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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담, 고딕, 코즈믹 호러로 보는 공포 장르 연속성에 대한 간단한 생각들

  • 작성자 데카당
  • 작성일 2023-12-28
  • 조회수 649

문학 교과서와 수업시간에 지나가듯 나오는 개념이 하나 있다. 한국문학의 연속성에 대한 개념으로 이별의 정한을 예로 들어 한국의 서정 갈래는 일제 같은 외부세력의 적극적이고 의도적인 개입에 영향을 받아 나아간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발달해 왔다는 것이다. 다른 분야에서도 일제의 비슷한 주장이 제기될 수 있는 이유에는 이러나저러나 한국의 과도기에 일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있겠으나 주제에서 벗어났으니 더 들어가진 않겠다.

 한편 한국과 비슷한 흐름을 보이는 장르문학 갈래가 있어 비교해 보고자 한다. 주로 독일과 독일인이 다수 이주해간 미국의 공포소설 장르의 흐름이고 시간순으로 진행할 것이다. 독일인들은 18세기를 전후하여 미국으로 본격적으로 이민을 가기 시작했으며 현재 미국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민족이다.

 처음은 고대가요, 설화에 해당할 민담인데 오늘날 전해지는 것은 17-18세기 즈음 만들어져 구전되던 민담을 19세기에 그림형제가 기록한 것이다. 특징은 향유층이 성인들이었기에 잔인하고 폭력적인 묘사가 가득하다는 것이며 종교개혁과 그로인해 발발한 30년 전쟁, 100여년 이후 조각난 채 서로 정복전쟁을 벌이던 당시 독일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반영한 듯 하다. 전세계적인 특징인지 비슷한 구조를 공유하는 민담이 다수이며 계모가 악역이고 주인공은 금발미인에 국왕 등 지배계층과 혼인한다는 보편적인 틀을 갖는데 구조적 아름다움은 포기할 수 없던 듯 싶다. 해당 민담을 공포문학으로 다룬 이유는 다음 내용과 비교하며 제시할 것이다.

 다음은 고전 소설에 해당할 고딕 소설로 중세 구조물 같은 괴괴한 분위기를 낸다며 붙은 이름이다. 18-19세기라는 시기를 보면 알 수 있듯 기독교적 가치관에 바탕을 두고 쓰였으며 공포의 대상은 기독교적 가치의 훼손을 극단으로까지 실행한다. 아직까지 딱 잘라 공포라고 할 정도라고는 볼 수 없을 것 같지만 필요한 요소는 갖추고 있었다.

 마지막은 과도기 소설에 해당할 코즈믹 호러이다. 우주적 공포라는 이름에 맞게 공포의 대상을 난잡하고 모호하게 서술하는 특징을 가지며 보통 공포장르를 이를 때 떠오르는 잔인한 현장보다 이해하지 못할 것에 무력하고 압도된 상황을 다룬다. 고딕 소설에 영향을 받아 쓰였을 것이지만 공포의 대상의 범위는 제한이 없다.

 그래서, 왜 민담과 고딕을 굳이 공포라는 틀에 끼워넣었는가? 코즈믹 호러에 나타난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코즈믹 호러가 정립되던 시기에 작가들은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면서도 그 세계를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았고, 분명 같은 대상일 것임이 분명함에도 통일된 명칭 등을 갖지 않는다. 민담도 마찬가지다. 같은 사람이 만든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비슷한 배경을 가지며 어떤 민담도 그 세계를 제시하지 않고 하나의 사건을 보여줄 뿐이다.

 세계 안의 인물들도 비슷하다. 코즈믹 호러 세계 안의 인물들은 혼란스럽고 미쳐갈지언정 의심하진 않는다. 단지 직면하고 받아들일 뿐이며 직접적으로 주어진 단서를 보고 주어지지 않은 세계를 상상해 미치기도 한다. 민담, 고딕도, 예를 드는 것이 편하겠는데, 개구리 왕자에서 공주는 왕자를 개구리로 만든 세계가 말이 되는지 어떤지 의심하지 않고 그저 현실의 우리가 어떤 신기한 현상을 보아도 놀라거나 충격을 받을 뿐 그것을 만들어낸 세계를 의심하고 근본적인 답변이 아닌 대충 넘어가는 답을 어영부영 받아든 채 만족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고딕과 코즈믹 호러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틀도 일정부분 공유한다. 우선 어떤 세계의 존재를 제시하고 그 세계에서 겪는 이야기를, 결말부에 반전 또는 그에 준하는 요소를 꼭 삽입한다. 이 틀은 많은 소설이 사용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특징적으로 작동하는 편이라 선정했다.

 공포감을 조성하는데도 공통적으로, 특정 조류를 제시하는데 무게를 준다. 이것도 예를 들어보자면 드라큘라는 인간미 없지만 끌어당기는, 그러나 거부감이 일게 하는 성을 제시하며 그 성에 무언가 있음을, 그 후에는 시간이 지나며 겪는 심리묘사로 독자를 성으로 잡아당긴다. 코즈믹 호러는?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모든 것을 바친 채 공포의 대상을 극단적으로 흐려놓고 작가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 처럼 수식한다.

 그 공포는 당시 사람들의, 사회의, 개인의 상상력에 기반한 한도에서 살짝 넘어간 미지를 대상으로 삼는다. 민담은 공포를 당시 사회상에서, 생부가 아닌 자의 육아에서 그리고 그들이 알지 못했던 숲에서, 고딕은 다른 나라 또는 옛 세대의 구조물에서, 밝혀내고 걷어내지는 못한 밤의 어둠과 안개에서, 코즈믹 호러는 막 제시된 현재 지표의 구조 형성 과정, 우주, 갖가지 신기술에서, 증가한 이민으로 인한 혼혈등에서 가져왔으며, 삼류 잡지같이 개인의 출판 기회 확대로 원래 사회의 기준에서 부적절한 사상을 가진 이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서 점점 개인적인 문제들로 옮겨갔다고 볼 수 있겠다.  위의 모든 요소는 사실 장르의 흐름이 판타지로 흘렀다고 했을 때 주장할 수 있는 것들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호러는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영향을 더 잘 드러내며 판타지라는 장르의 기준이 너무나 넓기에 연속성을 따지는 것은 장르문학 전체의 연속성을 따지는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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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로르의 반항

말도로르의 노래는 로트레아몽이 발표한 산문시집이다. 카뮈는 그의 책 반항인에서 반항의 역사를 서술하며 한 가지 예로 로트레아몽을 드는데 이후에 서술되는 반항하는 인간상과는 꽤나 큰 차이를 보이는 말도로르의 경우를 자신이 사용하는 반항의 계보에 둔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말도로르의 특징은 신, 즉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반감과 그에 따르는 사회 규범의 파괴이다. 예를 들어 당시 사회 규범에서의 모범이 되는 가족(명예가 있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아버지, 가족 간 예의를 지키는 현명하고 다정한 어머니, 부모를 공경하는 자식들)이 나오는데, 그 가족의 아이를 꾀어내고 마대자루에 담아 포물선을 그리게 던져버린다. 반항의 사전적인 뜻을 찾아보면 ‘다른 사람이나 대상에 맞서 대들거나 반대함'이므로 말도로르의 일차원적인 테러들을 섭리에 대한 반항으로 보고 싶을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카뮈의 반항은 아무런 숙고 없이 벌이는 무차별적인 테러와는 분명히 선을 긋는다. 이때 반항은 절대적 부정에서 변화해 일어난 행동이다. 부조리한 인간의 절대적인 부정은 모든 의미를 거부하면서도 생을 유지하려 하는데, 생을 선택하는 것에서 이미 생에 대한 가치판단을 한 것으로, 이 부조리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부조리한 인간이며 1차 대전을 통해 막 종교와 이성의 신성화에서 벗어난 유럽에서는 부조리의 추론으로 자살의 정당성을 숙고해 보는 것이 의미가 있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너무나 솔직한 나머지 절대적인 의미없음에서 나오는 살인의 정당성을 떠올리기보다 자신까지 부정해서 자살로 피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 대전이 시작되고 끝난 시기 유럽에는 부조리의 추론을 비틀어 국가적 단위의 살인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고 개인적인 숙고에서의 자살은 사실상 사라졌다. 부조리에서 도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살이 아니라 살인을 선택한다. 이것은 앞서 말했듯 반항이 아니다. 반항은 자신의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침해를 막는 것이다. 침해를 거부하는 것이며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반항할 수 있다. 따라서 반항은 절대적 거부도 파괴만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전적인 긍정이다. 가치의 인정과 거기서 나오는 보존을 원하는 긍정이고, 따라서 폭력은 가치의 보호를 위해서 필요한 가장 극단적인 수단으로써만 행해질 수 있으며 그 책임 또한 짊어져야 한다. 말도로르도 자신의 가치를 지키고 싶어한다. 섭리, 절대선 등의 것과 거기서 오는 희망을 없애고자 한다. 그런 것들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섭리가 희망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폭력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희망을 따르는 이들도 용납할 수 없다. 섭리에 대항해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섭리만을 공격하고 끝내는게 아닌 것이다. 이때 반항적인 추론은 가치를 손으로 가리는 것에서 시작해서 섭리를 밀쳐내고 마침내는 섭리를 끌어내리는 것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인간은 기준이 아무것도 없다면 살아갈 수 없다. 반항의 추론은 섭리를 끌어내고 자신이 거기에 앉는 것까지 나아가야 한다. 추론의 단계에서는 이미 섭리의 자리에 앉은 말도로르에게 섭리를 기준

  • 데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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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락과 21st century schizoid man

전락은 대화의 형식을 빌린 극에서의 기나긴 독백이다. 작가는 대화 상대역의 말을 주인공이 대신 되받아 말하도록 했고 이에 그 연극은 일인극이 된다. 일인극에서의 독백. 주인공만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전개되는 독백은 세계를 만든 사람을 고립시킨다. 그리고 자신만의 세계에서 고립되는 것은 현대인의 특징이다. 그리고 극을 정신분열로 치환하면 21세기 정신분열성 인격장애 남자다. 일단 전락을 먼저 보자. 화자는 우선 자신의 예전 삶을 털어낸다. 약자의 편에 서는 잘 나가는 변호사로 평판까지 좋아서 행동 하나하나가 좋은 의도로 바라봐진다. 그런 상황을 연기라고 하면서 일부러 이해되기 힘든 주장을 할 때 이 평판은 저주가 된다.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할 리가 없는데? 피곤한가보다! 하는 식이다. 이미 화자는 사라지고 변호사(화자)가 만들어졌다. 물론 화자는 지속적인 노력, 그러니까 지속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을 함으로써 그 변호사를 죽였다. 그러나 변호사는 만들어진 것일지라도 그의 세계에서 발판이었기 때문에 화자는 허무함을 느끼며 방탕한 생활을 했고(전락) 또다른 허무함을 만들다 보니 시간이 흘러 방탕하게 살기에는 몸이 받쳐주지 않는 나이가 됐다. 이때부터 화자는 작은 항구마을로 가서 원래보다는 한가로운 생활을 시작했는데 청자가 왔을 때 옆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화자는 과거를 말하면서 자신을 피고석에 세운다. 그리고 피고로 선 화자는 역으로 세상을 고발한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냉소는 변호사라는 직업 전반에 대한 냉소로 확장되고 자신이 구하지 않은, 다리에서 떨어진 여자의 이미지로 나타내지는 자신의 법정이 자신에게 심판을 내리는 법정으로 팽창한다. 동시대의 사고에 갇히지 않고 비판하는 화자는 물론 현대적이지만 화자가 나타내는 현대의 인간은 세상에서 떨어진 개인일 뿐이다. 화자가 법정에 서는 이유는 세상을 고발하는데 있지 성찰을 위하는데 있지 않으며 모든 과정이 화자의 세계에서 이루어진다. 법정의 틀을 마련하기 위해서 화자는 자신을 쪼개 청자를 만든다. 별개의 인격이 된 둘은 법정을 통해서 다시 한 곳에 섞여든다. 그렇게 진행된 재판에서 확장된 법정은 세계의 주인을 다시 자그마한 개인으로 전락시킨다. 두번째 전락이다. 세계에 빠진 개인은 허우적거리지만 세계에 빠졌기 때문이 아니라 형량의 증가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자신이 만든 세계이기에 사형을 언도받는 일은 없고 허우적거리던 화자는 얕은 물 위에서 공포에 질렸었다는 것을 깨닫자 다시 청자에게 밖의 세계를 고발한다. 화자가 계획하는 세번째 전락이지만 화자만의 세계는 무너졌고 밖은 미동도 없다. 무너진 세계와 무관심을 살아가는 것이 화자에게는 최후의 심판이다. 화자는 냉철한 이성의 합리적 시각으로 세상을 심판하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화자의 전락의 모티프는 최후의 심판에서 나왔으니 신앙에 기반한 시각, 신앙에 기반한, 황금률, 보편 윤리에 기반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신앙과 이성이 양립 가능하다고 보고 싶을 수 있겠지만 그런 경우는 신앙이 이성의 형식만을 따온 것이다. 이성의 공리

  • 데카당
  • 2024-04-20
자살의 밈화

자살. 스스로 죽는다. 개인적인 경험에서 지금까지는 자살을 사회 구조적인 문제, 개인의 철학적인 문제로 보는 관점만을 듣고 배우고 가져 왔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른 관점 또한 필요할 때인 듯 하다. 시작은 복제 단위로서의 밈이다. 가계를 따라 수직 낙하할 수밖에는 없는 유전자와는 다르게 밈은 가계를 벗어난 것에 더해 수평적이거나 역전되는 전달이 가능하다. 이것은 유전자가 번식기까지는 개체를 유지시키려 하는 것에 비해서 밈은 개체의 안전을 그다지 고려하지 않는 효과를 내는 결과를 가져온다. 예를 들어 가장 성공적인 밈 중 하나인 민족주의는 민족끼리 배타적인 입장을 갖게 만들어서 결국 민족국가를 침체시킴에도 끝없이 퍼져나갔고 현재까지 복제되고 있다. 밈으로서의 자살 개념을 살펴보기 전에 자살 통계를 보면 때 30대 이상 연령층에서 한순간에 수와 비율이 폭증하는 것을 근거로 자살이 유전자의 작용이 아니냐고도 생각해볼 수 있다. 유전의 특징 덕분에 번식기가 지난 후 발현되는 치사 유전자는 도태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그친다면 논의는 끝난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기에 논의는 계속된다. 자살이 유전자 차원의 어느정도 퍼져있는 표현형이라면 경험적으로 노화라는 현상에서 보듯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오면서도 그 현상의 표면적인 이유를 집어서 극복하려는 노력이 있었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 비극 같은 고전 자료에서 자살이 비극성을 강조하기 위해 쓰이고 성서에 자살을 죄악으로 적어놓은 것을 보면 자살이 어느정도는 퍼져있다는 가정은 맞지만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고 극복하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또 자살을 죄악으로 터부시하던 중세를 지나면 자살을 예찬하는 이들이 등장해 자살이 훌륭한 이유에 대해 사고하기 시작하니 이들이 자살 밈을 성공적으로 퍼뜨린 개체들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들의 자살 예찬을 유전자의 기능으로 보지 않는 이유는 해당 시기, 근대의 유명한 자살 예찬가들이 말로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삶의 방식에서 삶 또한 예찬했기 때문이다. 식사 후 플룻을 연주한 어떤 철학자와 풍성한 식사자리에서 자살을 논한 쇼펜하우어가 좋은 예시이다. 자살이 유전자의 표현형이라면 설명하기 힘든 현상이므로 밈이 개입했다고 보겠다. 탈출구, 해결책으로 던져지던 자살이라는 개념은 현대에 들어서 드디어 진지한 철학적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더이상 삶과 자살을 동시에 예찬하지 않는다. 밈의 복제과정은 유전자보다 덜 엄밀하기 때문이다. 유전자 복제는 단계별로 억제제를 갖지만 밈의 복제에 있어 억제제는 개체들이 공유하는 사회적 가치라는 또다른 밈 뿐이다. 유전자의 돌연변이는 개별 유전자에게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반면 밈은 대면이든 비대면이든 감각을 이용한 의사소통의 방식으로 복제되기 때문에 돌연변이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며 따라서 개념이 바뀐 것이다. 위의 주장이 사회, 철학적 관점을 모두 사용한다고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밈으로서의 자살과 철학적 자살, 사회 구조적 자살을 보는 관점 사이 관계를 짚어야겠다. 우선 밈에 관한 관점이 가장 근본적이다. 개

  • 데카당
  • 202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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