하고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내 좌뇌는 오래전에 굳었다. 공부를 한창 열심히 하고, 또 잘했던 시기에도 이과 계열보다는 문과 계열이 우수했다. 일단 국어, 영어, 사회는 재밌었고, 과학은 재미없었다. 수학은 싫어했다. 수학은 하나의 노동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내가 그 노동을 수확 없는 소비활동이라 간주한 데에 있다. 수학과에 진학하지 않으면 수학은 단지 대학을 가기 위한 수단에 불구하다고, 미분적분을 한다고 해서 내 인생에 도움이 되지도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이과에서의 실패는 예견된 일이었다. 수학을 잘하기 위해선 끊임없이 생각해야한다. 나는 학원을 같이 다니던 친구들이 학원을 떠나면서 수학에게 잠깐 동안 이별을 고했다. 어쩌면 도피였을 지도 모른다. 수학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것은 불운이었고, 행운이었다. 나는 끝없는 추락을 통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들어와서 공부를 열심히 해도, 이과에 진학해 수학공부에 매진해도 수학은 추락 혹은 정체였다. ‘매진’이란 표현이 무색하게 나의 노력은 딱 추락을 멈출 수준이었다. 죽지만 않을 정도로 등급컷이란 수면 위에 입만 내놓은 상태로 호흡을 이어갔다. 그것은 내가 바라던 삶이 아니었다. 인생이 점점 피폐해지는 것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정신적 발기부전이었다. 열정이 샘솟지 않았다. 노력도 없었다. 나는 ‘그저 그런’, 다시 말해 누구나 다하는, 그래서 별 볼일 없는, 그리고 평범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 열심히 호흡하지 않았기에 산소호흡기가 필요했다. 나에게 억지로 산소를 공급해주던

  • 윤스리
  • 2011-11-10
노동, 고결한 생명의 철학

   나는 많은 지식인들이 ‘노동’을 찬양했다는 걸 알고 있다. 최근에 다녀 온 코르다전(展)에서 체 게바라의 에피소드를 통해 다시금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쿠바 혁명 이후의 일이다. 쿠바의 첫 사탕수수 수확기를 시운전하는 체 게바라가 시운전하는 모습을 사진에 담기 위해 코르다는 그를 찾아갔다. 코르다는 말했다 “드디어 뵙는군요. 사탕수수 수확기에 관한 기사를 쓰려고 왔습니다.” 그러자 체는 코르다에서 사탕수수를 베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코르다가 없다고 대답하자 체는 수행원 한명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이 사진작가에게 마체테 칼을 하나 주시게나. 사탕수수 수확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어 코르다에게 “아침마다 사탕수수를 베어보게나 그리고 다음 주에 다시보기로 하세.” 결국 코르다는 직접 사탕수수를 베는 노동을 경험하고서야 체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노동의 본질은 생산에 있다. 자신의 에너지를 쏟아내 가치를 생산한다. 그것은 육체적 노동일수도 있고, 정신적 노동일수도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노동에 우열 관계를 정립시켜 인식해왔다. 지난 세기 우후죽순 터졌던 혁명운동은 사실 노동에 대한 차별에 저항한 것이다. 자본을 가진 부르주아가 책상에 앉아 펜대를 굴릴 때 프롤레타리아는 작업장에서 시간도 없이 일하는데 각각의 대우는 파격적이다. 마치 두 노동 간의 간극이 인류의 역사를 쭉 늘어뜨려 놓은 듯 끝도 없이 뻗어있는 형색이다. 물론 정신적 노동의 성취가 인류를 진보시켜 작금의 경지에 도달시킨 건 인정한다. 하지만 육체적 노동이 동반되지 않았더라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도달했을 지라도 뇌세포 속에 안장되었을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킨 건 책 그리고 땀이다.  나의 아버지는 노동자이다(땀도 많이 흘리신다). 시민들의 발인 버스를 운전하신다. 본인은 종종 내가 무능력해서, 가난해서 미안하다고 말하시지만 내게 그런 사과는 사치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고서 어떻게 가난을 논할 수 있겠는가? 가난을 몰랐더라면 검소한 생활습관이나 빈자에 대한 배려를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한번은 아버지에게 ‘옛날에는 귀족이셨잖아요’하고 농담을 던진 적이 있다. 아버지께서 웃으시긴 했지만 ‘그 기사랑 이 기사랑 같니’라며 웃음을 거두셨다. 씁쓸한 웃음이었다. 내가 아버지께 해드릴 수 있는 거라곤 아버지 얼굴에 웃음을 선물하는 것뿐인데 그것마저 잘 안될 때가 있다. 일을 마치고 새벽에 돌아오시는 아버지를 마중 나가 가볍게 인사하고 대화는 단절된다. 덜어내려 해도 손닿지 않는 가슴 깊은 곳에 앙금이 남아 있어서다. 비교적 조용한 사춘기를 보내고 나는 스스로를 ‘정신적 노동자’로, 아버지를 ‘육체적 노동자’로 정의했다. 이분법의 철저한 질서는 의식의 그림자에서 차곡차곡 벽을 쌓아올렸다. 어린 시절 버릇없는 나를 향했던 아버지의 주먹질과

  • 윤스리
  • 2011-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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