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성 글쟁이
- 작성자 김 윤
- 작성일 2017-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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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천성 글쟁이
내 문체는 고요하다 정의내리기에 알맞다. 담담하게, 또는 고요하게. 나는 평정심을 잃지 않고 아무런 감정을 가지지 않는 듯한 느낌으로 철저하게 방관자의 입장에서 희로애락 가득한 주인공의 삶을 써내려간다. 내 조용한 글 아래 주인공은 기뻐하고, 노여워하며, 슬퍼하면서 또한 즐거워한다. 오랫동안 내 글을 보아온 한 친지는 내 문체를 이렇게 평했다. 가랑비가 젖듯 수수하게, 낌새를 못 알아채게 조용하게 접근하여, 어느덧 정신차려보면 흠뻑 주인공의 감정에 젖어있도록 한다. 아무래도 친분이 있는 사람이다 보니 사실보다 높이 평가한 요소가 없잖아 있겠지만, 내 문체가 남들처럼 한꺼번에 독자를 집어삼키는 종류는 아닌 것은 틀림없다.
지금이야 지인들은 글을 보고 딱 내 글임을 알아보지만, 과거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할 때 내 문체는 전혀 이렇지 않았다. 발랄하고, 들떠있으며, 엉망으로 점칠되었지만 즐거움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주인공은 세상의 모든 순수함을 간직한 듯 멍청하지만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줄 알았으며, 그 생각을 모조리 묘사한 1인칭 시점 속에서 주인공은 행복한 삶을 살아갔다. 읽는 거라곤 인터넷 소설밖에 없던 초등학생이 썼다보니 시작은 문단 하나 제대로 없는 클리셰 가득한 글이었지만 읽으면서 우울해지진 않을 소설이었다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러던 내 문체가 언제 이렇게 되었을까. 더 이상 1인칭이 아닌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객관적으로 써내려가는 지금의 글들은 대체로 우울한 주제가 한가득이다. 지금의 내 문체를 딱히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밝고 명랑한 소설을 쓰는데 한계를 느끼는 지금, 과거 썼던 소설들을 뒤적여보았을 때 궁금증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소설을 처음 쓰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5학년, 열두 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 때의 나는 정신적으로는 성장할 만큼 성장했다고 느꼈고,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줄 아는 꼬맹이였다. 우연히 소설 쓰는 또래의 모습을 잡지에서 보고, 좋아하는 결말을 직접 보기 위해서 직접 창작에 나선 작은 꼬맹이.
처음에는 당연하게도 내가 이리 소설 쓰기에 빠지게 될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그저 재미를 위해서, 내가 좋아하는 장면과 결말을 보고 싶어서 펜을 집어 들었던 나는, 이유도 모르고 급속도로 소설쓰기에 빠져들어 급기야는 모든 생활을 소설 쓰는 데에 영위했다. 학교 수업을 듣는 중에도 교과서 아래 수첩을 숨겨 끼적였고, 선생님한테 들키고, 혼나고, 반 아이들 앞에서 선생님 목소리로 소설을 읽히는 수모를 당했음에도 수업시간에 몰래 소설 쓰는 것을 멈추지 않을 정도로 나는 소설 쓰기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때의 나는 내가 소설 쓰는 것을 세상 무엇보다 좋아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1년동안 노트 8권이 넘도록 빽빽하게 쓰면서도, 왠지 모르게 내가 그렇게 좋아한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고 소설로 먹고 살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누가 소설 쓰는 것을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는 당당하게 그렇다 대답하면서도 그럼 작가가 되겠냐는 물음에는 망설였다. 음, 소설 쓰는 거? 좋아, 좋긴 한데…, 직업으로 삼기에는 조금 그렇지 않나? 그렇게 좋아하는 것 같지는…. 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던 내가 정말로 내 삶을 바칠 정도로 좋아하는 걸 깨달은 것은 중학교 3학년, 어느 한 캠프에 갔을 때였다. 우연히 갑작스럽게 하루 전날에 가는 것이 결정 나, 일주일동안 수첩도, 핸드폰도, 소설을 쓸 수 있는 매체라곤 아무것도 없이 덜렁 캠프에 보내진 나는 일주일동안 소설을 쓰지 못했다. 그렇게 오래토록 소설 쓰는 것과 멀어진 것은 열두 살 이래로 처음이었다. 처음 소설 쓰기 시작한 이래로 나는 하루에 한 번은 꼭 노트를 꺼내들어 썼었는데, 쓸 책상은커녕 노트하나 없었던 나는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무언가 공허한 느낌이 계속해서 들었다. 재미있는 게임을 진행하면서도 뭔가 이것보다 내게 재미있는 게 있었던 것 같은데, 라는 느낌이 계속 들고, 잠자기 전 친구들과 수다 떨다가도 이상하다, 내가 자기 전에 하던 건 이게 아니었는데, 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다. 결국 그 이유모를 공허함을 계속 느끼던 나는, 캠프 마지막 날 소등이 모두 끝난 새벽에 화장실 불빛에 의존해서 화장지에 줄줄 울면서 소설을 썼었다. 왜 울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갑작스런 요기에 잠에서 깬 친구가 화장실에 왔다가 귀신인 줄 알고 놀랄 때까지, 나는 그렇게 몇 시간동안 아무생각 없이 계속 썼었던 것 같다.
물론 지금은 하루 소설 안 썼다고 세상 무너진 듯 우울하진 않다.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쉴 새없이 들이닥치는 일상 때문에 지금은 한 달을 안 써도 끄떡없을 정도다. 더 이상 소설 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나는 누군가가 제일 행복한 시간을 떠올리라 할 때 ‘아무 걱정 없이 옆에 코코아나 하나 들고 소설을 쓰고 있을 때’의 나를 당연스럽게 떠올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나는 분명하게 소설을 쓰는 데 여유를 두고 있으며, 자유 시간에 가장 하고 싶은 걸 꼽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다른 것이다. 무언가 모순되는 말인 것을 잘 알고, 지금은 단순히 쓰고 싶은 소재가 없는 까닭일수도 있지만, 아무튼 현재 상황은 그렇다.
중학교 3학년,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미친 듯이 소설 썼을 때는 내가 조금만 더 여유를 가지고, 마음을 편안히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의 나는 오히려 앞뒤 안 가리고 그것만 보고 갔던 그 때가 그립다. 좋아하는 것에 미친 듯이 빠져들어, 소재가 없다는 것 따위가 이유가 될 수 없던 그 때. 아직 확신할 순 없지만 슬럼프에 빠진 듯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과,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 창의적인 소재들. 그 때는 무엇이 고파 그렇게 써내려갔던 걸까.
글쟁이 슬럼프는 안 써져도 계속 글을 써야만 극복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 갇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글쓰기와 너무 멀어진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억지로나마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은 숙제 뿐, 자의적으로 나서 글을 써본 것이 언젠지 사실 가늠이 가지 않는다. 너무 힘들 때는 그저 모든 것을 놓고 휴식이 필요하다는 말을 위안으로 삼고 계속 멈추고 있는데, 이러다간 손가락이 완전히 굳어 내 지난 6년간의 세월이 모두 헛되이 될까 두렵다. 내가 원하는 글을 쓰는데 망설임이 생겨버린 나는 오늘도 가장 최근에 쓰던 노트를 펴고, 가장 편한 펜을 들고 가장 많이 듣던 노래를 튼다. 쓰자, 손가락을 피자. 글을 쓰자꾸나. 넌 어디까지나 글쟁이일 수밖에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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