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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보고서

  • 작성자 녹두
  • 작성일 2020-12-25
  • 조회수 664

함께 들었으면 하는 곡 - 조성모 가시나무

 


나사는 마침내 승옥의 눈에 마지막 총기마저 사그러들었음을 느꼈다. 제 안에 있는 신경과 욕구를 하나 하나 죽여 눈을 떠도 보려 하지 않고, 귀가 열려도 막힌 척을 하는, 결국 무엇도 더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고 느꼈다. 말로 어르고 달래도, 화를 내며 등을 떠밀어도 승옥은 꿈쩍하지 않았다. 못 이기는 척 시늉을 할 때도 있었지만 중력이 이끌듯 그녀는 금세 원 상태로 되돌아왔다. 나사는 결국 승옥의 어깨를 부여잡고 소리쳤다. 승옥, 이제 그만 정신 차려도 되지 않겠어? 상처가 있다면 채우면 되고, 결핍이 있다면 메우면 되어. 이루지 못한 열망이 있다면 나중을 기약해도 되고,... 그러나 승옥의 머릿 속에는 희고 포근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송이가 유독 커서 쉽게 바닥에 쌓이는, 주변의 모든 소리를 흡수하는 눈이었다. 온통 백색이 된 머리 안에는 커다란 물음표만이 남아 있었다. 그것들 알게 다 뭐야, 느껴서 고통스러운 적은 잦았어도 모르는 척 해서 다친 적은 없었다. 나사, 너도 그만 겨울 안에 접어들렴. 죄책감과 꿉꿉함을 천성으로 받아들이고 그만 익숙해지면, 백색이 되어 더 이상은 암 말도, 암 생각도 안 해도 된다.

언제고 사귀던 사람이 승옥 너는 겨울을 닮았다, 하고 말하길래,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럼 나는 겨울 안에 사는 눈사람에 지나지 않나.

봄이 오면 녹아내릴 눈사람에 지나지 않나. 영영 겨울에 잠복해 살아갈 한 철 잠수부의 운명을 타고난 것이 아닌가.

승옥은 이제 더 이상 알고 싶지

위대해 지고 싶지

배우고 싶지

희망을 갖고 싶지

기대를 갖고 싶지


2020. 눈사람 구출 작전

이나영


성탄절이다. 자고 일어나 보니까 오지 않던 눈이 자박하게 쌓여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패딩에 수면양말을 신고 나가서, 뒷산 한 바퀴라도 달려 오고 싶다. 하지만 미뤄 두었던 연말 보고서를 쓴다. 지금 하고픈 것들 중에 제일 원하는 것- 나중에 돌아보았을 때 하지 않아서 제일 후회할 것-이다.

작년에 우연히 글틴에 올린 연말 보고서가 연간 우수상을 타고, 주변에서 소소하게 화제가 되면서, 연말 보고서를 쓰게 된 계기를 이곳 저곳에서 질문해 줬다. 이것은 내가 나온 대안학교들의 영향이 컸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대신에 일주에 한번, 한 학기에 한번, 일년에 한번... 그런 주기로 우리는 글을 써 올려야 했다. 글은 ​우리들 사이에서는 시점 변환의 역할이 되어 주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대에 있어도, 그 사람이 보는 것은 다르다. 집중하고 기운을 쏟는 것, 만나는 사람, 나누는 대화, 그리고 일시적으로 스쳐 가는 감정들까지. 입으로 내뱉기에는 아주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편린 같은 것이어도, 한 주를 세세하게 나열하려고 골똘해지다 보면 깊은 곳에 숨었던 진심이 툭 튀어나와 기록된다. 예를 들어 과자 하나를 나눠 먹더라도 즉석에서 꾸짖기에는 경량해 보이는 친구의 욕심을 포착할 수도 있고, 되새겨 보니 내내 떠오르면 글에 그것을 진술해도 된다. 그럼 나는 그 사람의 관찰력, 평소 쌓아 왔던 배려심 (욕심 포착의 계기), 어떤 모습을 좋아하고 상처 받아 하는지, 타인을 보며 자신은 이렇게 자정했구나 하는 존경심, 이런 것을 파악하고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진솔한 글은 그 사람을 한정짓지 않고 더욱 존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글에 흥미를 가진 사람으로서, 평소 글을 적지 않는 사람이 쓴 일주글에서 마음을 철렁하게 만들 정도로 와 닿는 문장을 적으면 열등감과 질투심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오히려 깨닫게 되었다. 모든 분야의 글은 결국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며, 그중에서도 '좋은 수필'은 사고하는 사람만이 쓸 수 있다고, 깊이 사고할 수록 뜨거운 수필을 적을 수 있구나 하고. 맞춤법 다 틀리고 배치 하나 못 해도, 겨우 한 문장으로 나를 뜨끔 뜨끔하게 만드는 괘씸한 문장들. 나중에는 경외감 마저 들어 숭배하듯 우러러보듯, 그런 글을 적은 사람을 바라보게 되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지만, 그것 또한 누군가에게 멋대로 기대하고 실망하는 어떤 종류의 한정지음 같아서 검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내 방의 한 벽은 온통 창으로 되어 있는데, 그래서 밖 풍경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뒷산과 테마파크, 어린이집이 가까워 내려보고 있으면 종알거리는 어린이들, 정갈하게 관리되어 있는 나무들, 시야를 떡, 푸른 빛으로 가로막는 산길, 이런 것들이 매일 보인다. 나는 외출하면 반대 편으로 나가기 때문에, 눈에는 익었지만 발에는 하나도 익지 않은 광경들이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유독 바깥 외출이 적었다. 집 안에서 대다수의 시간을 보내니 계절감이 옅어져 봄 여름 가을 겨울, 명확한 시점이 없고 나가보면 덥고 추워져 있었다. 그러다 어제 너무 답답해서 창문 밖을 봤는데, 뒷산에 아무도 없길래 나와 그 곳을 거닐었다. 생각보다 바람이 불지 않아 달렸더니 패딩 안에 조금 땀이 나기도 했고, 테마파크에는 위에서는 못 봤던 어린이들을 위한 위험 표지판들이 매번 놓여 있었으며, 정자 앞의 냇물은 얼어 있고, 나뭇잎에 가려져 숨은 벤치들도 있었다. 이렇듯 시점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르다. 그리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온도로 나를 맞는 일도 있다. 같은 세상을 살아도 내가 보지 않고, 느끼지 않고 있던 것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 하면, 두렵고 아쉽다. 세심해지고 예민해지려고 자꾸 나를 재촉해야 한다. 잠시 느낀 것이라도 차근차근 따져 가며 분석하고 물어야 한다. 그리하여 내 안에 있는 것을 알 수 있고 안 것을 토대로 또 볼 수 있다. 그러니 최소 한 해에 한 번 정도는 이렇게 차근히 나를 물어 아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눈사람

작년 보고서는 지리산 안의 백월예술학당(입시 미술을 배우는 기숙 대안학원이다.)에서, 이제 흔들리는 나를 받아들이고 잘 살아보겠다, 하는 말로 끝맺음 되어 있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저런 일이 벌어져도 초연해지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기도 하다. 일과는 눈을 뜨면 소묘를 하고, 점심 먹고 소묘하고 저녁 먹고 알아서 공부하고 잤다. 하지만 1월 초, 그 학당에서 나오게 되었다. 정확히는 쫓겨났다. 나는 자라기를 기가 세고 고집과 자존심이 강해서, 위계적인 분위기에 잘 적응을 못하고, 나를 쉽게 대한다고 생각하면 필요 이상으로 발끈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 그래서 학당 안 선배에게 느끼는 거부감, 그리고 선생님들에게 느끼는 불만을 마음 속에 품고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수업 시간 나는 선생님이 타블렛 보지 말고 공부하라는 말에 '인강용으로 타블렛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언질도 없이 내 타블렛을 빼앗아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폈고, 실행중인 앱 목록엔 금지 앱( SNS)이 있었다. 나도 물론 설명하자면 사정이 있다. 하지만 규칙을 어긴 것은 사실이니 내 잘못이고, 그것에 관해선 더 말 얹지 않겠다. 하지만 그 순간, 내가 잘못을 했다는 사실보다도, 선생님이 멋대로 내 물품을 건들고, 압수했다는 사실이 받아들일 수 없이 짜증났다. 그래서 억지를 부렸고 선생님의 말마다 트집을 잡았고 대들었다. 한마디로 상황 개선의 의지는 없고 그냥 쌓였던 스트레스 다 쏟아 붓고 말았던 것 같다. 선생님은 나 한대 치려고 손을 드셨다가 간신히 내려놓고, 가서 짐 싸라, 말씀하셨고, 다음 날 나는 가방 여러개를 들고 지리산에서 버스 타고 집으로 왔다. 그럴 마음이 안 들어서 아직까지도 사과 말씀을 안 드렸다.

해당 사건은 지나고 난 지금 생각해 보니 어린 시절의 여러 가지 내 모습과 연계가 되어 있다. 일단 초등학생 시절 엄마는 내가 잘못할 때마다 무력으로 휴대폰을 빼앗았고, 나를 때리셨다. 그 강도가 제법 많이 심해서 학대로 신고가 들어온 적도 있다. 하여튼 그렇게 부셔진 휴대폰, 빼앗겨서 사생활 없이 들킨 휴대폰, 그런 경험이 누적되다 보니, 사용하고 있는 폰을 뺏긴다는 것 자체에 알게 모르게 엄청난 반감을 가지게 된 것 같다. 이것을 깨닫게 된 건 제작년, 여행학교에 다니고 있었을 때에도 미콩(원장 격인 대원수 선생님이시다)이 거의 중독처럼 폰만 붙잡고 있는 나를 막기 위해 잠시 폰을 가져가셨는데, 그것에 엄청 예민하게 굴고 반응해서 오히려 미콩이 당황했던 적이 있다. 미콩이 이런 애는 처음 본다 해서 나도 그때 당황하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 나만 휴대폰에 엄청 이러는구나, 하고. 어렸을 시절의 경험들은 기억 속에서 흐려져도, 증발되는 것이 아니라 다 누적이 되는 거구나, 하고 알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 사실 만으로 물 불 안가리고 선생님에게 대들어 한 순간에 학당에서 쫓겨나게 됐으니... 어리석음의 끝이고 개선이 필요한 마음이다. 심지어 그 때는 자존심 세우겠답시고 뻔뻔하게 방 들어와서, 이제 내일이면 나가니 규칙 다 어기겠다고, 반입 금지 전자기기를 방에 들고 들어와서 EDM 틀고 후레쉬 키고 속옷까지 다 벗고 (상체만) 룸메이트들과 새벽까지 열심히 춤을 췄다. 블랙 코미디가 따로 없다. 머리를 신나게 흔들고 있으니 스멀스멀 드는 다른 감정들을 겨우 부인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그제야, 부모님을 볼 수가 없어서, 롱패딩 주머니에 휴지 한 곽을 통째로 박아 넣고, 바로 집 앞 깜깜한 놀이터 지붕 있는 미끄럼틀 안에 들어가서 오열했다. 그리고 준시내로 나가 건물들마다 세워있는 주차금지 팻말들을 발로 차서 넘어뜨리고, 또 펑펑 울다가 친구한테 전화해서 나 정신병 있는 것 같아. 그렇게 상담을 했다.

정신병이란 즉슨 학당에서 반년남짓 생활하면서 갖게 된 스트레스와 그것 때문에 생긴 성질들을 일괄해서 말한 것인데, 그곳에서 나는 매일 신경 쓰이는 구석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나는 아주 관계지향적인 사람이라, 주변 사람들과 관계가 우호적이면 힘든 일도 잘 해쳐 나갈 수가 있고, 극복할 수가 있다. 그런데 앞서 언질했듯 선생님과의 관계는 완전한 신뢰관계가 아닌 비즈니스성에 가까웠고, 내가 겪어온 선생님들은 죄다 대안학교의 신념 넘치는 분들이라 그 온도와 격차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도 선생님을 무척이나 싫어하고 뒷얘기를 하다 보니까,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들은 일화가 있으니, 쉽사리 내 얘기를 못하겠고, 그래서 바뀌는 게 없고, 그 반복이었다. 그러면 친구들 사이에서 의지할 대상을 찾으면 되는데, 룸메이트들인 동생들은 사람 대 사람으론 정말 좋아하지만, 다들 동생들이고 나보다 덜 성숙하다 보니 유약하고, 정신없고, 정말 정신에 병이 있기도 하고. 옆 방 언니는 어렵고 가끔 나를 괴롭게 하고 나는 그거에 지나치게 휘둘리고, 한 명 있는 친구는 의지 대상이라기 보단 있으면 즐거운 사람이라서, 숨구멍이라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리고 그런 환경에서는 자연스럽게 내가 남의 숨구멍이 되기 때문에, 감당하고 조율할 짐은 많지, 나는 날이 갈수록 예민해지고 편협해지지, 그리고 그걸 개인적으로 못 견디는 사람이라서, 나중에는 정말 지리산 산속을 뛰어다니면서 크게 소리를 지르고, 길바닥에 드러눕고, 그러면서 해소를 했다. - 심지어 한 명 외출은 안 되어서 동행한 동생은 내가 일어날 때까지 그걸 가만히 지켜봐야만 했다. - 룸메이트를 불러서 혹시 몇 대만 때려도 되냐고 정중히 묻고 실컷 때린 다음에, 미안하다 하고 사과하고 조용히 잠에 든 적도 몇 번 있다. 소주를 한 병을 들고 와 한 주 내내 아껴 마신 적도 있고, 안 해도 될 슬픈 얘기 나누면서 엉엉 울다 잠든 새벽도 기억난다.

돌아온 집은 원래 살던 집이 아니었다. 이사 온 새집이었는데, 그래서 내가 주위에 아는 길이 시청 도서관까지 가는 것 밖에 없었다.열 아홉이라는 나이는 학교 밖 청소년에게도 입시생이라는 신분을 만들어 준다. 엄마는 사람이 내게 거는 기대가 많고, 그게 사랑인 사람이기 때문에, 매일 대학 생각했니, 학원 알아봤니, 넌 재수는 안 된다 20살 되면 독립해라, 이렇게 살거면 평생 알바나 해, 이런 말들로 나를 쪼았는데, 그건 내 안에 있는 생각들이랑 정확히 다 일치했다. 마음에 틈이 없던 나는 나의 진심과 엄마의 진심까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편의점에 가서 술을 잔뜩 사서 롱패딩 양 주머니에 우겨넣고, 도서관 가는 길을 산책하며 다 마셨다. 동네 친구들을 만나는 날에는 몇 갑씩 줄담배를 피우고, 필름이 끊길 때까지 마셔서 다음 날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숙취에 앓았고, 진정되면 며칠 뒤에 또 마셨다. 알코올중독 증상을 검색해 보니 전조 증상과 다를 게 없었다. 맨 정신으로 뭔가를 생각한다는 자체가 너무 해롭고 자해처럼 느껴졌다.

4월이 당장 검정고시였다. 고졸 학력은 따야 하니, 문제집을 사서 풀었지만, 난이도가 간단하기 때문에 한 달 만에 전과목을 다 살펴 끝냈다. 남은 두 달간 하던 소묘를 마저 배워서 서양화 입시를 해야 하나 생각했지만, 도저히 서양화가인 내 모습은 상상이 안 갔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서양화가인 삼촌이 어두운 전망에 대해 알려주자 점점 마음이 싹 가셨다. 그래서 학원을 알아보고, 체험 수업을 하고, 등록 안 하고 돌아오고, 며칠은 날 건들지 말라고 포고하고, 술 마시고, 이 일상을 반복했다.

결국 오늘도 내 액정 안에선 내가 가장 슬픈 사람이 되고

요즘은 글마저 사랑해서 쓰는 게 아니라 털어놓을 구석이 필요해 의무적으로 작성하는 것 같다. 글이 내 목숨을 살리는 셈이다. 이 감정은 낯설지 않지만.​

쓸 수 없었더라면 나는 진작에 죽었을걸. 이건 확신에 차서 하는 말이고.

오늘도 내가 나를 싫어할 이유는 충분하다

엄마가 2만원 넣어준 카드로 술 사는 데에만 다 쓰고

어쩌다 사람이 알코올에 중독되는지 알 것 같다...

사실 이미 초기증상일지도 모른다. 안 마시는 날이 주 1회 될락말락 하니까. 이래서 미성년자 음주 못하게 나라에서 막는거다

얼마나 마셔야 취할 수 있는걸까

피부가 너무 까칠해... 그리고 나는 너무 뚱뚱해 점도 진하지 못하고 속눈썹도 잘 들어올리지 못해

온갖 트집을 잡아 나를 미워하고 그 미움 탓에 정체되어 무엇도 보고 듣지 않았었다.


구출

5월경에 글틴에서 코로나때문에 못 한 시상식을 개별 시상자 인터뷰로 전환한다고, 우리 집에 와서 녹화를 하겠다는 소식을 알려 왔다. 겨우 일상에서 얻는 즐거움이 친구 만나는 거 정도가 다였던 나한테 성취감을 줄 수 있는 일정은 몹시 적었다. 학교도 안 다니는 데다가, 그렇다고 다른 주변 친구들처럼 일을 하거나 학원에 다니거나 청소년 센터도 다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일반 학교 교육을 받았던 초등학생 시절, 나는 부모님의 자랑이었다. 한 해에 상장을 마흔 개를 넘게 타 와서 주방 가장 작은 벽이 다 도배가 된 적도 있다. 대안학교 학생이 된 이후로, 매번 버릇 없고, 내 멋대로 살고, 고집만 부리는 데다가 생활력도 없는 나는 아빠에게 걱정의 대상이자,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골칫거리 같은 대상이었다. 그 이후로 처음 받는 상장이었고, 아주 오래간만에 아버지의 자랑스러움으로 기뻐하는 표정을 봤다. 씁쓸했다. 내가 조금 더 착실하고 바르고, 성실하고, 부모님 말도 맞먹으려 들지 않고 얌전 얌전 들을 줄 알았던 사람이라면, 사회에서 더 쉽게 인정 받을 수 있는 위치에서 더 안정감 있게 생활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고민도 들었다. 다수가 선택하는 길과 다른 길을 택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이다. 중학교 1학년 때도, 남들 중간고사 친다고 바쁠 때 학교 운동장에서 누워 친구들과 새우깡을 까 먹으면서, 카르페디엠, 카르페디엠, 머리에 그 격언을 각인해 넣으려고 부단히 애를 썼었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남들의 성공에 배가 아프고, 그들이 평생 못 할 경험을 할 땐 즐겁다. 떨칠 수 없는 불안감은 이제 받아들이자. 나도 제 나름의 보답을 받으며 산다.

아빠가 웃는 걸 보면서 재수 없다고 타박하긴 했지만, 나도 들떴다. 촬영진들이 오기로 한 날, 들떠서 일찍 일어나 머리를 손질하고 옷을 차려 입고, 네일까지 굳이 떼고 새로 붙였던 것 같다. 꾸밈 없으려고 노력한 글을 써 놓고는 나는 잔뜩 꾸며서 상반되는 이미지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덧대고 화려하게 나를 치장하는 것이 좋다. 그것 역시 하나의 나의 이미지 개성이고 자아 표출이다. 오신 PD님은 여러 질문을 하고, 커다란 카메라 장비들 앞에서 내 글을 직접 낭독하라고 하셨다. 차분한 목소리로 내 글을 읽으면서 조금 울컥할 뻔 했다. 진심은 배반 않는다는 말이 이해가 갔다. 사람들이 다 가고 나서, 그 기분 그대로, 글틴에 썼던 글 링크를 내가 하는 여러 종류의 SNS에 걸면서, 나 상 탔다고, 보러 오라고, 그렇게 공개를 했다. 너무 정제되지 않은 모습이라서, 평생 일면만 드러내고 보일 수 있는 모습만 보일 수 있는 SNS에 공개하는 것에 고민을 하기도 했었지만, 나는 언제나 나 자신으로 온전히 사랑받고 싶었고, 그게 내 자연스럽고 오래된 익숙한 욕구였다. 덜도 더도 말고 나를 담은 글로서 사랑받을 수 있다면, 그건 내 욕구에 상응하는 일이었다.

미처 내 글을 볼 기회가 없었던 잘 알고 지내던 사람들도, 생판 초면의 SNS의 사람들도 내 글을 많이들 좋아해 줬다. 구체적인 칭찬보다도 내 글을 읽으면서 본인도 어떤 자극과 영향을 받고, 뜨거운 원동력을 지니게 됐다는 말이 특히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어떤 익명은 내게 구체적인 제시를 하기도 했다. '대학 생각 있으신가요? 한예종 극작과 지망해 보세요.' 울 나라에서 젤 유명한 예술 대학, 이름은 당연히 낯익었다. 주위에도 재학생이 있고, 입시에 낙방한 사람도 있고, 그 사람들 얘기를 들어 보면 엄청 쳐 주는 곳이구나 하고 알 수 있었다. 그만큼 검정고시 합격 후에 별 다른 것도 하지 않고, 이미 여름이 다 되었는데도 열 일곱 혹은 열 여덟에 머물러 있는 나한테는 무척 과분하고 관련 없어 보이는 곳이었다. 나를 많이 쳐 주시는구나, 이런 칭찬으로만 여겨졌고, 대학에는 뜻이 없어요, 그래도 감사합니다. 답을 남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게 5월이었다.

중학생 때 한창 사춘기의 끝을 달리고 있었을 시절에. 막무가내로 감정에만 휘둘리던 내게 이런 충고를 해준 선생님이 있었다. “나영아, 앉은 자리가 꽃자리란다.” 꽃자리는 무슨. 평생 그렇게 낙관적인 말만 하고 살으라지. 학교를 나가겠다고 협박했고, 이후의 상담은 이리저리 피해 다녔었다. 하지만 학기 말엔 그 말이 겨우 납득이 가서 결국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던 기억. 꽃자리. 결국 항상 앉은 자리가 꽃자리다. 유아적으로 과거에 머무르거나, 먼 미래를 미리 걱정할 필요 없이 그때 그때의 본능에 충실하고, 하고 싶은 바를 실행하면 된다. 합리적인 사고. 물론 중요하지만... 우물쭈물대기엔 시간이 너무 없다는 생각을 요즘 자꾸 한다.

풀이 있어 건강한걸까? 아침에 집에서 일어나 창 밖으로 밑을 내려다보면 기왓집 서원이랑, 나무들이랑, 작은 저택들이 보인다. 우리 아파트만 해도, 그리고 옆 라인만 해도. 대충 가늠해봐도 수백명의 사람들이 창가에서 같은 광경이 내려다 보일 텐데. 오후만 되면 내려가 그 길 사이사이를 걷는데, 그때마다 이 길이 내 소유가 된 것만 같은 착각에 들뜨게 되는 것이다. 내 소유. 나. 내 고유의 속성. 강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체향. 별것 아닐지 모르는 일상이라도 기록은 내가 좋아서 꾸준히 멈추지 않고 있고, 그 글들을 모으는 작업을 “꽃자리” 라 부르고 있다. 어떤 수를 써야 나를 잘 알고 드러낼 수 있지? 고민이다. 한 해 동안 꽃자리를 지속하며 성숙해져 보게. (0517)


6월 22일

차차 술은 끊었지만 그렇다고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아무것도 하는 게 없으니까 정시로 대학 아무과나 갈까, 라는 마음으로 스터디카페 가서 인강 듣고 문제 풀고, 나중에는 가서 하루종일 넷플릭스랑 왓챠로 영화나 봤다. 가끔 작은 공모전에 글을 출품하기는 했지만, 공모전 시상보다는 쓴다는 행위 자체에만 의의를 둔 것이라, 공모전의 주제나 목적성과 타협을 전혀 보지 않고 써서 전할 소식은 따로 없었다. 스터디카페는 지정석에 8인실이라 가림막으로 가려져도 매일 얼굴 보는 멤버가 정해져 있었다. 내 옆에는 학교 끝나는 시간인 다섯시 쯤부터 와서 화장 고치다가 문제 조금 풀고 집 가는 여자애가 있었다. 당시 나는 여기서 몇시간이나 화장 고칠거면 왜 오는 거냐고 생각하면서 에휴, 한숨을 쉬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노란 머리 질끈 묶고 와서 영화만 보고 낮잠 자다 스터디카페 문 닫을 때 집 가는 나야말로 더 웃긴놈이다. 심지어 당시 나는 너무 고독하고 외로운 나머지 스터디 카페에서 자연스럽게 친구 사귀는 법이 뭘까 고민하고, 매일 거지꼴로 가는 게 신경쓰여서 약속 있는 날 굳이 갈 필요 없는 스터디카페에 들러서 두시간 정도 영화보고 나온 적도 있다. 그 와중에도 생활은 제대로 챙겨야지, 집 오면 운동 한시간 하고 또 일찍 일어나 저걸 반복했다. 한마디로 의욕 있는 척 막상 하는 건 없는, 균형 없는 어정쩡한 상태로 시간을 한 달 가량 보냈다.

극명한 목표, 목적이 있더라면 덜했을 텐데, 19살 6월까지도 대학 생각조차 없고, 그야말로 죽어라 말아먹자 내 인생,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아무 목표 없는 삶이 얼마나 어렵고 무서운지, 소속되어 있는 곳이 없다면 훅 느끼게 된다. 이래라 저래라 하는 사람 아무도 없는 곳에서 가이드라인 없이,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고요한 호수 같은 삶. 글이 준 꿈은 잊어버리고 금세 나는 비루한 나 자신에게 커다란 회한을 느꼈다. 그러면서 또 가만 있었다.

그러다가 중학교 동창이자 여행학교 동기였던 형준이에게 카톡이 온다. 강원도에 있는 해변에서 2박하고 오자고. 준형이네 펜션이 안목에 새로 생겼는데, 세희랑 다민이랑, 세중 소연이도 온다, 우리끼리 3일간 있다 오자, 이런 말이었다. 백수인 딸에게 기꺼이 다녀오라고 수락해준 어머니께 이 자릴 빌어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준형이네 부모님이 펜션장 다른 멀리 있는 집에 있기는 했지만, 3일간은 정말 우리끼리 분리되어서 재미있게 잘 즐겼다. 밤에는 술, 아침에는 패션쇼, 오후에는 바다, 매 끼는 조리과 수석 다민의 통솔 하에 모두 같이 참여했고, 뒷정리도 여행학교 시절처럼 가위바위보를 하든, 사정 되는 사람이 하든 우리끼리 해결했다. 펜션 나갈 때 대청소도 하고 분리수거도 하고, 꼭 일곱 명이서 자취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술에 취한 친구가 그랬다. 중학생 시절 언니가 롤 모델이었다고. 깜짝 놀라 왜, 하고 묻자, 너무 너무 멋있었다고, 배울 점이 많아서 친해지고 싶었는데 이렇게 되어서 너무너무 좋다, 하면서 지금 자기가 뭔 얘길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랬다. 그러고보니 그 말을 듣기 꼭 한주 전에도 친하던 다른 동생에게 똑같은 말을 들었었다. 언니 처럼 되고 싶다, 언니가 내 꿈같은 모습이다.

몹시 비루하게 느껴지던 내가 재조명되는 순간이다. 남의 말 한 마디로 나는 소중하고 배울 점 많은 매력적인 사람으로 재해석되는 것이다. 나는 짖궂은 짓인 것을 알면서도 계속 왜, 왜? 왜 그런데? 하고 캐물었다. 들었던 말들은 뻔히 알고 있는 나의 장점들이었지만, 웅얼웅얼 뭉개지는 그 말들을 들으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또 여행학교에서 있을 땐 연장자에 목소리 크다는 이유로 무서워했던 정다민씨를 그제야 비로소 만나게 됐다. 그러니까 제대로 관계의 물꼬를 텄단 말이다. 여행학교 있을 때는 좋은 사람이란 걸 알면서도 얼마나 어려웠는지. 그리고 다민도 내가 다민을 그리 어려워한 걸 그대로 느꼈다고 한다. 사람을 그렇게 판단해 버리면 정작 제대로 만날 기회는 잃고 만다. 중학생 때 어려워한 리안을 열일곱 때 만난 것처럼, 열일곱 때 어려워하던 다민을 열여덟 때 만날 수 있어서 진심으로 기뻤다. 이렇게 다민과 만나게 된 것을 계기로 용기를 내서 오랜만에 만난 후배깃수의 담임으로 온-나의 선생님이었기도 한 - 문지한테도 내 묵은 진심을 말하고. 펑펑 울면서 안기고, 진상 짓을 해서 영상찍혀 놀림 받기도 했다. 긍정적인 경험을 긍정적인 경험으로 이어 갔다.

결과적으로 해당 3일은 나에게 환기가 됐다. 비루하다고 판단하던 나에 대한 환기,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타인에 대한 환기. 우리가 사람을 결론짓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며, 정의하려고 하지 않으려고 의식해야 되는 이유이다. 나는 왜 그렇게 내가 어렵고 남이 어려웠을까. 비루한 나는 잊고, 성취하는 나, 열정적이던 나의 모습을 다시 되돌아볼 수 있었다. 믿기 나름, 생각하기 나름.

우스울 수도 있겠지만 걱정을 많이 했다. 만나서 어색하면 어쩌나. 나는 그런 기운을 유별나게 감당할 줄 모르는 소심이 유전자인데. 하지만 생각 이상으로 잘 지냈고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친해지고 잘 지냈음 행복했음. 확실히 창조(여행학교 이름) 때에는 항상 위축되어 있었던 것 같다. 사람들을 보는 필터와 편견이 얇아지니까 누구를 대하든 부담이 없고 개운하고 행복했다. 이제야 비로소 지난 몇 해들에 대해서 자신 있게 좋게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의심하지 말아야지. (20-06-22)

안목에 있을 때 같이 밥상머리에 둘러 앉아 밥을 먹으면서, 근황 얘기를 나누는 일이 잦았다. 그때마다 나는 썰은 많았지만 명확한 지향점이나 하고 있는 일은 없었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이목을 받는데, 그게 다 웃기니까, 그리고 내가 웃기려고 하니까, 꼭 내가 개그맨이 된 기분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그 친구들은 나처럼, 작은 것에도 깊이 사고하고 통찰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남들이 보기엔 우스울 정도로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며 고민하는 사람들이다. 술 자리에서 별 것 아니지만 진지한 고민들을 나누면서, 에너지를 전해 받았다. 무모한 일에 도전해 볼 수 있는 자신을 얻은 것이다.


작전

삶은 바쁘게 살고 봐야 한다.

한가지에 꽂혀 열중하기 보다는

적당히 실속 있고 균형 있는 계획을 세운 후 실천하며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기쁜 삶의 방식이다. (20-10-22)

그리고 안목에서 딱 돌아와 집에 가서 컴퓨터를 켜는데, 갑자기 머릿속에 '한예종 극작과'라는 단어가 다시 떠오른다. 신경 쓰지도 않았던 그 단어가 갑자기 수면 위로 올라오자 나는 속수무책으로 K.O. 그래,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 하고 인터넷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쳐서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입시 요강에 이렇게 과 설명이 적혀 있었다.

[극작전공은 인간 삶에 언제나 새로운 형식의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발상능력과 존재의 조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예민한 통찰력 그리고 자기만의 개성과 독창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극형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구성능력을 지닌 극작가 양성을 교육목표로 한다.

예술사 과정은 인문학 및 예술일반에 대한 기초교양교육과 극작가가 되기 위한 전공교육을 실시한다. 전문사 과정은 작가가 되기 위한 심화교육을 실시하며, 독립된 작가로 성장하기 위한 자율성을 강조한다. 아울러 연극현장을 선도해 갈 자기 기획성 그리고 개성과 독창성을 지닌 자기 작품세계를 구축하는데 교육의 중점을 둔다.]

서사창작과라고, 문예창작과와 비슷한 다른 글쓰기 과도 있었다. 글을 좋아하지만 문예창작과에 갈 생각이 없었던 이유는 첫번째로 소설은 내 얘기가 아니라 남의 얘기를 적는 것 같았기 때문이고, 두번째로 나는 시인이나 쓸 법한 아름답고 세련된 묘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소설을 읽는 것도 좋아했지만, 주인공에 이입하기보다는 이야기의 내용을 보며, 아 이런 장면이 복선이었구나, 이런 전개는 연출적으로 좋네, 비판하고 따져 보기를 더 좋아했다. 그리고 독서실에서 쭈그려 영화들만 보다 보니, 영화 취향이 확고하게 생기는데, 나는 '감독이 천재구나'하고 느껴지는 연출, 스토리를 좋아했다. 작가가 발상한 세계관, 그리고 그 안에서 움직이는 인물들이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그것이 자꾸 내가 글로 내 가치관을 담고 싶게끔 만드는 촉발제였다. 문예창작과에 가게 되면 소설을 쓰겠지, 그것은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대안학교 4년을 다니면서 수많은 무대 위에 올랐고, 무대 아래에서 직접 연기를 할 때, 그리고 남의 연기를 볼 때, 목청껏 부르짖는 개인의 생각, 작가의 생각, 이런 것들이 주는 파급력이 나를 매료했었다.

입시 요강의 저 설명은,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을 꺼내 나열해 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자기 기획성, 개성, 독창성. 통찰력, 구성 능력. 수많은 글들에서 원한다고 말해 왔던 것들이자 나의 신념이다. 보자마자 마음이 말 그래도 두근두근 떨리고 벅찼다. 한 순간에 꽂혀서 꿈을 찾아 버린 기분이었다. 나는 원래도 그런 충동적인 감동을 자주 받기 때문에, 얼마 안 가 휘발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오랜만에 나를 긴장하게 하는 이 존재에 그저 경탄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수년을 준비해도 도저히 갈 수 없었다는 글부터 고액과외 광고까지 여러 정보가 무성히 나와 덩쿨처럼 나를 감고 '이제 와서 뭐 어쩌려고!' 하며 나를 놀렸다. 하지만 바쁘게 살아가는 사랑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나만 무엇도 영향받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수동적인 상태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극작과를 추천해 준 익명 분. 내 수필을 읽었다면 보통은 에세이를 쓰세요, 칼럼니스트가 되세요, 이런 추천이 더 자연스러울 텐데, 하필 극작을 추천해 준 이유는 무대 위에 내 무언가를 한번 올려 보세요, 하는 발칙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나는 과연 그런 것을 더 좋아한다. 소설을 쓰기에 나는 담고 싶은 열이 너무 많고, 불씨는 부분 부분 옮겨 담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활활 타오르게 장을 만들어 줘야지. 무대를 꾸리고 싶어졌다.

열 일곱 여행 학교 당시엔 엄청난 자기혐오감에 빠져, 사람들도 다 나를 괄시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무엇보다 내가 나를 가장 미워해서 우울 끝까지 나를 처박아 두었던 시간이 길었다. 상황을 회피하고 싶어서 극단적인 생각도 하고, 사람들을 피해 다니면서 나 빼고 다 잘하고 있는 그 공동체 틈바구니에서 나를 분리시키려고 했다. 자주 그랬고 학교 수료를 얼마 안 남긴 연말까지도 그랬었다. 그 때 의연-교사-이 내게 제의했었던 게 있다. 한국 공연 각본을 한 번 써 보라고.

나는 서서 하는 건 다 잘 못한다. 반면 앉아서 하는 건 악기 빼고 거의 다 소질이 있다. 그리고 불성실하고, 충동적이고, 한 번 꽂히면 끝을 보지만 게으르고, 못 하는 건 안하려 한다. 그래서 한국 공연이 얼마 안 남았는데 맡은 무대가 별로 없어, 남들 다 연습할 때 구석에 박혀 딴짓이나 하고 있었다. 의연은 그런 나의 권태를 몰아내게 해주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모든 교사들을 다 찾아가 허락을 받고 - 무대를 못 해서 글을 쓴다니 그거야말로 도망이지, 하고 꾸짖는 선생님들도 있었지만 해보겠다는 말에 반대하시진 않으셨다 - 의연을 찾아가 그 날로 부연출을 맡았다. 대사를 써 오고, 녹음을 하고... 마침내 한국 공연 날 귀국해서 우릴 보러 온 수백명이 무대를 보고 감동을 받고, 어떤 영향을 받아서 어떤 마음을 갖고, 그렇다는 표현을 해 줬을 때, 나는 뿌듯했다. 누군가 치켜세우지 않아도, 부연출에 참여했다는 말 한번 생색해주지 않아도, 스스로 그 행위에 도취되었었다. 남의 입에서 내가 느낀 감정이 공감된다, 새로 잉태되지만 우리의 것이다. 나의 글은 나를 그들의 일부로 만들었고, 힘의 부분으로 만들었다. 소속감이나 사랑처럼 더 포괄적인 개념의 마음도 느꼈지만, 무엇보다도 나의 가치관의 반영, 아주 일부라도, 겪어 보니 그만큼 내가 파급력 있는 존재로 느껴 질 수가 없었다.

나는 그 길로 블로그를 뒤져 과외 두 곳에 연락을 넣었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싼 가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올해 처음으로 뭘 해보겠다는 내 말에 또 바로 말없이 지원해주셨다. 성격적으로는 안 맞을 수 있어도, 그리고 어린 시절 많이 맞긴 했어도 이제 양측 다 많이 성숙해졌고, 나를 아껴주시고 이렇게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시는 걸 보면, 사주에서 '넌 부모운 뒤지게 없어' 라고 말했었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그 주부터 1주일에 한번 전화로 소낙쌤을 만나 글 첨삭을 받고 문제를 풀었다. 검정고시로 지원할 수 있는 극작과가 있는 다른 대학도 알아봤지만, 내가 나태해서 수능 접수 기한도 놓쳤었던 상태고, 그래서 올해 지원할 수 있는 것은 실기 100%의 서울예대를 제외하면 솔직히 없었다. 두 극작과를 목표로 과외를 시작했다.

6년간 대안교육을 받아오며 주류와 다른 생활을 한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과 고독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글로 옮기면, 보잘것 없어 보이는 나의 삶도 의미있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주는 후기와, 자신의 삶과 연관지어 말해주는 경험담은 스스로에게도 확신을 심어 주었습니다. -모 대학 자기소개서 중 발췌-


눈사람 구출

이후로는 꾸준히 입시 준비를 하며 바쁘게 살아왔다. 내가 너무 게을러서 수업을 빼먹는 일도 부지기수에다가 과제를 안 해온 적도 엄청 많았다. 글이 안 풀리면 어거지로 붙잡고 있다가 내가 봐도 망작을 써 가서 한탄에 빠진 적도 많다. 서울예대 시험을 치기 바로 한 주전에는 '이제 이 정도면 예대 때려 부수고 올 수 있겠는데요?' 말을 듣고 엄청 들떴었고, 그런데 서울예대 시험장에 가선 예상치 못한 문제에 내가 때려 부숨 당하고 왔다. 수시에서 떨어지고 다른 하향 대학들(면접, 포트폴리오만 보고 갈 수 있는 학점은행제/전문대들)에 줄줄이 장학금/장학금/합격 처분을 받는 바람에, 하나도 안 기쁘고, 크게 한숨 내쉬면서 예대에서도 안 됐는데 예종은 되겠냐, 또 다 포기해버릴려고 한 적도 있다. 하향 대학 중 제일 가까운 데 다니면서 통학하고, 조기졸업해서 전문대졸 전형으로 간다... 반수한다... 속 편하게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블로그의 글들을 보면 그 때 내가 피웠던 게으름들에 대한 엄청난 자학들이 그대로 쓰여 있다... 그게 마침 예종 1차 시험 1달 남았을 때여서 더 그랬다. 예종 1차 시험은 언어능력 평가라고 문제를 풀어서 일정 점수를 넘어야 하는 구조인데,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선생님 말 하나도 안 듣고 국어공부 하나도 안 하고, 매삼분 매삼비 각자 3일치씩 풀어놓고 버려두고, 게임이나 하고, 이러고 있었기 때문에, 글쓰기는 몰라도 난 1차에서 잘린다... 하고 엄마한테도 제발 기대하지 말라고 하다가 '쓴 돈이 얼만데에' 해서 한탕 했다.

그런데 예종 시험을 보고 나오는데 예감이 좋은 거다. 난이도가 유독 쉽고 문제 수도 줄고, 그래서 그 다음 날부터 잡았던 운전면허 학원 예약이랑 게임 약속을 줄줄 취소하고 집에 와서 혼자 조용히 손톱 뜯었다 (대체할 표현이 없어서 쓰는데 진짜 뜯은 건 아니고, 그만큼 긴장을 했다.)

기대 버린 척 말은 하지만 가고 싶다 꿈의 대학

가서 하고 싶은 게 한 두가지가 아님

내 인생 한번뿐인데 어떻게든 거길 붙어서 졸업하고 싶음

입학 시험 보러간 날에 머리가 새하얀 할아버지가 시험장 안에 들어오셨다

감독관 아저씨께서 수험생만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드리니까 본인도 수험생 이라며 웃으셨다

나도 머리 새하얀 할머니가 되어서라도 거기 가고 싶음

올해 더 열심히 성실히 했으면 더 명확한 게 있었을까

1차 결과발표도 안 났고 시험은 3차까지 있는데

한번이라도 좋으니까 붙어서 희망을 줬으면 좋겠음 떨어져도 내년에 또 갈거임 정말 가고 싶다 정말 가고 싶어 정말 가고 싶다

(시험 며칠 뒤 2020-12-18 )

그리고 정말 1차에 붙어버려서, 2주 뒤 시험을 위해 글 과제 하고, 다른 독서도 하고, 그러면서 시간 보내고 있다. 솔직히 가능성은 엄청 희박하다고 보고, 누가 '될 것 같아?' 물으면 부정적인 소리밖에 못 하겠는데, 그러니까 질문 하지 마시오. 부정 탑니다. 기왕 1차 된 거 할 수 있는 만큼 다 해 볼 생각이다.

방구석에서 보낸 올 한 해다. 규칙적인 일정도, 나를 통제하는 누구도 없었다. 성인의 삶이 이런 거라면 매일 치열하고 전쟁 같구나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느끼는 권태로움과 슬럼프 때문에. 나는 능숙해 지고 있는 것 같다. 어떻게 힘을 써야 하는지,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나를 달래야 하는지, 사용 설명서를 쓰듯 어떻게 해야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 더 잘 알게 되고 있는 것 같다. 미리 이런 상황에 노출된다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결국 사람은 누구나 혼자가 주체가 되어야 할 시간-독립-이 찾아오고, 비록 계기나 거창한 타이틀이 없다고 해도, 이렇게 조금씩 익숙해지고 맞서면서 스킬풀하게 실력 향상을 이뤄 낼 수 있는 거다.

그리고 다음 주면 정말 성년이 된다. 19년을 청소년으로 (혹은 그보다 어린 단계로) 살았기 때문에 미성년이란 단어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떨리고 적응되지 않는다. 그런 요즘 매일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내가 초등학생 때, 내 방에는 위인전 세트가 하나 놓여있었다. 그림이 많고 글자가 커서 휴대폰이 뺏기면 자주 꺼내 읽었다. 그래서 그것들을 읽으면서 나도 남이 대신 써주는 전기의 위대한 인물로 출연하고 싶다, 고. 막연한 목표를 잡았었다. 그래서 나이 먹는 게 싫었다. 나는 매일 늙어가고 위인들의 어린 삶과는 괴리가 있었다. 중학교 2학년일 때 이 맘쯤에는 기숙사에서 혼자 엉엉 울기도 했었다. 일부러 일찍 하교에서 사람 아무도 없나 살피고, 책장 안에 들어가서 한참을 훌쩍거렸다. 그래도 기분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상황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때 영인 언니 (중3 선배)가 와서 나영아 자자, 하고 이불을 꺼내다 줬다. 선후배 위계가 제법 있던 학교였는데 영인 언니는 늘 상냥했다. 당시 친구들한테도 고민거리 하나 안 말하고, 로봇 취급 받던 내가 언니, 하고 고민거리를 얘기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나이 먹기가 너무너무 싫어, 어른이 되긴 죽기보다 싫고, 차라리 죽어서 열 다섯까지 촉망 받던 똘똘이로 기억되고 싶어, 열 다섯 까지가 내가 나이 먹을 수 있는 마지노선인 것 같아, 하고 물었었다.

그러니까 언니가 그랬다. 나도 열 다섯 까지 내가 열 다섯살로 평생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그런데 살아 보니까 열다섯보다는 열여섯이 조금 더 나은 것 같다고.

언니 말을 듣고 한 주가 지나 열여섯이 됐고 그 해 말에는 열 일곱이 되기 싫다고 지랄 염병을 떨었다. 정말 열 여섯이 꼭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걸 몇 번 반복하다 보니 결국 나이는 암 상관이 없구나 맘으로 깨달았다.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성인이 된다는 말에 긴장이 사라진 것 같다. 내가 우겨서 100살이 되어도 미성년자로 살든, 20살부터 성인으로 살든, 결국 본질은 나고, 나이는 나무 나이테 같은 역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앞으로 힘든 일이 찾아와도 이렇게 상기하려고 한다. 어른이 되어서 힘든 게 아니라 우연히 어른일 때 힘든 일이 발생했다. 이런 식으로. 어차피 점차 나를 다스릴 수 있는 고단수가 되어 가는데, 어른이 된다고 자신 없어 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조제는 그만 눈물을 흘린다. 그런 조제의 뒤편에서 호제가 손짓한다. 영감님, 그리던 날이 찾아왔는데 왜 울고 계시나요? 호제가 손을 내민다. 조제는 꺽꺽대며 숨이 넘어갈 듯 흐느낀다. 호제의 손을 잡는 조제의 손은 늙고, 바랬고, 말랐다. 유리 벽 너머로 찬 바람이 새어 들어온다. 오전의 빛이 앞서 걷기 시작한 호제와 조제를 비춘다. 모든 광경을 허탈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제제. 마침내 조제는 뛰어가고, 호제는 걸어가고, 제제는 멈춰 서 있다. 모순은 제제 앞에 남은 인간으로서의 삶이 가장 길다는 것이다. 조금 더 멈춰 서 있다가, 걸음을 옮겨도 충분할 정도로 말이다. (0917 서울예대 입시글 습작 중 발췌)

언젠가 어른이 되어서 미성년의 마지막으로 쓴 이 글을 다시 읽고 싶어 찾아왔다면 기세 좋게 응원을 해 주고 싶다.

​그리고 잊지 마. 나영. 넌 다시 웅크릴 수 없어!

다 겪어 봤잖아. 힘든 것도 아픈 것도, 우스꽝스럽고 부끄러운 일도, 상황에서 피해가고 싶다는 마음도, 열정이 배신당하는 일도, 남들보다 인정을 덜 받는 것도, 모두모두.

시간이 약이란 말은 바보같아. 시간은 감정을 중화시켜줄 뿐이야. 그걸 조율해서 하나하나 해결하고 감당한 건 너고, 그걸로 얻은 성취감과 뜨거움도 다 너의 것이야.

그걸 기억하고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 너도 무궁한 가능성을 타고났고, 이미 여러 분야에서 그걸 발휘해 왔어!!

권태로울 시간이 없어. 그걸 표출하고, 발전하고, 네 무기로 삼고, 그걸로 하고싶은 걸 하렴!!

결국 너는 아주 선량하고 곱고 욕망 있는 사람이야. 절대 절대 다시 웅크러들려고 하지 마. 만약 그런 상태에 놓였다면, 사람을 만나. 너는 혼자서 환기하기보다는 누군가와 대화하면서 자극 받고 영향 받아야 다시 쉽게 펴져.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든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든 상관없지만 진솔한 사람을 만나. 거짓을 말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을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이야. 진짜를 하는 사람을 보면서 진짜 너를 바라보고, 진짜로 사람들을 대하렴 따뜻하고 원하는 만큼 친절하게!

주변 눈은 너무 신경 쓰지 마. 언제라도 변하지 않을 네 편은 따로 있어. 유동적인 사람들에게 일일히 신경 쓰다간 진정 원하는 걸 놓칠 수도 있으니까.

너무 너무 수고 많았고 대견하다. 꼭 마음에 드는 삶을 살길. 그리고 늘 주변을 살피세요!

이제는 과거로 가는 타이머신이 백 개 개발된다고 해도 돌아가고 싶은 날이 없다. 앞으로의 내가 기대되고 긴장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참 액체 같다. 뭐를 겪느냐에 따라 쉽게 성질이 변하는 게, 얼어붙고, 녹고, 증발하고...

사회로 나가면 수많은 요구사항이 따라붙을테고 그때마다 나를 가두려는 틀도 참 많겠지만. 맞춰주는 척 결국 나의 본질은 잃지 않을 것이다. 물이 그렇듯 하나로 응고되어

나의 진심을 잃지 않고 매 순간을 살아야지.


​.

.

.

"승옥!!" 귓가에 냉철한 나사의 음성이 쐐기 박듯 박혀올 때까지 승옥은 그렇게 떠올리고만 있었다. 왜, 나사. 승옥이 눈을 돌려 시선을 맞추자 나사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무척이나 따뜻해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팔을 올려 그녀를 마주 안지도, 뿌리치지도 않고, 가만히 나사가 자신을 더 안고 있을 수 있도록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나사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나는 결국 말 밖에 할 줄 몰라. 네가 더 이상,...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승옥. 하지만 승옥이 알아줬으면 좋겠어. 나는 승옥 덕분에 행복했어. 승옥 덕분에 내가 바느질을 잘 한다는 것도, 아직도 누군가와 연애를 할 수 있다는 것도, 그리고 생각보다 춤을 잘 출 수 있다는 것도 알았어.

승옥이 이러고 있으니 꼭 눈사람 같아. 예전에 길태 씨가 그리 말하셨담서, 네가 겨울 같다고. 나는 고 말 몰랐는데, 이제 알 것 같아... 지금 네 꼴이, 꼭 눈사람 같아. 말해도 듣질 않는 눈사람... 보여도 안 보이는 척 하는...

하지만 승옥아, 너는 녹지 않아도 되어. 대신 그 안에서 걸어 나오기만 하면 돼. 그러면 내가 다시 보일 텐데,... 승옥이 하고 싶었던 게 뭔지 기억날 텐데...

그러고 나사는 승옥이 여태껏 입고 있던 파카를 억지로 벗겼다. 승옥은 저항하지 않았지만, 그 안에 또 껴 입은 스웨터 때문에 이곳저곳에 걸려 잘 벗겨지지 않았다.

나사는 그 파카를 옆 벤치에 툭 내려다 두고, 스웨터마저 흔들어 벗겼다. 그러자 얇은 검은 면티가 드러났다. 내 흘린 땀에 젖어 프린트가 말라 붙어 있었다.

이제 집에 가자, 승옥. 그제야 승옥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발걸음을 옮겼다. 부츠 두 짝앞에 샌들 두 짝, 나사가 앞장 서 승옥의 기색을 수시로 살폈다.

녹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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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하기 요령 2 - 그러니 무엇이든 예술로 쓰려고 하는 나는 쓰임새가 없겠지?

  그맘때쯤 나는 처음으로 소라껍질을 통해 바다 소리 듣는 걸 해 봤다. 한 달 전쯤 휴양지에서 주워 온 소라껍질이었다. 장소는 다른 소음이 없는 잔잔한 기류가 흐르는 곳. 껍질 귀퉁이를 귓구멍에 힘껏 욱여넣고, 눈을 감으면 마침내 싸아아 싸아아 작은 파도소리가 울린다. , 많은 시인들은 소라껍질을 작은 바다에 빗대 노래해 왔으나, 그 새벽, 홀로 난 그런 시들을 반대했다. 꼭 죽은 바다를 화장하고 피어오르는 연기를 담아둔 것 같아서.   낭만의 유효성이란. 생명이 다 한 추억ㅡ 그러나 나는 제법 많은 소라껍질들을 거느리고 있지 않나. 나는 생각한다. 더는 안부조차 묻지 않게 된 스승으로 칭할 수 있을거라 단정했단 선생들이며, 거실에 여전히 놓여 있는 오년쯤 죽은 햄스터의 빈 케이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얼글조차 가물한 짝궁에게 받은 색종이 편지, 휴대전화를 옮길 때 자의적으로 전화번호부에 부러 옮기지 않았던 수 많은 친구들의 이름, 여행 사진, 그런 것들을 *떠올린다. 어쩌면 기억에 한계가 있는 것은, 그 체취가 모두 사라지고 나면 그만, 미, 련, 을, 방, 생, 시, 켜, 새, 것, 에, 건, 강, 히, 열, 중, 하라는 암묵적인 배려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 무엇이든 예술로 쓰려고 하는 나는 쓰임새가 없겠지? *나는 자주, 흐느끼는 어깨를 감싸 쥐기는 커녕, 또 다른 *비유를 찾아내며 위로를 보류하곤 하는데. 성가실 뿐이겠지. 여전히 한 가지 언어만을 고집하는 나의 사랑은. 나도 그런 사람들을 보며 혀를 차던 때가 있었다. *싸아아 싸아아. ​ *1) 연출된 그리움, 그리워한다는 착각에 빠져 현실의 행복을 부정하기. 보란 듯이 잘 산다는 말은 슬프다. *2) 멋대로 뮤즈를 선정해 마음에 드는 글을 써 놓고는, 무례한 창작을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갈등이 생겨 공유하지 않았다. *3) 너의 속눈썹 그늘에는 그 날 해일이 내렸다. 그러나 나는 그 비가 다 그치는 동안 자리를 지켰고 그게 다였다. *4) 네가 물리적인 파도였다면. 불친절한 여름 밤바다는 종용되지 않을 한기를 품곤. 나는 그 싸늘한 한기가 내 발을 훑는 걸 꽤 좋아했다.

  • 녹두
  • 2020-07-05
추억하기 요령

  “남는 건 사진”이라는 말의 논지를 입증하듯, 나는 자주 전의 사진이나 기록을 꺼내보며 회상하곤 한다. 그때 그 장면의 감정, 감동, 환경이 주는 아득함이며 함께 있던 인물들을 향한 그리움, 그런 류의 향수. 흔히 “추억팔이”라 불리는 이 행위를 반복하며 나는 “아, 나는 과거에 잘 머무르는 사람”이구나, 하고 알았다. ​   전의 상황을 떠올리는 것이 현실에 사는 것보다 즐겁고 기꺼운 이유는, 과거의 기억은 꼭 초콜렛 상자 같기 때문이다. 상자 속에 있는 초콜렛들은 언뜻 보면 다양하고 폭 넓은 종류라서, 복합적이란 표현을 써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초콜렛”이라는 대분류 하에 같아서, 달큰하고, 단단하고, 혀에 살근살근 녹아 유희를 줄 뿐이다. 다시 말해 ‘그 때의 현재’와는 다르게 말끔하게 정제되고 가공되어 의식에 자리잡아 있다. 적당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고통과 실패담, 좌충우돌은 증발시킨 “함께”의 기억, 멋대로 맛대로 꾸며낸 감상. 이들은 전시하기에도 간편하고 알맞다. 기억이 “썰”로 전락하는 순간. 회한은 외면되지도 않는다. ​   무엇이든 양질을 선호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당연한 욕구다. 나는 온건함과 타인 본위적이 아닌 진심을 추구하고 그 가치를 높게 산다. 고로 살근 살근, 정립하여 보는 나의 추억하기 요령. ​   첫 번째, 들려주기 용 “영웅담”과 실제 감상을 분리시키지 않기. 그 당시 하고 싶었던 말과 의식 차원에 머문 생각들을 기억에 포함시키기. 과장, 생략된 추억은 동기부여는 커녕 혼란함과 이질감만을 선사하더라. ​   두 번째, 지나치게 미련ㅡ 실패했다는 생각이 드는 과거의 줄기들을 끊어내기 위해, 혹은 수습하기 위해 과도하게 애쓰는 것 ㅡ 하게 굴지 않기.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움직일 것. 과거의 판단을 고집하지 말 것. ​   또한 간단하고 피상적인 공감을 얻기 위해 순간을 공유했던 누군가들에게 기억 조각을 들이밀지 말 것. 같은 날 모두 다른 일기를 쓰는 우리들에게, 그 날 좋았지, 하고 뒤에서 뻗는 손은, 주로 “일회성 감정 공유”를 원하는 외롭고 고독한 손일 수가 있다. 고독을 맘껏 누리지 말라는 것은 아니고, 매번 안 진심인 이야기로 안 진심인 위로를 받으며 안 진심으로 나아진 척 할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   수다를 떨다 보면, “넌 돌아갈 수 있다면 몇 살 때로 돌아갈래?” 하고 시시덕거릴 때가 잦고. “아, 그 때로 돌아가고 싶다.” 중얼거리게 하는 기억 편린들도 셀 수 없이 많지만. 그러나 이것은 회상하는 자의 레토릭이어야지, 우러나온 진심이어서는 너무 슬프다.

  • 녹두
  • 2020-06-25
승화

비닐하우스는 온화를 인위적으로 조성한 공간이다. 그 장벽에 구멍이 나고, 찬 바람이 새어들어오기 전까지 한 포기 풀에 불과하였던 나는 밖의 세상을 알지 못했다. 비닐은 서서히 찢겨나갔다. 사랑으로 착각했던 어리광들은 녹아 사라졌다. 그제서야 나의 성장은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주위에는 무엇이 있는지, 뿌리는 얼마나 깊어졌는지, 야생 바람에 어떻게 해야 버텨낼 수 있게 될 것인지, 의식할 필요도 없었던 것들이 필수적이게 되었다. ​ 이것은 죽음인가? 혈관 속을 타고 들어온 본질적인 공포는 살을 뜯어냈다. 구멍 난 가슴과 몸에는 온 기운이 줄줄 새는 것처럼 전신에 힘아리가 들지 않았다. 형태를 앗아가는 신체의 변화, 마비와 분리. 그러나 기이하게도 해방감이 들었다. 아리따운 모습은 가라, 귀하게 커 간 흠 없는 잎사귀는 떨구어지고, 내게 남은 건 튼실한 줄기 하나. ​ 2019. 승화​ 전도되는 것은 물질적인 온도 뿐만이 아니었다. 사람과 사이, 그리고 시기와 시기 사이에도 전도는 이루어졌다.​ ​ 이나영 ​ 나는 연결을 체험한다. ​ 어떤 기억은 떠나가지 않는다. 삶에 자신의 흔적을 기필코 남기고야 말겠다는 것처럼. 빙빙 돌다 어느 순간 불쑥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개중에서는 의식의 영역에서 머무는 기억들도 있다.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서 간신히 붙잡고 있는, 되뇌이고 되뇌여야만 하는 사연 있는 기억들. 어떤 미련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나는 가지의 일부고 내가 포함된 나무는 집은 고향은 따로 있다는 것처럼. 그 미련 탓에 장소를 공유하고 있지 않아도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 마음 놓고 그리워 할 수 있을 만큼 유의미한 시간을 공유했던 사람들. ​ 작년은 내 올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눈이 트인 기분이었다. 평생 작년을 겪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란 직감은 과연 운명이 되었다. 유아적인 사고에 머물러 있던 나는, 어떤 삶의 형태가 옳고 그른 지 상기해야 함을 깨달았다. 우리는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실은 알고 있다. 삶의 원리는 지나치게 단순하니까. 우리가 자꾸 복잡하게 사고하고 지쳐야 하는 이유 역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그러지 않고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하다 믿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맹신에서 벗어나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고, 이상적인 내 모습을 향한 올바른 가치관을 세워 나가기 시작한 계기가 작년 한 해였다. ​ 작년의 모든 깨달음과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았다. 그 때 만든 관계들도. 두려웠다, 다시 모든 것을 알기 전으로 돌아갈까 봐.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다시 진심 없는 칭찬과 격려에 나를 의지시켜야 할까 봐. 뜨거움을 알게 되자 그렇지 않은 순간의 나는 미적지근하고, 때로는 차갑게까지 느껴졌다. 익숙해지려면 순식간에 익숙해질 수 있을 터였다. 괜찮아지려면 순식간에 괜찮아질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프기 싫었다. ​ 숨가쁜​ ​ 삼켜내기 힘들 정도로 뜨거웠던 2018년

  • 녹두
  • 2019-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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