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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개껍질 그리고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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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20-03-25
  • 조회수 675

조개껍질을 조심하세요.

이 말을 어딘가에서 보고 다정하다고 생각했어. 조개껍질을 조심하라는 말은 따듯하고 애정 어린 말 같다. 누군가가 바닷가에 나를 앉혀놓고 조개껍질을 조심하라는 말을 해 줬으면 좋겠네. 나를 어린애처럼 걱정해 주는 말을 들었으면 좋겠다. 그런 말은 몇 시간이고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이런 말들은 어딘가 작은 박스에 넣어서 오래 간직하고 싶어. 왜냐면 세상은 너무 악하고 더러우니까. 이런 말들이 오염되지 않게. 다정한 것들은 오래 다정할 수 있게. 나는 이런 말들을 어딘가에 깊숙이 넣고 따듯하게 보관하고 싶었어.

나는 때 타지 않은 다정한 것들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했어. 이제부터 다정한 말들을 수집해야지. 나는 수집한 말들을 모아서 세상에 환멸을 느낄 때마다 그것들로 내 어지러운 마음을 환기시킬 거야. 때타지 않은 다정한 것들로 내 열등하고 우울한 마음을 표백시켜야지.

다정한 것들을 생각해볼까.

사랑한다는 말은 더 이상 그다지 다정하지 않네.

더 애정 어리고 순수한 것들을 찾아볼까. 황인숙 시인의 시집에 나오는 비가 온다는 시. 비가 온다는 말은 다정하지. 아니지, 비가 온다는 말에 어린 애정과 사랑이 다정하지. 순수하고 열정에 가득 차 있는 것들. 나는 이런 것들을 더 수집하고 싶었어.

미국 남부의 해변. 그 해변에 네시쯤에 비스듬히 드는 볕 같은 것들도 다정하지. 볕 그 자체는 인격적이지 않더라도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것들은 포근하고 따사로워. 누구는 키스하고 누구는 산책하고 누구는 모래성을 짓는다. 그곳에 바다 소리를 들으며 누워있으면 나까지 햇볕 같은 사람이 된 것 같아. 나도 다정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그곳에 있던 일주일 내내 해변가에 하루 종일 누워있었어. 햇볕에 화상을 입고 피부껍질이 온통 벗겨졌지만 괜찮았어. 해변의 볕은 무진장 다정했으니까.

그전에 누군가 내게 해줬던 네가 나의 나의 자랑이라는 말은 또 왜 그렇게 다정한지. 누군가 내 외모를 칭찬하고. 내 성격을 칭찬하고. 내 성적을 칭찬할 때는 기쁘지 않았는데 누군가 나더러 내가 그들의 자랑이라는 말을 할 때는 벅차올라. 자랑이라는 말은 깊고 함축적이지. 김승일 시인의 나의 자랑이랑이라는 시를 좋아하는 것도 이 때문이야.

사랑하는 이의 품은 다정해. 예를 들면 유리의 품. 유리의 품에 안겨 있을 때 나는 불안하지 않아. 유리가 숨을 들이마시고 내가 같이 숨을 들이마실 때. 유리의 따뜻한 온기로 내 차가운 발과 손을 녹일 때. 아, 다정하다. 나는 더 이상 내 병약에 대해 고뇌할 필요가 없게 된다. 잠시 동안이라도. 나는 순수하고 평온한 태초의 상태로 돌아간 것 같아. 내가 악하지 않았을 때. 내가 병약하지 않았을 때. 내가 순수한 아기였을 때. 온전한 형태의 태초의 상태.

나에게 여행 오라는 말도 다정해. 얼마나 많은 마음들이 서려있을까. 이제니 시인은 겨울에 자신에게 여행 오라는 말을 하면서 어떤 마음을 가졌을까.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이 말의 이면에 있는 것들은 어떤 결을 가지고 있을까. 누가 나더러 겨울의 나에게 여행 오라는 말을 해 줬으면 좋겠다. 그것도 가볍게 의례상 한 말이 아니라, 사랑과 애틋함을 담은 말이었으면.

아, 나는 다정한 것들을 너무 사랑해!

다정한 것들을 되뇌고 있노라면 나는 세상의 더러움을 잠시 잊게 되지. 사람들이 애인을 수집하고 명예를 수집하고 돈을 수집할 때 나는 다정을 수집하는 사람이 될 거다. 그런 생각을 하는 요 며칠간이었어.

***

나는 이제 오 년 동안 몸담았던 곳을 떠나려고 짐을 싸고 있어. 가볍게 떠나기 위해 모두 다 버리고 있지. 챙기는 짐보다 여기에 두고 떠나는 버리는 것들이 더 많아.

하루 종일 버리고 버리기를 반복하다가 나는 준이 삼 년 전 크리스마스 선물로 줬던 성냥개비를 찾았다. 메인 선물로 받았던 양초보다 내가 더 좋아하던 성냥개비. 그림이 그려져 있고 준의 글로 도배가 되어 있었던 성냥개비 말이야. 이것도 버려야지. 생각하면서 나는 성냥개비 갑을 버리려고 했어. 먼저 안에 있던 성냥개비를 모두 쏟아냈는데.

성냥개비 갑 바닥에는 처음 보는 노트가 있었어. 이 글을 읽었으면 좋았을 삼 년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막 버리려던 참에 보게 되다니. 삼 년 후에도 참 다정한 성냥개비 갑이다! 성냥 300개비는 결국 다 못 썼고 세월은 흘렀고 감정은 희석되었고. 준과 나는 그때와는 다른 사람이 되었지만 다정한 것들은 오롯이 남는다고. 애틋했던 감정들. 나는 여전히 2017년의 겨울을 기억하고 있지. 시리고 춥고 외롭지만 다정하던 겨울.

다정한 것들. 애틋한 것들. 나쁜 세상 속에서 나는 다정한 것들을 계속해서 수집해야지. 내 품 속에. 열등하고 아픈 내 품 속에. 다정한 것들은 오염되지 않고 언제까지나 다정한 것들로 남을 테니까. 아픈 내 마음을 따듯하게 덥혀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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