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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종말은 올 거야 그렇지만,

  • 작성자 모모코
  • 작성일 2023-01-22
  • 조회수 1,023

-영화 <고스트 스토리>에 대한 전체적인 언급이 있습니다. 스포일러에 민감하신 분들은 조심!  사실 이 영화는 스포일러라고 할 것도 없지만요. (^^)

 

내가 중학생이었을 무렵, 이런 대화를 나눈 적 있다. 교내 북클럽 친구들과 저녁을 먹으며 나누었던 이야기다. 우리는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거창해 보이지만 뒤돌아보면 한없이 가벼워서 손에도 쥘 수 없을 것 같은 말들이 오갔다. 누군가는 죽어서 천국이나 지옥에 가게 될 거라고 했고, 그럼 영화 <신과 함께>에 나오는 나태 지옥에 가야 하냐며 우는 소릴 했던 친구도 있었다. 나는 뜀박질 잘 못 하는데, 어떻게 살아남지? 따위의 말을 하면서 말이다. 물리학과 천체를 사랑하는 친구는 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고, 그 옆의 친구는 원한이 있다면 귀신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무어라 했냐면, 그런 거 다 필요 없다고 했다. 상당히 분위기 깨는 소리지만, 그때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로봇의 전원이 꺼지면 끝인 것처럼, 우리 육체의 전원이 꺼지면 그것으로 끝이라 믿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친구가 두어 명 있었으나, 그건 너무나도 허무한 이야기 아니냐는 말을 듣고서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막을 내렸다.

 

죽으면 어떻게 되나, 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하나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죽음의 더 넓은 범주, 끝에 관해 여러모로 생각할 수 있었다. 영화 <고스트 스토리>를 만나고서 말이다. 나는 기쁨보다는 슬픔, 환희보다는 분노를 표현한 창작물이 좋다. 각각의 감정들이 대립 되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더 어둡고 아릿한 것들에 애착이 간다. 나는 작품을 읽어낼 때 나 자신을 많이 겹쳐서 보는 편이고, 또 나는 그렇게까지 밝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나는 ‘아무것도 없다니까?’를 외친 사람. 그러니까 무언갈 믿기 힘들어하는 사람이란 거다. 한때 나 또한 사람이 좋아 무엇이든 믿어 보려고 했으나, 무작정 나누어 준 마음은 역효과만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자신을 믿고 한 발짝 나가는 것도 어렵고, 타인을 믿고 사랑을 주고받는 것에도 서툴다. 그런 나의 영화 평가 앱 왓챠피디아의 선호태그를 살펴보자. 가장 먼저 #우울한, 그다음으로 #영상미, #완성도, #사랑, #ost. 취향 한 번 확고하다.

 

내 취향에 맞추어 알고리즘으로부터 추천받은 영화 <고스트 스토리>. 요즘 세상은 참 무섭고 편하다. 가만히 앉아서 내 취향에 맞는 영화를 추천받을 수 있으니까. 흑백 포스터에 배치된 것은 고스트 스토리라는 영어 단어와 표정이 보이지 않는 유령 하나. 확실히 귀신보다는 유령이 어울리는 모습인데, 무서운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나조차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두 개의 눈구멍이 난 하얀 천을 뒤집어쓴 사람의 모습이다. 물 먹은 솜 같이 생겨서 어쩐지 정감이 가고, 스틸컷으로 본 영화의 분위기 또한 물을 잔뜩 먹은 솜과 비슷할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손끝이 버석해지는 겨울에 보면 좋을 것 같다는 핑계로 미루어 두다가, 작년 겨울의 초입에 시청하게 되었고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 꽤 마음에 들었다.

 

영화 <사랑과 영혼>인 줄 알았는데 기형도의 시 <빈집>이 생각나는 영화였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작곡가인 C와 그의 연인 M은 교외의 작고 낡은 집에서 단란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C는 사고를 당해 하루아침에 세상을 뜨게 되고, C는 사망 직후 포스터에 있던 바로 그 유령이 되어 M의 주위를 배회한다. 그러나 C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M는 결국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버리고, 홀로 남은 C는 고독한 기다림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 생전 M과 함께 살던 그 집에서 말이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주목하게 된 부분은 바로 프레임이다. 화면의 비율이나 끝부분을 어둡게 하는 비네트 효과 등이 독특하다. 덕분에 캠코더로 찍은 동영상을 브라운관 TV로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는 예전에 함께했던 누군가의 흔적을 되새겨보는 느낌으로, 그래서인지 더 가슴이 아픈 영화였다. 덩달아 C가 죽은 후 슬픔에 빠져 식사를 하는 M을 어떠한 대사나 배경 음악 없이 오 분 넘게 담아내는데, 이런 긴 호흡의 영화도 색다르고 좋았다. 요즘처럼 빠른 템포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접하니 신기하기도 했고, C의 죽음 이후 느껴지는 고독한 시간이 얼마나 긴지 잘 와닿기 때문이다.

 

감독 데이비드 로워리는 허무주의적 관점에서 쓰인 지구 종말에 관한 기사를 보고서 이 영화를 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사후 세계에 대한 소재를 다룸에도 텅 빈 듯한 감성이 들어, 나에게는 인상 깊은 영화였다. 영화에서는 두 연인이 이별하고, 집이 무너져 내리고, 다시 C가 M이 남겼던 쪽지를 발견함으로써 소멸하는 것으로 만남이 있는 곳에 이별이, 이별이 있는 곳에 만남이 피어난다. 여기서 나는 니체의 근본 사상이 되는 영원회귀, 세계와 세계의 모든 것들이 반복해서 존재한다는 사상을 떠올렸다. 두 사람이 살았던 집처럼 모든 것은 고정되지 않고 언제나 변화한다. 이 변화하는 상태가 반복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덧없게 한다. 이 영원회귀사상은 니체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차라투스트라마저 무력해지고 슬퍼할 만큼 사람의 허무하게 만든다.

 

그러나 니체는 이 허무함에 멈추지 않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이렇게 말한다. 삶을 긍정하기 위하여 영원회귀를 받아들이라고. 이 순간이 무수히 반복되어도 괜찮을 만큼 지금을 사랑하고, 모든 순간에 가치가 있으니 그 삶을 긍정하라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며 계속해서 이러한 생각을 했다. 영원토록 반복되어도 서로를 사랑할 수 있을 만큼 단란한 C와 M의 모습을 보면서, 일상적이지만 그만큼 소중한 순간을 함께 채워나가는 두 사람을 보면서 말이다.

 

나는 요즘이 되어서야 ‘끝’에 대한 생각을 한다. 사실 십몇 년 살아놓고 진정한 종말을 맞이할 기회가 얼마나 있겠는가. 내 삶에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씩이라도 경험하지 않은 것보다 경험한 것들이 늘어나며, 다양한 종류의 끝을 마주하게 되었다. 우선 여러 의미에서 가장 작은 지우개에 관한 에피소드다. 친한 선배가 분홍색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사준 지우개다. 워낙 깔끔을 떠는 나를 '위해'! 선배가 바느질을 해 직접 만들어준 게 있었다. 바로 지우개 커버였는데, 분홍빛 지우개 위에 덮인 천 모양의 커버가 귀여웠다. 지우개가 크기도 하고, 지울 수 있는 필기도구를 잘 쓰지 않는 터라 세 번의 계절을 함께 맞이했다. 이전까진 책임져야 할 것이 없어 그렇게 긴장감 있는 삶을 살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겨울, 도서부원으로서, 학예부원으로서 – 주로 연말의 교내 행사를 담당한다.- , 동아리 부장으로서, 또 기말고사를 준비하는 학생으로서 여러 책임을 져야 했다. 나는 많은 얼굴을 대표했고, 여러 행사와 장소를 담당해야 했다. 이것으로 잔뜩 긴장하게 된 나는 다소 정신을 놓고 다녔다 고백한다. 그리하여 깜빡하고 학원에 지우개를 놓고 갔다. 그걸 다음 주에야 알게 되었고, 우리 학원은 방도 선생님도 하나뿐이라 어쩌면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여 학원 선생님께 말씀드리니 그런 거 본 적 없다고, 누군가 가져간 것 같다 하셨다. 물건을 잃어버린 적은 종종 있지만, 이렇게 소중하고 내내 곁에 지녔던 무언가를 잃은 경험은 처음이었다. 이 사실을 선배에게 고백하자 웃으면서 또 만들어주겠다 했지만, 어쩐지 그 지우개 그리고 처음 나에게 선물을 줄 때 선배의 마음과 영영 이별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다음으로는 중학교 1학년부터 연락하던 친구와의 끝. 신기하게도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끝이 찾아왔다. 나는 여전히 친구가 좋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해버린 취향이나 가치관에서 자꾸 어긋남이 생긴다. 큰 균열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말할 때마다 어색함이 따라오고, 더는 같은 무리가 아니게 되고, 만나도 크게 반가워하지 않는 사이가 되고, 학교 끝나고 간식을 나누어 먹던 사이가 아니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의 사이는 크게 벌어졌다. 새삼 이런 걸 겪어본 적 없어 당황스럽고, 또 속상했던 나는 그 틈을 좁히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다. 계속 연락을 하거나 공통의 관심사를 만들어 보려 하거나. 그럼에도 잘 안 되었다. 그렇게 고등학생이 된 이후 우리는 연락이 아예 끊겼다. 서로 먼 곳에 있는 학교에 배정 되었는데다 그 친구가 SNS조차 하지 않으니, 지금은 어떻게 지내나 알 수도 없다. 한동안 그 사실을 알고 괴로웠다. 미칠 듯한 기분보다는, <고스트 스토리>를 보았을 때처럼 가슴이 텅 빈 기분이었다. 소중했던 것이 자의도, 당사자의 의지도 아닌 어떠한 힘에 의해 사라졌을 때의 느낌은 새로웠다. 앞으로 이십 대와 삼십 대, 사십 대가 되며 이러한 일들을 겪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더 아려왔다.

 

마지막으로는 우리 이모에 관한 이야기다. 이전까지 누군가의 장례식장에 가본 적은 있지만, 누군가의 ‘죽음을 경험’해본 적은 없다. 그래서 죽음으로 인한 이별과 끝이 조금 막연하게 느껴졌다. 학교에서 가진 인문학 특강 시간에도 그랬다. 소설 <소년이 온다> 중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는 구절을 읽으며 아직 죽음을 경험해본 적 없는 여러분에게는 너무 먼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는 선생님의 멋쩍은 웃음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땐 나도 그저 ‘그러게요...’ 했던 것 같다. 이모의 건강은 갑자기 악화 되었고, 어떤 이가 우리의 삶에서 떠나간다는 걸 그때야 느꼈다. 이모가 떠난 뒤 남겨진 것들을 보면 여전히 이 남겨진 것을, 상황을, 세상을 믿을 수 없다. ‘헬로키티’ 캐릭터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이모가 사온 피규어부터 사촌 동생들까지. <고스트 스토리>는 비록 연인들이 주연이지만, 사랑하는 사이라는 점에서 가족과 공통분모를 가진다. 영화의 구성 면에서는 내내 니체를 떠올렸지만, 개인적으로는 계속해서 나의 이모가 생각나 눈물이 났다.

 

이러한 끝을 겪었더니, 종종 불안할 때가 많다. 필요 이상으로 뒤를 돌아보고, 주변인이 어떠한 방법으로든 떠날까 두려워한다. 또 떠나보낸 것들을 지나치게 그리워하며 후회하곤 한다. 그런 나를 <고스트 스토리>를 통해 돌아볼 수 있었다. 유령이 된 C가 M이 떠난 이후 자신의 집에 입주한 사람들에게 분풀이를 하는 장면에서도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는 새집을 샀을 뿐인 가족들에게 유령의 힘을 발휘하여 접시를 던지고 조명을 흔들며 겁을 준다. 불안한 카메라의 구도와 그보다 더 불안해하는 가족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저렇게 한다고 떠난 M을 다시 보게 될까? 당장 저 가족들을 쫓아낼 수 있어도, 내 안의 깊은 감정은 더 심화 되지 않나? 같은. 이미 내 것이 아니게 된 열망들에는 화를 내거나 슬퍼해도 소용이 없고, 후회하는 건 더욱 소용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모두가 알고 있으나 행동으로 옮기기 쉽지 않은 이 사실을, 영화를 보며 뼛속까지 새기게 된 것 같다.

 

또, 영원회귀를 떠올리며 허무해지기보단 현재를 충실히 사랑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엄마의 안녕을 지나치게 걱정하고, 친구가 나를 미워할까 두려워하며, 어떤 것을 놓고 왔을까 자꾸만 뒤돌아보는 것보단 그저 내가 있는 지금을 사랑하고, 함께하는 이들을 사랑해야겠단 결심이다. 맨 처음 말한 것처럼, 나는 나를 믿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 내가 한 선택 때문에 후회를 하게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내가 영 못 미덥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생은 선택의 순간 아닌가. 그래서 자꾸만 선택을 해야하는 삶을 사는 것 자체가 무서울 때가 있었다. 지금도 조금은 그런 기분이 들지만, <고스트 스토리>가 그 기분을 덜어낸 것 같다. 텅 빈 마음이 때로는 상실감을 불러오지만, 때로는 사람을 산뜻하게 하기도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우리는 이 상실감이자 산뜻함을 발판 삼아 내일을 살아가야 하는 것도.

 

마지막으로, 영화를 보며 모든 것에는 유한성이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유한성으로 이루어진 이 세계가 더 아름답다는 것 또한 알았다. 무한에서는 찾을 수 없는 소중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스트 스토리>를 비롯한 멋진 영화는 언젠가 OTT 서비스에서 제공하지 않을 것이기에 소중해 여러 번 봐두어야 하고, 지금 나의 옆에 있는 텀블러를 언제까지나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소중히 여겨야 하고, 나의 주변 사람들 또한 언제까지나 내 곁에 있을 수 없음을 안다. 그러므로 그들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고, 더욱 소중하게 대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여담으로 나는 여전히 죽으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가끔은 <고스트 스토리>처럼 어디선가 귀엽고 슬픈 유령이 돌아다니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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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모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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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모코

    안녕하세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글틴 사이트에 방문하며, 수필 게시판은 처음 이용해보는데요. 저는 소설, 시, 감상과 비평, 수필 중 수필 쓰기를 가장 어려워해요. 다른 세 개의 글과는 다르게 나 자신을 숨길 수 없으니까, 여러 번 투고를 망설였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글틴 캠프에서 멘토님이 격려해주신 덕분에, 그리고 좋은 친구이자 독자 그리고 작가님들을 만난 덕분에 마음을 굳게 먹을 수 있었어요. 모두에게 감사한 기분 ( ^ ^ )(_ _ ) 무엇을 쓰면 좋을까 하다가, 제가 참 좋아하는 영화를 빌려 와 엮어 써 보았어요. 수필은 처음이라 설레기도 하고, 조금 아리송하기도 하네요. 멘토님 가시기 전에 댓글 받고 싶어 쓰기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 스스로 치유 받는 기분이 들기도 했어요. 시나 감상평을 쓸 때와는 아주 다른 기분을 느낄 수 있어 기뻤습니다. 짧게 쓰려구 했는데 길어졌네요, 여하튼 피드백 주시면 감사히 읽고 적극 반영하겠습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셨음 좋겠어요.

    • 2023-01-22 01:37:56
    모모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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