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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왜 웃지 않느냐는 물음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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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19-10-02
  • 조회수 862

2000년 10월 12일 부산 성모병원에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당신은 아마도, 아니 분명히 그 사실에 관심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누군가의 삶이 시작되는 일은 사실 당신의 삶과 크게 상관이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싶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사람이 온다는 것은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며, 그 이유는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선물하고자 한다.

당신이 만일 나를 안다면, 내가 그다지 웃는 상이 아님을 알 것이다. 실제로, 나는 세상에 웃을 일이 많다고 믿지 않으며, 그렇게 믿는 이들의 믿음에 대해 웃어주는 편이다. 어제는 교수님께서 식당에서 밥을 먹는 나에게 좀 웃으면서 살라는 친절한 조언을 해 주셨다. 나는 진심 어린 미소를 연출해 보이며 제자된 도리를 다했지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하는 그 순간에도 그렇게 해야겠다는 의지가 조금도 없었다는 사실은 알아채지 못하셨을 것이다. 나는 꽤 숙련된 연기자이며, 내 생활에 피해가 미치지 않는 선에서 다른 이들에게 기꺼이 친절과 배려를 표시할 용의가 있지만 사실 대부분은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당신은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나를 안다면.

그러나 당신이 만일 시계침을 뒤로 감아서 2014년 이전, 그러니까 내가 15살이 되기 이전의 내 모습을 보게 된다면 지금의 음울한 대학생과 동일인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환한 미소를 만면에 띠고 친구들과 뛰어다니는 땀투성이 소년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도대체 이 소년에게 이후 몇 년 동안 무슨 비극이 있었는지 궁금하게 될 텐데,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얘기가 바로 그것과 관련되어 있다. 나는 왜 웃지 않는가. 누가 나의 웃음을 강탈했는가.

나는 목사인 아버지와 간호사 어머니 사이에서 1남 1녀의 둘째로 태어났다. 태어나보니 기분이 별로 나쁘지 않았다. 비록 집은 가난했고, 가끔 천장에서 물이 새거나 쥐가 뛰어다니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고, 중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내 방이 없어서 부모님과 자야 했고, 가끔 교회를 빼먹고 놀러 다니다 걸려서 혼쭐이 나기도 하고, 학교에서는 별 해괴한 책들만 찾아 읽으면서 친구 뒤통수를 때리고 도망치는 데 일가견이 있었고, 그러다 걸려서 선생님께 얼차려를 곧잘 받곤 했지만, 나는 비교적 착실하게 살았고 학급에서 반장과 (사실 하등의 가치도 없는) 모범상을 놓쳐본 적 없는 '반골 우등생'이었다. 적당히 시키는 것 하고 안 볼 때 농땡이 치는 나름의 요령을 습득하고 나자 공부도, 인간관계도 그다지 어려울 것이 없었다. 지루한 수학이나 딱딱한 과학은 싫었지만 국어나 사회는 흥미가 있었기에, 나는 어린 시절부터 의미도 제대로 모르는 사회과학 서적들을 들추어보곤 했고 윤동주, 백석, 이상 같은 시인의 꿈을 꾸며 노트에 습작을 끄적거리기도 했다.

아버지가 목사이셨으므로 나는 자연스럽게 모태교인이 되었다. 원죄,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속죄, 구원 같은 단어들은 낯설고 어려웠지만 하도 듣다보니 줄줄 읊을 정도로 신실한 교인 흉내 정도는 낼 수 있었다. 교회에 가면 아버지께선 잘 다린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세상에 가득한 죄악과 인간의 타락, 그 대속 제물로 십자가에서 죄 없이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호소하곤 하셨다. 어린 나는 아직 세상과 인간을 몰랐기에 선과 악의 대쟁투라거나 인간 내면의 원죄,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성 같은 것이 무엇인지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기독교적 세계관은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지나며 나의 의식 기저에 깊이 뿌리를 내렸고 나는 중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아마도 세상이란 곳에는 내가 모르는 잘못된 일들이 많이 있나보다 하는 미세한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내가 상관할 문제는 아니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랬다.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자 그 재미있던 친구와의 시답잖은 장난도 시들해지고, 뭔가 가슴 한켠이 텅 비어버린 듯한 공허함이 찾아들었다. 바야흐로 내 인생에도 질풍노도의 사춘기가 찾아온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원래 틈틈이 읽는 정도였던 책을 닥치는 대로 읽고 소화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왜 사는가? 인간은 왜 죽는가?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신은 있는가? 신이 있다면 신은 선한가? 신이 있고 신이 선하다면 왜 세상에는 악이 많은가? 문학, 철학, 과학, 사회학과 인류학,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읽고 또 읽는 나날이었다. 저 질문들에 비하면 학교 수업은 너무 시시해 보였다. 그 당시에 주로 읽은 책의 저자들은 칸트, 니체, 사르트르, 하이데거, 마르크스, 베버, 홉스, 로크 ,루소, 사마천, 공자, 장자, 순자, 한비자, 니버, 롤스 노직, 보드리야르, 레비스트로스, 칼 바르트, 본회퍼, 불트만, 한나 아렌트, 라이너 마리아 릴케, 잘랄웃딘 루미, 파울로 코엘료, 단테, 파스칼, 카프카, 이성복, 김수영, 정호승, 김훈, 김승옥 같은 이들이었다. 물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내용이 태반이었지만 그 당시의 나는 세상이 작동하는 원리와 그 내부의 모순을 규명할 만한 준거를 찾는 데 열중해 있었으므로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반쯤 의무감에 휩싸여 마냥 읽었다. 그러나 아무리 견고한 사상도, 아무리 합리적인 이론도, 아무리 날카로운 비평도 책 속에만 머물러 있을 때는 효력이 없었다. 나는 세상을 보고 싶었다. 내가 익숙하게 보고 그 안에서 살아왔던 안정된 세상의 뒷면에 무엇이 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것을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목도하게 된다.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배가 한 척 가라앉았다. 나는 그 소식을 6교시 과학 수업시간에 선생님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학생들이 수학여행 가려고 탄 배가 어디 부딪쳤는지 가라앉고 있다더라... "그때까지만 해도 나를 포함한 아이들 모두가 배에 탄 학생들이 전원 구조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엔 훌륭한 소방관, 경찰관, 또 정확한 명칭은 잘 모르지만 배가 가라앉을 때 얼른 달려와서 단숨에 사람들을 구해내는 '멋진 아저씨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고, 그들이 한달음에 달려올 것을 생각하면 배는 오히려 너무 천천히 가라앉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잠깐 뉴스를 틀던 선생님은 이윽고 수업을 재개했고, 아이들은 시험에 출제될 만한 내용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었다. 나 역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정확한 시스템이 저 먼 바다에 빠져가는 배를 냉큼 들어올릴 것이라 믿으면서, 그 시스템의 명료성과 시스템을 운영하는 이들의 노고에 박수갈채를 보내면서 교과서에 머리를 박았다. 그리고 배는 학생들과 함께 그대로 침몰했다. 타살이었다.

뭔가, 뭔가가 잘못되고 있었다. 사태가 점점 심상치 않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직감하고 있었다. 뉴스에는 분명히 학생들이 무사히 구출되고 있다고 나오고 있는데, 저 부모들은 왜 저렇게 우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한 순간 뉴스는 자막을 바꿔 달면서 속보를 보도했다. 발견된 사망 확인자들의 명단이 무더기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2014년 4월 16일 오전 9시경, 나와 내 친구들의 신뢰를 비웃듯 국가 시스템은 직무를 유기했다. 아이들은 창문을 손으로 두드리고 발을 동동 구르다가, "당황하지 말고 제자리에서 대기하라"는 명령을 충실히 받들어 제자리에서 익사했다. 내 친구들이었고, 내 형제자매였고, 어쩌면 나 자신이었다.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었다. 당신의 아들, 당신의 딸, 당신의 형과 오빠와 누나와 언니와 동생이, 그리고 바로 당신이 그렇게 숨질 수 있었다는 사실이 나를, 우리를 떨게 했다. 검은색 구조 보트가 삼 분의 이쯤 가라앉은 배 창문에 선미를 대고 그 안에 갖힌 학생들에게 대원들이 접근하는 모습을 기자들이 헬기에서 촬영해 송출했다. 왜 구조되지 못했는가, 라는 질문은 점차 왜 구조하지 못했는가, 로 변해갔고 이윽고 왜 구조하지 않았는가, 라는 외침이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날, 4월 16일 세월호가 삼백여 명의 승객들과 함께 배로서의 직무를 유기한 채 침몰했을 때, 내 조국이 국가로서의 직무를 유기하고 자국민의 생명을 대통령의 7시간과 거래했을 때, 내가 알고 믿었던 평화로운 세상도 박살이 났다. 나는 울었던가. 왜 우는지도 모르면서 눈물을 질질 흘리고, 집 안에 고이 모셔두고 성경마냥 암송하던 대한민국 헌법 조문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던가. 그날 이후로 책벌레 소년은 투사가 되었다.

무슨 일들이 있었나. 나는 그렇게 도살장에 끌려가듯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곧 독서토론 동아리, 시사 토론 동아리, 문예부의 장이 되었고, 별 생각 없이 생기부에 한 줄 더 적으려 입부한 부원들을 다독이고 질책하고 몰아대서 세월호 배지 착용 캠페인과 진상규명 촉구 서명운동에 참여했고, 그러다 지나가던 어르신으로부터 빨갱이 소리도 들었고, 그럼 어떠냐, 빨갱이가 이런 거면 난 빨갱이 하겠다는 마음으로 위안부 합의 반대 피켓을 만들어 시위를 벌였고, 학생이 공부하기도 바쁜데 무슨 데모질이냐는 선생님과 어른들의 타박을 상큼히 씹고 동성로 소녀상 옆에 위안부 합의가 성과주의에 눈먼 현 정부의 만행임을 고발하는 대자보를 붙였다가 하루 만에 철거당하고, 알겠으니 내 글 내놓으라고 구청까지 가서 대들다가 동아리 해체 직전까지 갔고, 그러거나 말거나, 전국에서 새로 만든 역사 교과서(그런 것도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면)를 유일하게 수용한 학교가 마침 인근에 있어서 집회에 몇번 기웃거렸고, '나쁜 물'이 들었다는 평은 엿이나 까 잡수라는 투로 "피기도 전에 얼어 죽은 꽃들아, 이제 먼 데서 동트는 소리 들린다…." 운운하는 유치한 시를 끼워 넣은 문집을 만들었다. 이제 나는 민주주의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 "이 나라는 한번 밑에서부터 뒤집힐 필요가 있다. 시대의 불의함을 타파하는 원동력이 집결된 민중의 분노였음은 이미 역사적으로 증명된 바이며……. 마치 사대강 녹조를 정화할 태풍이 필요한 것처럼 큰 태풍이 한번 불어야 할 것인데 그 중심부에는 새 시대를 주도할 우리 학생 청년들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타성에 젖어 정치적 무관심과 개인주의에 매몰된 무지몽매한 학우들을 계몽시켜 현시대의 관찰자이자 참여자로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2016.4.27) 뭐 그런 교조적 글을 노트에 휘갈기곤 혼자 만족했다. 그 치기 어린, 단순무식한 순수함이 17살의 나를 지탱하는 것이었다.

2016년 10월 24일, JTBC가 최순실의 사무실에서 태블릿을 발견, 단독 보도했다. 이듬해 봄까지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리며 국가 성립의 근간을 흔든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의 발단이었다. 이날 오전 박근혜 대통령이 헌법 개정을 공식 발표했었기에 더욱 임팩트 있는 보도였다. 나라가 삽시간에 들끓기 시작했다. 내 표로 선출한 대통령에게 권한을 위임한 줄 알았던 국민들에게 갑자기 등장한 '대통령의 친구' 최순실의 존재는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어떻게 그 이후의 모든 경과를 소상히 밝히겠는가. 내가 단편적으로 기억하는 것은 광장에 운집한 시민들과 백만 개의 촛불이 되어 타오르기 시작한 민주주의로의 열망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단순한 생각이지만 그 당시 고1이었던 내 눈에 박근혜는 나라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고 무위도식하는 참담한 부정부패의 수괴였고, 그녀를 에워싼 여당은 국민의 피고름을 핥아먹고 사는 벌레만도 못한 이들이었다. 그해 겨울, 유난히 추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회 교과서에서 읽은 민주주의가 거리에 살아서 작동하는 것을 나는 목도했고, 드디어 세월호를 비롯한 지난날의 모든 비극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현실에 안주하며 문제의식을 상실한 것처럼 보이던 앞집, 옆집, 뒷집의 이웃들이 어린 자녀의 손을 잡고 "이 나라가 누구 것이냐" "이게 나라냐"를 외치며 행진하는 모습은 내 인생에서 가장 뜨겁고 감동적인 광경이었다. 마침내, 마침내 이 나라에 민주주의가 긴 겨울잠을 끝내고 용틀임을 하고 있었다. 나는 환호성을 지르면서 기나긴 촛불의 대열에 합류했다. 드디어 시대가 바뀌려 하는 역사적 순간에 입시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시대가 바뀐다!

이듬해 3월 10일. 봄소식이 어렴풋이 들려오던 날, 헌법재판소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했다. 직무를 유기한 권력이 그 권력의 시여자들로부터 직무 해임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를 외치고 죽은 예수의 심정으로(적어도 그때 내 심정으로는)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제 이 나라에 봄이 오는가. 그런 설레임과 희망에 나는 내가 가진 모든 패를 던졌다. 올인이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세상은 내 기대처럼 극적인 곳이 아니었고, 항상 정의가 역경을 이기고 마침내 승리하는 감동적인 곳은 더더욱 아니었다.

전후 처리 과정에서 잡음들이 있었다.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한 뒤에도 여전히 세상은 불만스럽다는 듯 삐걱거렸고, 사람들은 공공의 적이 사라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에게 돌을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여당과 야당, 좌와 우, 진보와 보수, 7080과 2030, 남과 여, 원주민과 이주민, 시그니엘 레지던스와 휴먼시아......세상이 거대한 투견장 같았다. 박근혜가 더는 대통령이 아니게 되어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놀랍게도 별로 슬프지 않았다. 나는 문득 무거운 피로를 느꼈고, 그 순간, 내버려두었던 참고서와 입시 문제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학창시절의 마지막 1년 동안 동아리도 하지 않고 뉴스도 보지 않고 피켓도 만들지 않고 공부를 해서, 대학에 갔다. 고3 시절에는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다. 무채색의 시절이었다.

나는 그 이후로 잘 웃지 않게 되었다. 누가 넌 왜 웃지 않느냐고 물으면 나는 앞에서 서술한 내용을 구구절절이 얘기하는 것이 싫어서 그냥 웃어주고 만다. 나는 사람을 잘 믿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신봉하는 사상이나 체제도 더는 신뢰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나의 순진했던 시절과 그때의 내 기준으로 보면 '변절한'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 너무 어리석다고, 세상이 그리 만만해 보이더냐고 힐난할지도 모르겠다. 그래, 나는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곳이길 바랬다. 그러나 인간들은 여전히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세상은 더할 나위 없이 견고해 보인다. 당신은 나의 지난날에 침을 뱉으려는가. 얼마든지 그렇게 하라. 나는 지금 대학의 아늑한 골방에 짐을 풀고 잠시 세상에서 후퇴했다. 백석 시인의 말처럼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 나의 입장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하나의 소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인간이 싫어 인간에게서 멀어지려 할수록, 나는 어쩔 수 없이 인간을 그리워하는 내 안의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이토록 멍청한, 이토록 잔인한, 이토록 추한 인간에게도 자꾸만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싶은 욕구가, 아니 나 자신에게 한 번 더 순진하게 믿을 권리를 허락하고 싶은 욕구가 불쑥 고개를 쳐들곤 한다. 지금은 우선 나를 다스리는 시간이 더욱 간절하기에 인내할 뿐, 내 안의 열정, 세상을 좀 더 정의롭고 평등한 곳으로 만들고자 했던 나의 이상은 아직도 씨앗처럼 내 안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세상을 조금 더 단순한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구가, 비록 두 다리는 더러운 현실의 진창에 빠질지라도 두 눈으로 하늘을 좇고 싶다는 욕망이 가라앉은 내 기분의 표면을 떠다니는 것을 안다. 다만 발아의 때를 기다릴 뿐이다. 고치 속의 에벌레처럼 나는 웅크린다. 앞으로 꽤 긴 시간동안, 나는 내 몸을 찢고 다른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 땅을 기고 흙먼지를 마시는 벌레처럼 무표정한 나날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고치를 찢고 나올 그날, 더이상 부끄러움 없이 햇빛을 쬘 그날이 오면, 마침내 결단이 서고 세상을 향해 마주할 용기가 생기고 무언가 나도 세상에 이바지할 것이 생각나는 그 날이 오면, 나의 굳은 입가에도 미소가 돌아올 것을 믿는다. 내 미소는 장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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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의 일상은 분주하고, 공허하다. 그것은 이 도시 위를 바삐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 학습된 감정이다. 그러나 요 며칠간, 분주함은 나와 엮기엔 좀 과분한 단어였다. 분주하지도 않으면서 공허하기란 퍽 민망한 일이다. 늦은 오후 샤워를 하다가, 덜컥 사는 것이 부끄러워진 날 도망치듯 다대포행 열차를 잡아탔다. 바다는 늘 거기 있다. 사는 일이 비루해 보이고 오갈 곳 없이 위태로울 때, 바다가 늘 거기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바다, 라고 발음할 때 ㅂ과ㅏ는 편안하게 밀려나오고, ㄷ과ㅏ는 윗잇몸을 치면서 힘있게 나아간다. 그러므로 바다, 라는 단어는 이미 바다를 닮아 있고, 바다, 라고 말하는 모든 아해는 벌써 바다에 닿는다. 바다는 오래된 습관처럼 제 몸을 열어서 제 자식들을 뭍으로 올려보내고 인간의 자식들을 가슴에 품는다. 아마도 내어주고 나아오는 심심한 순환이 바다의 삶일 것이다. 남해 바다는 모든 인간사의 종착역이다. 남해 바다를 밟는 모든 인간들은 제 삶의 무게를 일부분 떼어 남겨두고 떠나간다. 그 무게들이 바닷바람에 잘게 바스라져서 넓고 고운 모래사장으로 남았을 것이라는 내 가설에는 이렇다 할 근거가 없다. 그러나 남해 바닷가에 앉아 지는 해를 오래 지켜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의 말에 동의할 수 있으리라. 누군가의 기억을 깔고 앉아서 다양한 인간군상을 관찰하는 일은 퍽 흥미로웠다. -건장하고 다부진 체격의 청년 서너 명이 원색의 서핑 보드를 들고 파도를 응시하고 있다. 이윽고 바람이 파도의 키를 높여 놓으면, 차례대로 보드에 몸을 밀착시키고 파도가 밀려오는 방향을 마주보고 나아간다. 보드 위에서 균형을 잡고 파도를 횡단하는 저 청년들의 혈관 안에는 저 옛날 뗏목을 타고 고래를 잡으러 떠나던 조상들의 피가 미세하게 흐르는지도 모른다. 젊은이가 판자 하나를 의지해서 바다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모습은 아찔하고, 그만큼 아름답다. 한 명은 아직 서핑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자꾸 보드 위에 서다가 미끄러졌다. 그도 언젠가 자신의 파도를 능숙히 건너가게 되길 바란다. -아이들은 힘 닿는 데까지 헤엄쳐 나아가다가, 힘이 부치면 파도를 타고 부모에게로 밀려온다. 밀려오는 아이들의 표정에 뒤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나이의 아늑함이 드러나 있었다. 아이들은 깔깔거리면서 부모에게 안기고, 물장구를 치고, 부모가 둘러준 수건에 싸여 핫바를 먹는다. 입이 작아서 깨문 단면 또한 작았다. 나이가 더 어린 아이들은 고무튜브를 타고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는데, 튜브의 모양은 돌고래부터 꽃게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이었다. 총천연색 튜브들이 바다를 유영하는 동안 사내아이들은 다시 한번 바다에 몸을 던지고, 누가 더 멀리 나아가는지 시합을 했다. 너무 멀리 나가지 말라고, 어머니인 듯한 여자가 소리를 쳤다. -연인들은 대부분 물에 들어가지 않는다. 대신에 부지런히 사진을 찍는다. 사람이 없고 한적한, 바다 위로 석양이 은은히 깔리는 만 부근이 연인들이 선호하는 스팟(spot)인 듯 보였다. 남자가 여자의 귀에 대고 무슨 말을 하자 여자가 이내

  • 2019-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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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성현

    안녕하세요, 독님. 반갑습니다. 긴 글이었지만 놓치지 않고 한 번에 읽었습니다. 지난번에 올려주신 글은 조금 틀에 매어 있는 느낌이었는데 이번 글은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풀어주었다는 생각입니다. 많은 철학적 고민 속에 바라보게 된 세상의 뒷면을 세월호 사건으로 확인하게 되면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투사처럼 참여하였지만, 최선을 다한 만큼 정의로워지지 않는 세상에 절망하게 되고 웃음조차 잃어버린 모습이 되었다는 내용으로 글을 읽었습니다. 제가 독님과 연령대는 다르지만 동시대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산 한 사람으로서 독님의 글에 무척 많이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확실한 건 전보다 나아지고 있다는 것, 조금씩 의식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 그로 인하여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세상이 한 번에 치유되고 나아지지는 않더라도 불의에 쉽게 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우선 날짜에 대해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셨네요. 한 남자아이가 태어나 사고의 전환과 성장통을 갖게 된 시기를 짚어주신 거라 생각해요. 그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달라진 모습을 가진 나에 대한 의미를 강조해 주셨네요. 그 흐름에서 살펴보자면 2019년 9월 18일에 도서관에서 짓고 있는 표정은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것 같습니다. 교수님과의 일화는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 공분하고 괴로워했던 작자의 모습과는 동떨어졌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선물하고자 한다.’는 서두의 글에 주목합니다. ‘그 날이 오면, 나의 굳은 입가에도 미소가 돌아올 것을 믿는다. 내 미소는 장전되어 있다.’라는 결론의 문장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독님이 살고 있는 세상의 미래는 지금보다 더 밝을 것이라는 기대를 해도 될지요? 수고하셨습니다.

    • 2019-10-07 06:11:56
    전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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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 떠날 날이 가깝습니다. 많은 것을 배워 갑니다. 모두에게 고맙습니다.

    • 2019-10-02 18: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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