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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

  • 작성자 식신녀
  • 작성일 2012-11-13
  • 조회수 207

 점심시간이었다. 입동이 가까워져 날씨가 제법 추워졌다. 줄을 서면서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바라봤다. 복도에 난 창문 두 개가 아래위로 활짝 열려있었다.

 "추운데 창문을 닫을까."

 내가 말했다. 말을 하고 나니 어쩐지 입이 근지러워져서 더 말을 하고 싶어 못 배겼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까지 다른 아이들이 창문을 닫지 않은 이유가 뭘까?"

 민정이는 글쎄, 라고 하며 내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 친구의 무심한 태도는 내가 말을 이어가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다. 평탄치 않은 이 친구의 반응 속에서 나는 말을 하는 동안 끊임없이 내 이야기에 채찍질을 하고 매도하고 박차를 가한다.

 "난 알 것 같군. 저들은 분명 누군가가 환기를 하기 위해 이 창문들을 열어놨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그럴 수도 있겠네."

 이야기 보조를 맞추기 위해 그녀가 대답했다. 나는 자신감이 증폭되어 물 흐르듯 얘기를 꺼내 놨다.

 "저들은 이 열린 창문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한 거야. 어떤 의미일까, 가장 그럴듯한 이유, 가끔 우리의 선생님들은 환기를 하라고 수업 중에 문을 열어놓는 일이 비일비재하지. 그분들의 습관을 떠올린 저 친구들은 복도에 탁한 공기가 채 빠져나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일찌감치 닫아버리기를 포기한 거야."

 난 말을 정리하기 위해, 다시 말해 내가 뱉은 말의 의미를 전부 이해하기 위해 말을 멈췄다. 아까 한 말에 모순되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다. 실수라도 하면 내 말의 논리력이 약해질 테니.

 "사람들은 의미 없음을 두려워 해. 어떤 행동이나 결과물을 놓고 이것의 원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지. 상대를 그저 괴짜라고 말해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그러는 거야. 미안, 덧붙여 설명할게. 결과를 놓고 보니 하도 이상하기 짝이 없어서 괜히 그를 이해 못할 괴상한 놈이라 불렀는데 알고 보니 그게 누구보다도 현명한 생각에서 나온 신중한 결과물이었다고 생각해 봐. 그럼 나는 뭐가 되느냐? 저 사람의 행위 하나 헤아리지 못한 속 좁고 이해심 없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겠어? 그 사람은 비난을 하는 것 보단 차라리 멋진 의미를 붙여주는 게 자기에게 낫다는 걸 알아차릴 거야. 곧 그 사람은 거기에 신성불가침한 의미를 붙여주고 더 이상 어떤 사람도 이 작품에 할 말이 없도록 만들 거야. 그러고는 자기가 그 의미를 발견한 것에 대해 뿌듯해하겠지."

 나는 그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반쯤 미소를 지었다.

 "이제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는 부조리에 대해 말하지."

 "삿대질 하지 마."

 그녀가 내 손가락을 치웠다. 나는 크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머쓱할 때 자주 나오는 것이다.

 "생각해볼까, 우리는 미술 하는 사람이야. 나는 조소과, 너는 디자인과. 고등학생이지만 우리는 벌써 작품을 여러 번 낸 적이 있어. 작품을 매번 낼 때마다 우리는 단 하나뿐인 이 작품에 무슨 이야기든 붙이려고 하지 않나.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 있어. 이야기가 있어야만 합리적이라 느끼고 안정감을 찾는 거지. 정말 생각이 없는 애들 가운데서는 더러, '그냥' 이라는 말을 너무 흔히 쓰는 경향이 있는데, 그때마다 선생님들 반응을 봐봐. 그냥 그렸다고! 그럴 리가 있나! 민감한 선생님은 비난을 할 것이고 제 아무리 유순한 선생님이라도 그 친구의 작품에는 더 이상 신경써주지 않게 될 거란 말이야. 너는 아마도 여기서 '정성'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네."

 나는 예를 하나 더 떠올렸다. 갑자기 떠오른 이 생각에 기특함을 느꼈다.

 "뒤샹의 '샘'을 기억해봐. 그는 그 작품에 여러 의미를 부여하려는 평론가들에게 조소를 날려줬지. 뒤샹은 솔직했던 거야. 실제로 그의 작품에 의미 따위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복잡하게 만든다며 손사래를 쳤던 사나이지. 하지만 그 평론가들도 이해할만 해. 사람들은 무엇에든 의미를 찾지 못하면 무기력을 느끼거든. 그게 열린 창문이든, 나만의 작품이든. 그 의미를 찾으려는 대상을 '나'라고 한번 가정해 봐. 그 사람은 곧 엄청난 공포와 불안과 우울에 휩싸이게 될 거야. 그게 말이지, 인간이 부조리를 인식하게 되는 순간이라고. 난 그렇게 생각해. 갑자기 삶에 대해서 그럴듯한 의미를 찾게 되는 순간이 있지 않나? 난 왜 사는가. 근데 말이지, 죽음을 어찌 정당화 시킬 수는 있어도 사는 것을 정당화 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어느 책에서 그러더군. 그런 고민이 시작되는 순간 그 사람은 매우 괴로울지도 모르지. 하물며 책에서까지- 작가도 경험 많은 자였을 텐데 이따위 답이나 내놓았으니 답답함은 날로 증폭되어서 그의 껍질을 으스러뜨리고 밖으로 비어져 나오려 하는듯한 느낌이 들지도 몰라."

 말을 너무 많이 쏟아놓은 나는 메스꺼움을 느꼈다. 좀 전부터 상대방에게서 대답이 나오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대화는 오래전에 끝났다. 이제까지 나는 말에 취해서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러니 적당한 말로 빨리 얼버무려야한다. 당황해서 목소리가 더듬더듬 나왔다.

 "음, 내 생각엔, 어쩔 수 없는 것 같아. 나도 그런 과정을 심하게 겪은 적이 있어서. 우울한 대로 흘러가는 게 가장 편한 것 같아. 동질의 법칙이란 게 있다더군......."

 나는 더 이상 말을 하는 건 무리인 것 같아서 허허 하고 웃었다. 이제까지의 발명으로는 제일 나은 방법이다. 근데 저 민정이의 머릿속에는 과연 나의 어떤 말이 가장 인상 깊게 담겨있을까? 아니, 저 친구가 나의 말을 조금은 듣기라도 했을까? 이따금씩 저 친구의 무표정한 눈은 알 수 없어서 부아가 치밀어 오를 때도 많다. 그런데도 나와 교제하는걸 보면 나의 어떤 면이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 아닐까. 그녀는 꼭 잊어 버릴만하면 나를 사디스트(가학적인 사람을 뜻함)라고 불러준다. 그러면 나는 그녀에게 너는 매저키즘이라고 부른다. 그녀는 나를 미워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나를 따르는 건 그녀가 실제로 매저키즘이 있어서였나?

식신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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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식신녀
  • 2012-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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