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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0분

  • 작성자 NK
  • 작성일 2018-04-27
  • 조회수 225

"아빠 안녕, 오늘은 아빠가 왔네."

"어 왔니. 야자 잘 했어?"

"야자가 야자지 뭐."

"그래. 집 가자."

 

매일 야자를 마친 뒤 무거운 몸뚱이를 차에 싣고 집으로 향하는 30분간의 길에는 가로등이 많다.

아빠가 데리러 온 날에는 항상 그렇듯 오늘 역시

무거운 몸과 무거운 눈꺼풀보다도 몇 배 더 무거운 침묵과 의미 없는 대화를 미리 떨치기 위해

그저 지나가는 가로등과 가로등과 가로등을 응시하며 라디오를 듣고 싶었다.

 

불행히도 음질 나쁜 라디오의 처량한 지직거림을 나도 아빠도 견딜 수 없어 잠시 후 꺼 버렸다.

연신 하품을 하며 '나는 지금 매우 졸리고 지치고 피곤하다.'를 티내려 했다.

서둘러 잠을 청하려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아버렸다.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는 나의 부친이 끝끝내 또다시 의무적이고 형식적인, 성의 없는 질문들을 건낼 것이 두려워서였다.

 

"오늘 점심 메뉴는 뭐였니?"

"제육볶음."

"...어어."

"......"

"뭐였다고?"

"제육볶음이었다고."

"아...어, 그래."

 

오늘도 또 하나의 모노로그가 진행되었다.

역시 부친은 애초에 관심이 없는 것에 대한 질문을 던져만 놓고 제대로 듣지조차 않았다.

제, 육, 볶, 음, 이라는 네 음절조차 알아듣지 못했다. 아니, 그저 정말 듣지를 않았다.

철저히 예상대로였기에 실망하지 않았다, 실망하지 않았다.

 

"내일도 아빠가 데리러 올 거야."

"왜? 내일 엄마 못 와?"

"어, 엄마 내일 워크샵 간다잖아."

"아. 맞다..."

"쯧, 그럼 오늘 엄마보고 너 데리러 가라고 할 걸 그랬네. 으휴, 피곤해 죽겠어."

"......"

 

말을 뭐 그렇게 하냐, 고 항변하고 싶었다.

당신 혹시 머릿 속 독백과 발화하는 말풍선 속 대사를 바꿔 말한 거 아니냐고,

늦게까지 야자 하는 거 눈치 보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면서, 왜 지금 당신은 굳이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 놓느냐고,

엄마가 너무 피곤해 하는 날, 끽해야 일주일에 한 번 데리러 오는 정도면서 그런 말 할 자격이 되느냐고,

마치 엄마에게 선심이라도 쓰는 것마냥, 본인이 드물게 직접 행차하시는 날마다 그렇게 온갖 힘든 티 다 내야겠느냐고.

 

당신과 똑같은 직장인인 엄마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따끈한 아침 도시락을 싸 내 손에 쥐어 주는 걸 항상 보면서,

고등학교 3학년인 첫째 딸이 수면부족에 시달리며 멀리 떨어진 학교에 고생고생하며 다니는 걸 항상 보면서,

다들 자신의 자리에서 각자 그 무게를 버텨내고 있음을 모를 수 없으면서,

왜 당신은 무언가를 조금이라도 참으려 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대화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래서 남의 말을 듣지 않는, 들으려 하지 않는, 결과적으로는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그래 놓고서 딸의 건방진 말하는 태도에는 또 몹시 심기가 거슬려 구겨진 얼굴로 거친 운전을 할 것이었기에,

그리고 난 '너 아빠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니'로 끝나고 말 뻔한 언쟁을 시작해 결국엔 반항아로 정의되기가 극도로 피곤했기에,

 

허전한 청각을 채워 줄 것이 없는 것을 약간 유감스러워하며,

그저 지나가는 가로등과 가로등과 가로등을 응시하며

입의 존재 이유를 잃은 듯한 무력감을 느끼며

나는 우리의 숨죽인 30분가량 가운데 덩그러니 '나'라는 사람으로 그저 존재하기만 할 뿐이었다.

NK
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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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성현

    안녕하세요 NK님! 첫 만남 반갑습니다. 각자의 바쁜 일상에 시달려 가족 간에 따뜻한 말 한마디조차 건넬 여유가 사라진 가족의 단면을 차 안에서의 풍경으로 담백하게 잘 그려주었네요. 대화가 줄어든 부녀의 모습을 건조한 대화와 지문으로 표현했지만, 그 안에 담긴 아쉬움과 서운함들을 독자들이 공감하고 이해하기에는 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빠에 대해서는 부친과 당신 두 가지 호칭을 더 해 표현했네요. 짧은 글 안에서 호칭을 세 가지로 바꿔 사용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빠에 대한 화자의 심리변화를 강조하려고 했던 건가요, 아니면 진심 없게 느껴지는 아빠의 말과 행동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나요? 어떤 어떤 사람이라는 표현도 더불어 나오네요. 글이 짧다보니 여러 호칭과 표현들이 집중력을 떨어뜨리지 않는지 생각해봐 주세요. 좀 더 시간이 지난 뒤, 여유가 생기고 나서 이 글을 읽을 때면 의무적이고 형식적인 질문에 의무적이고 형식적으로 대답하는 화자의 모습이 NK님의 눈에 들어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2018-05-04 21:11:49
    전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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