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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 : 다 쓰고 난 나머지

  • 작성자 모해
  • 작성일 2014-11-26
  • 조회수 200

- 한 순간에 전쟁터가 비어 버렸다.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불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던 교실의 불은 한꺼번에 꺼져버린다.
11월 13일, 대수능날 - 짧고, 아쉽고, 허무하게 끝나버린 그 날 이후에
전사들은 결국 잉여로 전락한 것일까.

갑자기 주어진 자유는 생각보다 즐겁지 않았다.
4교시 탐구 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리고 나에게 남은 것은 성적도 아닌, 수험표와 컴퓨터 사인펜, 그리고 샤프가 전부였다.
이제 평생에 몇 번 쓸까 말까하는 그 물건들이 나에게는 그저 전리품처럼 여겨졌는지도 모른다.

몇 일 전, 아니 불과 몇 시간전만해도 긴 시간 책을 들여다보는 것이 힘들었지만
자유가 주어진 지금, 텅 빈 교실을 묵묵히 지켜보는 것은 더욱 힘들다.

- 요즘은 말 그대로 시간이 남아돈다. 어른들이 이 말을 듣는다면 배부른 소리한다며 다그칠테지만, 사실 그렇다.

9시까지 등교, 교실에 앉아있는지만을 점검하기 위한 출석검사 그리고 자유를 이름으로 한 방목이 이어진다. 점심시간까지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친구들은 각자 나름의 방식을 고수한다. 영화를 보거나, 잠을 자거나, 카드놀이를 하거나. 그 방식은 다양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흥미가 있어서 한다기보다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단지 그뿐인 경우가 많아진다는 것이다.

드디어, 기다리던 하교 시간. 친구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집으로 향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경우이다.
조금 더 고생하는 쪽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집이 멀기 때문에 기숙사를 살았던 나는 차비 절약을 위해 남는 쪽을 택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수능 후의 완전한 휴식을 위해 퇴사를 택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이 하교한 후에도 밤 10시까지 어딘가에서 시간을 보내야한다는 말이다.

현재 시간은 8시, 수능 후에도 학교에 남아 또는 밖에서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며 기숙사에서 사는 생활이 벌써 일주일째다. 초반에는 수능이 끝나고 자유가 찾아온 것만으로도 좋았지만, 그 기분은 몇 일을 채 가지 못했다. 기숙사에 남은 친구와 오늘 강가를 걸으며 한 말이 있다.

- 시간이 금이라는데, 시간을 이렇게 보낼거라면 차라리 돈을 받고 팔 수만 있다면 팔고 싶다.

기숙사에 남은 이유에는 아르바이트를 해보겠다는 목표도 있었지만, 그 목표는 역시나 쉽지 않았다. 이미 수능 전에 일찌감치 돈벌이에 나선 친구들 틈에 낄 자리가 있을리 없었다.

- 그렇게 나는 친구들이 모두 떠나버린 교실에 홀로 남았다.

텅 빈 교실은 외롭다. 뿐만 아니라 의욕을 잃어버리게 한다. 좁고 답답하게만 느껴지던 교실은 혼자 있을 때, 한없이 넓고 조용하기만 하다. 좁은 교실에서 경쟁을 강요받았던 시간들이 나쁜 습관이 되어, 경쟁자가 없으니 더 나아갈 용기도, 욕심도 없어지는 기분인 것이다. 사실 수능 전만해도 틈틈이 꿈꾸던 글쓰기도 하지 못했다. 당초부터 글쓰는 것에는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지켜왔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마저 힘들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학 입학 전까지 이런 생활이 반복되어 이 시간들이 그저 멍하고, 허무한 시간들로 기억될까 무섭다. 이 날을 위해 달려온 12년을 생각하면 이것은 좋지 않은 마무리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앞으로의 몇 달의 시간들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정확한 계획은 없다. 도와주는 사람도, 그렇다고 마음껏 놀러다닐 돈도 나에게는 없는 것이다.

앞으로는 아마 계속 이런 식일 것이다. 한 없이 따뜻하고 재미있을 것만 같던 세상은 차갑고, 나의 존재를 알아주지 않는 그런 냉혹한 사회로 다시 느껴질 것이다. 그동안은 이끌어주고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계셨지만 이제부터는 나 자신만이 믿을 수 있고 더 나은 삶을 만들어갈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인 것이다.

수능이 끝나고, 다 써버린 잉여로 남겨진 것인지, 아니면 잠시 축구 경기장 구석에서 교체되기를 기다리는 선수일지는 아마 앞으로의 나의 행보에 달린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마도 글을 쓰는 것이 가장 필요하기도 하고, 나에게 도움이 많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앞으로 졸업하기 전까지 글을 많이 올리게 될 것 같다.

- 이 말이 꼭 현실이 되기를, 그리고 고3의 끝자락을 보내며 고민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잉여보다는 교체되기 전 마음을 다지는 축구선수가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기며 이만 마친다.

모해
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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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요새 모해님은 뭐하고 지내나요? 헛헛한 마음이 좀 채워졌나요?

    • 2014-12-22 22:57:38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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