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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를 읽고

  • 작성자 c
  • 작성일 2013-09-08
  • 조회수 640

  ……모르겠다. 그녀는 많이 먹으면 토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젯밤에는 계속 치킨이 먹고 싶다고 말했다. 주문하면 되잖아요? 내가 말하자 이곳은 군사지역이라 24시로 운영하는 치킨집이 없다고 했다. 나는 그녀의 아버지가 군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가끔 스무 살인 딸에게 주먹을 쓰는 인간이라는 것도. “대한민국의 군인이란 것들이 다 그렇지.” 몇 달 전, 다짜고짜 아버지에게 맞았다며 내게 휴대폰 메신저로 메시지를 보내곤 한 말이었다. 당황한 나는 좀처럼 위로가 될 만한 말을 해주지 못했다. 그러자 그녀는 “오히려 네 기분까지 상하게 한 것 같아. 미안해”라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그렇다고 네가 나를 안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치?”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그때 내 곁에 네가 있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학 면접을 준비하던 중 내가 가장 어려워했던 질문은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는 물음이었다. 생각나는 이름들은 많았는데 그 이유를 대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같이 문창과를 준비하는 친구에게 인터뷰 자료를 보거나 소설집 뒤의 해설을 읽어보라는 조언을 받고 나는 김연수의 소설집을 뒤적이는 중이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라는 제목의 소설집이었다. 해설을 적은 평론가의 이름은 신형철이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이다 싶었는데 아무래도 백일장에서 심사위원과 참가자 자격으로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악연이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찬찬히 그의 해설을 읽기 시작했다. 대체로 공감하면서 읽어나가던 중, 나는 얼마 안 있어 이런 대목을 만났다.

“왜 김연수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대답이 길어지는 게 번거로워 그의 문장이 내 취향에 맞는다고 말하거나, 이 작가가 슬픔에 가까운 감정일수록 돌려 말할 줄 아는 게 좋아서라거나, 그가 세태 관찰과 문화 체험에 의존하기보다는 인문사회과학 공부에 열심인 것이 미더워서라거나, 어떤 크고 차가운 주제도 ‘사랑’이라는 좁고 따뜻한 층위에서 이야기할 줄 아는 섬세한 겸손함이 마음에 들어서라거나 하는 식으로 그때그때 대답해왔는데, 이 글을 썼으니, 이제는 이렇게 대답하면 될 것이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야기란 무엇인가’에 대해 최소한 세 번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먼저 ‘세계’라는 이야기에 대해, 그리고 ‘나’라는 이야기에 대해, 결국에는 ‘우리’라는 이야기에 대해.”

그것은 친절하게도 ‘왜 좋아하느냐’는 물음에 대한 모범답안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글을 읽고 오히려 혼란스러워졌다. 김연수를 왜 좋아하느냐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세계’와 ‘나’와 ‘우리’에 대해 고민해야만 할 것 같은 의무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자습시간이었는데, 나는 문제집에다가 세계와 나와 우리라는 글자를 각각 적고 그것을 두르고 있는 원을 그렸다. 원들은 ‘색의 삼원색’ 그림처럼 교차되어 있었다. 나는 그림의 가운데, 세 개의 원이 모두 교차하는 곳을 새까맣게 채워 넣었다. 그가 말한 ‘이야기는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결코 그러한 모양새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것을 진지하게 그렸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해란 건 언제나 그 새까만 부분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해가 저물어가는 동안 깃털처럼 길게 뻗쳐있는 구름들이 붉게 타오르다 새파랗게 식어갔다. 그것을 바라보며 나는 세계를 생각했다. 곧이어 하늘은 온통 까맣게 질려갔고 나는 조각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크고 부스러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외로운 구름 한 점을 발견했다. 손톱만 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크기의 그 구름은, 홀로 온통 핑크빛이었다. 어떻게 저런 색으로 빛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 후 나는 세상에 대해 더 이상 고민하지 못했다.

내가 그쪽으로 갈까요? 내가 물었을 때, 그녀는 바쁘다고 답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래요? 라고 멍청하게 대답했다. “9월 모의평가도 있고, 바쁘잖니.” 그녀가 말했다. 저는 모의고사 안 봐요. 수능도 안 볼 거예요. 내가 말하자 그녀는 왜, 라고 물었다. 그저 보기 싫다는 이유였지만 재수를 하고 있는 그녀에게 솔직히 말할 수는 없었다. 둘러댈 말도 없어 대충 얼버무리려했는데 그녀가 내 말을 끊고 말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만큼은 해야지” 나는 또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응, 이라고, 짧게 대답한 후, 나는 내가 침묵하고 있는 동안 그녀가 너무 많은 생각을 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왜 헤어졌어요, 라고 묻지 못했다. 그녀가 그 물음을 바라지 않는다는 걸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밤을 지새운 후 아침에 잠을 자서 저녁 무렵 일어났다. 그리고 또 밤을 지새웠다. 밥을 잘 먹지 못했고 많이 먹으면 토했다. 나도, 한때 그랬다. 그런데 왜 나는 그녀에 고통에 아무런 조언도 위로도 해주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해설서를 다 읽고 본 작가의 말에서 나는 보았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나는 그녀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그녀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린 답을 찾아나가는가? 그렇지만 그렇지 않다. 위로는 ‘답’에서 오는 게 아니다. 답을 찾아가는 서로의 노력에서 천천히 상처 위로 스며드는 것이다. 답이란 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늘 그 과정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너는 답이 아니다. 답의 근처일 뿐이다.

사람은 보편적으로 그런 걸까. 자신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낼 때에는 잔인함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걸까? 왜 헤어졌는지는 사실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헤어질 때 그가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무슨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는지, 마지막 인사는 무엇이었는지. 그것이 너무 궁금했다.

내가 한창 이별로 인해 고통 받고 있을 때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이 또한 언젠가 추억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그러자 그녀가 곧바로 답했다.

“아니, 사람을 떠나보낸 기억은 언제 떠올려도 아픈 거야.”

언제가 헤어진다면, 참 소중한 사람이었다고 기억하고 싶었다. 너의 커다란 눈, 뭉툭한 코, 조그마한 입술, 끝이 가는 손가락. 언제나 그런 것들이 떠오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왜 나는 수많은 너의 말들만이 떠오르는 걸까. 그리고 왜 이러한 의문이 떠오르는 걸까. 떠올라야만 하는 걸까 ‘대체 왜 너는 그런 말들을 한 걸까? 왜 그런 식으로 나를 떠난 걸까?’ 이해하고 싶었다. 너무 불가해한 것들은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을 준다던 내 말은 거짓말이다. 나야 거짓말이 될 줄 몰랐다. 이해하지 않으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나의 고통은 이해하지 않음으로써 찾아왔고, 또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동안에 폭발했다. 나는 아직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백지와 펜이 있는 모든 곳에 적는다. 모르겠다고, 모르겠다고.

새벽까지 게임을 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핸드폰을 켜보았다. 그녀에게 메시지가 와있었다. 자기소개서를 쓰기 위해서 합격본을 보내달라고 부탁한 바였다. “아, 자소서. 깜빡했다.”라고 쓰인 그녀의 메시지는 두 시에 도착한 것이었다. 시계를 보니 세 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자요? 괜찮아요. 내일 보내주세요. 잘 자요.” 나는 메시지를 보내고 핸드폰을 닫았다. 그러나 곧바로 알림창이 떴다. 그녀의 답장이었다.

“아니, 안 자. 근데 동생은 괜찮아?”  “뭐가요?”  “괜찮냐고.”  나는 이내 깨닫고 답했다.

“똑같아요. 똑같이 외롭고 아파요. 정도의 차이일 뿐이에요.”  “그렇구나. 잘 자.”  잘 자요, 나는 답하고 핸드폰을 닫았다. 그리고 안경을 벗어 머리맡에 두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눈을 떠 손가락 사이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천장에 그 사람의 이름을 쓰겠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천장을 바라보며 밤을 지새웠던 지난 시간들이 하나의 기다란 필름으로 이어져 머릿속을 지나갔다. 우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이불을 깨물던 기억, 베개에 얼굴을 묻고 더 이상 숨을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참던 기억. 나는 무언가 가슴을 둔탁하게 치고 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 돌아누운 다음 웅크렸다. 그리고 다시 핸드폰을 켜서 메시지를 적었다.

“김연수라는 작가가 말했어요.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라고.”

잠시 후 그녀에게서 답장이 왔다.

“왜?”  왜? 나는 생각했다. 정말, 왜지?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도 손은 제 멋대로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우리는 서로를 절대 이해할 수 없고, 이해시킬 수 없으니까요.”

“왜……이해시킬 수 없지……?”

“……사실 나도 모르니까. 왜 아픈지 나도 모르니까. 누나도……사실 모르잖아요. 왜 헤어졌는지, 왜 그렇게 헤어졌는지, 왜 아픈지. 모르잖아요. 저도 누나랑 똑같이 아팠어요. 잠도 자지 못하고, 밥도 먹지 못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난 누나에게 위로 한 마디도 할 수 없어요.”

그리고 한동안 답장이 오지 않았다. 나는 혹시 내 글 때문에 기분이 나빠진 것이냐 물었지만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 미안해요, 나는 말하고 휴대폰을 껐다. 나는 웅크린 채로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답장이 와 있었다. 메시지는 네 시에 온 것이었다.

“아니, 지금 전화하고 있어. 마지막 전화야. 원래 싸이클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부탁하려고.”

나는 너의 전화번호를 떠올리며 답장했다.

“마지막이란 단어는 신도 못 쓰는 거래요. ……어떻게 됐어요? 사실, 어제 한 말, 뒤에 붙어있는 말이 있어요.”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있다.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런 이유로, 오늘 나는 하루 종일 너의 생각을 했다. 너에게 전화하고 싶었던 순간이 많았다. 막차를 놓쳤을 때, 지하철에서 노선도를 바라보다 네가 사는 역을 보게 되었을 때, 핸드폰을 바다에 빠트렸을 때, 그 외에 여러 이유로, 막막해지고 외로워져서, 문득문득.

막막해져 펜을 든다. 그리고 백지 한 귀퉁이에 적는다. 모르겠다.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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