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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는 우주비행사였을까

  • 작성자 슈뢰딩거
  • 작성일 2014-05-25
  • 조회수 705

 Life is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
 이 한 줄의 문장을 접한 것은 학교의 영어 수업 시간이었다. 교재를 읽으시던 선생님은 이 구절이 셰익스피어의 멕베스Mcbeth에 나오는 대사라고 말씀하셨다. 파멸을 앞둔 맥베스가 남기는 말이었다.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는 한 셰익스피어는 결코 우주에 나가 본 적이 없었는데도, 그가 쓴 구절은 인류 최초의 우주 비행사가 처음으로 지구 밖을 벗어나 던진 한 마디와 너무나도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누구나 우주를 꿈꾼 적이 있을 테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과학자가 꿈이었던 나는 두 말할 것도 없었다. 유치원 때의 그림일기를 들춰보면 온통 까만 크레파스로 칠해져 있다. 검은 하늘 가운데 오롯이 나 하나. 내 우주에는 별도 없었다. 우주와 우주복을 입은 나 뿐이었다.
 십 년이 지난 지금은 왜 우주를 동경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이를 한 두 살씩 더 먹으면서도 우주를 사랑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생활기록부에도 과학자, 천문학자 이렇게 적혀져 있고 말이다. 중학교 때 가입한 동아리도 과학 동아리였다.

 내가 유리 가가린Uri Gagarin에 대해 알게 된 것도 과학 동아리에서였다. 어느 목요일, 과학 선생님께선 60년대 미국과 소련의 우주 개발 프로젝트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틀어 주셨다. 중학생에게도 그다지 어렵지 않은 내용이었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컴퓨터에 매달려 낑낑대는 모습, 잠수복 같은 구닥다리 우주복을 입고 허우적대는 사람들. 스푸트니크 1호와 우주로 나간 개 라이카. 그러나 무엇보다도 흥미진진했던 건 인류 최초의 우주 비행사의 이야기였다. 다큐멘터리는 60억 인류를 대표해 처음으로 지구를 벗어나 자유를 만끽했던 사람으로 소개했다. 화면 속에서 그를 태운 우주선은 허공으로 쏘아올려졌고, 그는 이내 지구 궤도에 안착했다. 화면이 검게 물들더니 창백한 점이 하나 번쩍였다.

 There is no god up here.
 그게 유리 가가린이, 인류가 우주에 나가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검은 화면에 번쩍이는 한 줄의 문장에 나는 전율했다. 거기에는 따스한 경멸과 잔잔한 연민이 있었다. 웃고 울고 싸우고 사랑하는 수십억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가가린은 그 허무함과 유한성을 안타까워한 것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유리 가가린과 셰익스피어에서 나는 유리병을 떠올렸다. 유리병 안의 폭풍도 밖에서 보면 그저 작은 거품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금세 터져 사라져버릴 거품이다. 그렇다고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유리병 안 물방울들 하나하나에게는 그들을 순식간에 휩쓸어 버리는 거대한 힘으로 다가올 테니까.

 그러나 바깥에서 보아야 알 수 있는 게 있다. 달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듯, 병 밖에서 속을 들여다보듯 한두 발짝 멀리 떨어져야 볼 수 있는 게 있다. 내 당장의 고통이 삶 전체를 두고, 지구 전체를 두고 보면 한갓 거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셰익스피어가 말한 대로 백치가 떠들어대는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것. 그래서 오히려 순간의 고통에 인생을 걸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는 게 그것이다.

 내가 유리 가가린의 다큐멘터리를 본 지도 삼 년이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반이 된 지금, 올해 들어 내겐 너무 많은 일들이 몰아닥치고 있다. 가끔 내게 짐 지워진 삶의 무게에 질식할 것 같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우주로 가 보고 싶다. 멀리서 삶의 모습을 지켜보고, 나를 비롯한 모두의 고통과 기쁨에 다소간 연민을 느끼고 싶다. 그리고 나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이 모든 일상의 고민과 고통이 조금쯤은 새로워보이지 않을까.

슈뢰딩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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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슈뢰딩거
  • 2014-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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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슈뢰딩거
  • 2014-05-06
품 안의 몸

품 안의 몸   요 며칠 전, 병원도 갈 겸 해서 오랜만에 집에 들렀다. 병원을 다녀온 나는 그대로 안방에 들어가 누워 버렸다. 내 방이 있는 2층으로 가기도 힘들 만큼 지친 것이었다. 교복도 벗지 않고 불도 끄지 않은 채, 이불만 겨우 덮어쓰고는 잠들어 버렸다. 얼마쯤 지났을까, 비몽사몽 간에 저만치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야, 큰오빠 왔나." "오빠 안방에서 잔다. 깨우지 마라." "안 깨울긴디....... 나도 오빠 옆에서 잘 끼다.“   저 기지배가! 하는 어머니의 고함이 멀어지고, 곧이어 뭔가 따뜻한 게 이불을 들치고 들어왔다. 오빠, 오빠 하면서 꼼틀대는 건 막내였다. 올해로 초등학생이 된 막내. 나는 이불 자락을 끌어다 덮어 주고는 다시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옆에서 자꾸 누군가 오빠야, 자나 하고 묻고 있었다.   내가 깨어난 건 세 시간이나 지나서였다. 어머니의 말씀을 빌리자면 '낮잠 한 번 징허게도 잤다'. 늦은 저녁을 받아먹고 나서 다시 향한 안방의 침대엔 막내가 두 팔을 벌리고 누워 있었다. 쬐끄마한 게 뭐가 피곤한지 벌써 코골이가 제법이었다. 나는 불을 끄고 문을 닫아주면서 7년 전의 겨울을 떠올렸다.       막내를 처음 마주한 건 그애가 태어나고도 이 주일이나 지나서였다. 막내는 어머니 품이 아닌 인큐베이터에 누워 있었고, 젖병이 아닌 호스를 물고 있었다.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했던 나는 우리가 신생아실이 아닌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거기에는 으레 신생아실에서 들릴 만한 힘찬 울음이라던가 칭얼거림 같은 것은 없었고, 온 사방에 가득한 소독약 냄새와 바쁘게 오가는 간호사 누나들의 발소리, 기계가 힘겹게 삑삑거리는 소리뿐이었다.   나는, 그리고 내 뒤에 서 있던 둘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어떤 일이 일어날 건지 어떤 짐작도 하고 싶지 않았다. 유리관 너머 동생을 들여다보는 우리 둘 사이에 진득한 침묵이 있었다. 저편에 서 계신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허락된 면회 시간인 오 분 내내 정적만 곱씹다가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둘을 의자에 앉혀 놓고 음료수를 하나씩 뽑아 주신 아버지는 끊으셨던 담배를 피우러 나가셨다.     그 날 오후,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다. 태어나서 십몇 년, 처음으로 보는 당신의 무너진 모습에 둘째와 나는 뒷좌석에 얼어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아버지께선 그애의 장례식을 준비하라는 낭보까지 들으셨던 모양이었다. 아직 누워 계신 어머니,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 두 형제를 세워 놓고 아버지는 가족 몫의 슬픔까지 다 짊어지고 계시던 것이었다. 나는 지금에 와서도 그때 당신께서 걸머져야 했던 슬픔의 무게를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다.       온갖 고비를 넘겨내고 두 달이 지나서야 겨우 집에 온 나의 기묘한 동거인. 수세

  • 슈뢰딩거
  • 201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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