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틴10대 감성쟁이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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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공지]'쓰면서 뒹글' 운영 규정(2024.01.02)작성일 2023-10-23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745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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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말도로르의 반항
말도로르의 노래는 로트레아몽이 발표한 산문시집이다. 카뮈는 그의 책 반항인에서 반항의 역사를 서술하며 한 가지 예로 로트레아몽을 드는데 이후에 서술되는 반항하는 인간상과는 꽤나 큰 차이를 보이는 말도로르의 경우를 자신이 사용하는 반항의 계보에 둔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말도로르의 특징은 신, 즉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반감과 그에 따르는 사회 규범의 파괴이다. 예를 들어 당시 사회 규범에서의 모범이 되는 가족(명예가 있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아버지, 가족 간 예의를 지키는 현명하고 다정한 어머니, 부모를 공경하는 자식들)이 나오는데, 그 가족의 아이를 꾀어내고 마대자루에 담아 포물선을 그리게 던져버린다. 반항의 사전적인 뜻을 찾아보면 ‘다른 사람이나 대상에 맞서 대들거나 반대함'이므로 말도로르의 일차원적인 테러들을 섭리에 대한 반항으로 보고 싶을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카뮈의 반항은 아무런 숙고 없이 벌이는 무차별적인 테러와는 분명히 선을 긋는다. 이때 반항은 절대적 부정에서 변화해 일어난 행동이다. 부조리한 인간의 절대적인 부정은 모든 의미를 거부하면서도 생을 유지하려 하는데, 생을 선택하는 것에서 이미 생에 대한 가치판단을 한 것으로, 이 부조리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부조리한 인간이며 1차 대전을 통해 막 종교와 이성의 신성화에서 벗어난 유럽에서는 부조리의 추론으로 자살의 정당성을 숙고해 보는 것이 의미가 있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너무나 솔직한 나머지 절대적인 의미없음에서 나오는 살인의 정당성을 떠올리기보다 자신까지 부정해서 자살로 피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 대전이 시작되고 끝난 시기 유럽에는 부조리의 추론을 비틀어 국가적 단위의 살인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고 개인적인 숙고에서의 자살은 사실상 사라졌다. 부조리에서 도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살이 아니라 살인을 선택한다. 이것은 앞서 말했듯 반항이 아니다. 반항은 자신의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침해를 막는 것이다. 침해를 거부하는 것이며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반항할 수 있다. 따라서 반항은 절대적 거부도 파괴만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전적인 긍정이다. 가치의 인정과 거기서 나오는 보존을 원하는 긍정이고, 따라서 폭력은 가치의 보호를 위해서 필요한 가장 극단적인 수단으로써만 행해질 수 있으며 그 책임 또한 짊어져야 한다. 말도로르도 자신의 가치를 지키고 싶어한다. 섭리, 절대선 등의 것과 거기서 오는 희망을 없애고자 한다. 그런 것들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섭리가 희망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폭력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희망을 따르는 이들도 용납할 수 없다. 섭리에 대항해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섭리만을 공격하고 끝내는게 아닌 것이다. 이때 반항적인 추론은 가치를 손으로 가리는 것에서 시작해서 섭리를 밀쳐내고 마침내는 섭리를 끌어내리는 것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인간은 기준이 아무것도 없다면 살아갈 수 없다. 반항의 추론은 섭리를 끌어내고 자신이 거기에 앉는 것까지 나아가야 한다. 추론의 단계에서는 이미 섭리의 자리에 앉은 말도로르에게 섭리를 기준
작성일 2024-05-07 작성자 데카당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63상세보기 -
수필 조심스럽게 오래오래
보고 싶다. 가끔 생각하는 이 단어에는 애틋함이 묻어있는 것 같다. * 사랑이란 게 뭘까.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사랑은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이라고 한다. 이 정의는 우리가 넓은 의미의 사랑에 대해 생각할 때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넓은 의미라는 뜻은 좁은 의미를 포함한다는 뜻도 될 수 있을 테니. 직전 수필인 ‘자주 바쁘고 가끔 슬픈 사람이 되고 싶다’에서 언급한 그 친구를, 나는 사랑한다고 감히 적고 싶다. * 그러니까, 이 글은 내가 조심스럽게 오래오래 사랑하고 싶은 친구에 대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다소 전형적일 수 있지만 내게는 너무 소중한. * 저번 글에서는 에둘러 표현했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는... 친구와 멀어진 이유에 대해서 적어볼까. 공교롭게도 그것 또한 내가 그 친구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때 사랑은, 앞서 말한 넓은 의미의 사랑이 아닌... ‘남녀 간에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 또는 그런 일.’사실 사랑이라고 적기에는 조금 간지럽다. 나도 늘 ‘좋아한다’고만 표현해 왔고, 사랑은 더 깊은 층위의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애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겠지만. 정말 무언가... 다양할 정도로 그 애를 사랑했다. (아이, 낯간지러워라.) 대개의 짝사랑이 그렇듯이 슬픈 결말로 끝이 났고, 한동안은... 연락조차 끊겼었다. 친구로 지내기도 어려울 것 같다는 그 애의 말에 크게 상심했던 기억이 있다. 다만 그때에도 그 애는 얼마나 다정한 아이였는지. 잘못을 내가 아닌 제 쪽으로 돌리곤 했다. 직접 적을 수는 없지만 나는 그 문장에 갇혀서 한동안 벗어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멍청하게도 너는 다정한 위선자일 거라고, 그래서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일 거라고 생각하고 끙끙거리면서. * ‘첫눈에 반했다’라는 표현이 거의 들어맞을 정도로 그 친구는 첫인상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 사람이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는 게임을 좋아해’, 말하던 그 모습.너무 쉽게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보일까 봐 한참 부정했었지만. 저번 글에서 적었듯이 시를 쓰게 한 사람. 꿈을 꾸게 한 사람. 일기장 한구석에 적어놓았듯, ‘내 세계를 반쯤 만들어 놓은 사람’... 과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문학적인 과장이라고. 하지만 그 친구 덕에 나는... 취향이 많이 변했다. 사실 글부터가, 저번 글에서부터 꾸준히 언급했지만, 쓸 생각이 없었는데... 쓰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가장 큰 변화가 아니었을까. * 어찌 되었든, 지금 우리는 다시 친구가 되었다. 아주 우연찮은 기회로. * 3월 초였고, 그때의 나는 작년부터 기획한 동아리를 준비하느라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그 친구와는 항상 못 본 척, 모르는 사이인 척 지나가기 일쑤였고. 당연히 그 아이가 나를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때도 나는 그 친구가 신경 쓰였다. 이성적으로 좋아하겠다는 마음은 이미 접은 상태였지만, 그래도 어떻게 아는 사람을 모른 체 할 수 있겠는가... 싶었기 때문에. 너무 괴로운 나
작성일 2024-04-27 작성자 눈금실린더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27상세보기 -
수필 전락과 21st century schizoid man
전락은 대화의 형식을 빌린 극에서의 기나긴 독백이다. 작가는 대화 상대역의 말을 주인공이 대신 되받아 말하도록 했고 이에 그 연극은 일인극이 된다. 일인극에서의 독백. 주인공만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전개되는 독백은 세계를 만든 사람을 고립시킨다. 그리고 자신만의 세계에서 고립되는 것은 현대인의 특징이다. 그리고 극을 정신분열로 치환하면 21세기 정신분열성 인격장애 남자다. 일단 전락을 먼저 보자. 화자는 우선 자신의 예전 삶을 털어낸다. 약자의 편에 서는 잘 나가는 변호사로 평판까지 좋아서 행동 하나하나가 좋은 의도로 바라봐진다. 그런 상황을 연기라고 하면서 일부러 이해되기 힘든 주장을 할 때 이 평판은 저주가 된다.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할 리가 없는데? 피곤한가보다! 하는 식이다. 이미 화자는 사라지고 변호사(화자)가 만들어졌다. 물론 화자는 지속적인 노력, 그러니까 지속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을 함으로써 그 변호사를 죽였다. 그러나 변호사는 만들어진 것일지라도 그의 세계에서 발판이었기 때문에 화자는 허무함을 느끼며 방탕한 생활을 했고(전락) 또다른 허무함을 만들다 보니 시간이 흘러 방탕하게 살기에는 몸이 받쳐주지 않는 나이가 됐다. 이때부터 화자는 작은 항구마을로 가서 원래보다는 한가로운 생활을 시작했는데 청자가 왔을 때 옆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화자는 과거를 말하면서 자신을 피고석에 세운다. 그리고 피고로 선 화자는 역으로 세상을 고발한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냉소는 변호사라는 직업 전반에 대한 냉소로 확장되고 자신이 구하지 않은, 다리에서 떨어진 여자의 이미지로 나타내지는 자신의 법정이 자신에게 심판을 내리는 법정으로 팽창한다. 동시대의 사고에 갇히지 않고 비판하는 화자는 물론 현대적이지만 화자가 나타내는 현대의 인간은 세상에서 떨어진 개인일 뿐이다. 화자가 법정에 서는 이유는 세상을 고발하는데 있지 성찰을 위하는데 있지 않으며 모든 과정이 화자의 세계에서 이루어진다. 법정의 틀을 마련하기 위해서 화자는 자신을 쪼개 청자를 만든다. 별개의 인격이 된 둘은 법정을 통해서 다시 한 곳에 섞여든다. 그렇게 진행된 재판에서 확장된 법정은 세계의 주인을 다시 자그마한 개인으로 전락시킨다. 두번째 전락이다. 세계에 빠진 개인은 허우적거리지만 세계에 빠졌기 때문이 아니라 형량의 증가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자신이 만든 세계이기에 사형을 언도받는 일은 없고 허우적거리던 화자는 얕은 물 위에서 공포에 질렸었다는 것을 깨닫자 다시 청자에게 밖의 세계를 고발한다. 화자가 계획하는 세번째 전락이지만 화자만의 세계는 무너졌고 밖은 미동도 없다. 무너진 세계와 무관심을 살아가는 것이 화자에게는 최후의 심판이다. 화자는 냉철한 이성의 합리적 시각으로 세상을 심판하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화자의 전락의 모티프는 최후의 심판에서 나왔으니 신앙에 기반한 시각, 신앙에 기반한, 황금률, 보편 윤리에 기반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신앙과 이성이 양립 가능하다고 보고 싶을 수 있겠지만 그런 경우는 신앙이 이성의 형식만을 따온 것이다. 이성의 공리
작성일 2024-04-20 작성자 데카당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61상세보기 -
수필 [수필] 2024년 3월 월 장원 발표
안녕하세요, 김병운입니다. 수필 게시판 3월의 월 장원 발표하겠습니다. 이달에는 12편을 검토했습니다. 지난달에 이어 응모량이 많지 않았는데, 역시 봄이란 계절은 우리에게 글쓰기에 전념할 수 있는 상태 같은 건 쉽게 허락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최근 한 달간 아무것도 쓰지 못했던 저의 심신 상태 또한 어쩌면 전적으로 봄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무책임한 생각도 해보았고요.(이건 쓸데없는 소리네요…) 이번 봄은 글틴 여러분에게도, 그리고 제게도 많이 쓰지는 못했어도, 언젠가 쓰게 될 것들과 알게 모르게 스치고 엇갈리고 부딪히는 계절이었기를 바라봅니다. 이달의 월 장원 후보는 아래와 같습니다. (송희찬) (담) 그리고 장원은… 아쉽게도 없습니다. 송희찬 님의 는 낯선 환경 속에서 더욱 극심해지는 기침 때문에 위축되는 하루하루를 기록한 글이었는데요. 자신의 심신에 드리운 이상을 꾸준히 들여다보고 또 과감히 드러냈을 때만 획득할 수 있는 구체성과 정서적 울림이 돋보인 반면, 부정확한 문장과 단조로운 구성 등 글 전반에서 느껴지는 전략의 부재가 아쉽게 다가왔습니다. 담 님의 는 가독성과 섬세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문장이 특히 좋았던 글이었는데요. ‘인디’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를 찾아가는 개성 있는 사유와 애정하는 인디 콘텐츠들을 향한 진심은 충분히 전해졌으나, 중반 이후에 몇몇 노래와 작가 자신이 공명하는 지점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가면서 서술이 다소 파편적이고 피상적으로 느껴져 아쉬웠습니다. 다른 작품으로 향했던 시선이 작가 자신에게 온전히 돌아오기 전에 글이 멈춘 듯한 인상도 남았고요. 두 편 모두 성취한 지점이 또렷했지만 완성도가 못내 아쉬웠고, 고민 끝에 이달에는 무리하여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지 않기로 했습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지난 한 달간 수필 게시판에서 박서련 멘토님의 새 장편 소설 출간을 기념하여 미니 이벤트가 진행되었던 것 아시지요? 박서련 멘토님을 대신하여, 이벤트 결과를 전합니다. > 2월 미니 이벤트 댓글 백일장 결과 발표 댓글 장원 – 사즈 님 댓글 버금상 – 송희찬 님 두 분께는 박서련 멘토님의 신간 를 보내드립니다! 이번 달에도 수필 게시판에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그럼 저는 4월에 올라온 새로운 글들을 만나러 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작성일 2024-04-19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72상세보기 -
수필 버섯구이의 철학
점심에 버섯구이를 해 먹었다. 버섯은 씹을수록 향이 강해진다길래 그 향을 음미하려 잘근잘근 부숴댔다. 향은 분명히 강해졌지만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버섯구이에서 두부구이와 같은 향이 나는 것이 아닌가? 조각나는 버섯을 머금으며 그만 사색에 잠겨버렸다. 버섯구이가 두부향을 닮은 것인가? 두부구이가 버섯향을 닮은 것인가? 하지만 금방 깨달았다. 그 무엇도 서로를 닮은게 아니라는 사실을 깊은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이 무의식 속에 본심을 뱉어대듯 완벽하게 콩기름을 빨아들였다가 뿜어낸다. 제 안의 수분을 날려내고 기름으로 채워낸 기억, 씹는다는 것은 그 기억을 들여다보는 행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콩기름이란 버섯의 트라우마다. 뜨겁고 매끈한 검정 기억은 나의 미각으로, 나의 후각으로, 나아가 나의 사고로 전달되었다. 버섯과 두부에게서 트라우마를 맛보고 있던 나. 서로는 닮지 않았다. 그러나 섬세하게 느껴보지 않으면 제 3자는 모르는 법이다. 나는 줄곧 그런 차이를 모르는 채로 콩기름 향을 음미하던 것이다.버섯의 트라우마를 찾아내는 것도 사색하지 않고서야 쉬운일이 아닌데 나는 또한 얼마나 많은 타인의 트라우마를 즐겨왔는가. 타인의 어색한 웃음을 보고서 가식을 비난하고 무례한 사람을 보며 무작정 분노하고 스스로의 온정이라 생각하며 베풀면서도 그것이 부담될 것이라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영혼의 무정부 상태가 싫다 말하면서 정작 스스로는 무얼 위해 행위하는가에 대해 답하지 못하는 모순적인 자세. 나는 나의 트라우마 또한 즐겨왔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조금 서툴렀던 것은 아닐까. 나 역시 젊음의 이유로 목적론에 서투른 것이라면 말이 된다. 내가 버섯의 향이라고 생각하던 것도 두부의 향이라고 생각하던 것도 사실은 그 본질이 아니었다. 콩기름 향, 그것이 전부였다. 어쩌면 나는 버섯구이의 향도 두부구이의 향도 정확히 음미하지 못한 채 살아왔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두 맛의 근원이 콩기름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는 둘의 본질을 느낄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이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름을 적게 두르면 타거나 눌어붙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둘은 기름에 젖어 들어야만한다. 조리가 끝난 두 음식은 너무 많은 콩기름 향이 배겨있다. 나는 아무리 씹어도 버섯의 향을 알아채지 못할 것만 같다. 이것이 버섯이라고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오로지 식감 탓이지 않은가. 두부 같은 식감에 콩기름 향이 났더라면 그것이 설사 버섯구이라해도 두부구이로 믿어버렸을테니까. 아, 그들은 얼마나 많은 세상에 젖어들어야만 한단 말인가.사색을 마치고 눈을 떴다. 젓가락으로 버섯을 잡는다. 버섯은 콩기름을 뿜어내고 미끄러진다. 이번에는 젓가락으로 쿡 찔러 입에 넣고 씹는다. 기름향이 허무해 대충 씹다 삼켜버렸다. 그것이 본질이 아님을 알아챈 순간 음미의 목적도 사색의 목적도 갖지 않기로했다. 버섯을 위한 작은 애도, 혼자만의 고독한 사색이다.
작성일 2024-04-13 작성자 식빵연필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95상세보기 -
수필 자살의 밈화
자살. 스스로 죽는다. 개인적인 경험에서 지금까지는 자살을 사회 구조적인 문제, 개인의 철학적인 문제로 보는 관점만을 듣고 배우고 가져 왔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른 관점 또한 필요할 때인 듯 하다. 시작은 복제 단위로서의 밈이다. 가계를 따라 수직 낙하할 수밖에는 없는 유전자와는 다르게 밈은 가계를 벗어난 것에 더해 수평적이거나 역전되는 전달이 가능하다. 이것은 유전자가 번식기까지는 개체를 유지시키려 하는 것에 비해서 밈은 개체의 안전을 그다지 고려하지 않는 효과를 내는 결과를 가져온다. 예를 들어 가장 성공적인 밈 중 하나인 민족주의는 민족끼리 배타적인 입장을 갖게 만들어서 결국 민족국가를 침체시킴에도 끝없이 퍼져나갔고 현재까지 복제되고 있다. 밈으로서의 자살 개념을 살펴보기 전에 자살 통계를 보면 때 30대 이상 연령층에서 한순간에 수와 비율이 폭증하는 것을 근거로 자살이 유전자의 작용이 아니냐고도 생각해볼 수 있다. 유전의 특징 덕분에 번식기가 지난 후 발현되는 치사 유전자는 도태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그친다면 논의는 끝난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기에 논의는 계속된다. 자살이 유전자 차원의 어느정도 퍼져있는 표현형이라면 경험적으로 노화라는 현상에서 보듯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오면서도 그 현상의 표면적인 이유를 집어서 극복하려는 노력이 있었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 비극 같은 고전 자료에서 자살이 비극성을 강조하기 위해 쓰이고 성서에 자살을 죄악으로 적어놓은 것을 보면 자살이 어느정도는 퍼져있다는 가정은 맞지만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고 극복하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또 자살을 죄악으로 터부시하던 중세를 지나면 자살을 예찬하는 이들이 등장해 자살이 훌륭한 이유에 대해 사고하기 시작하니 이들이 자살 밈을 성공적으로 퍼뜨린 개체들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들의 자살 예찬을 유전자의 기능으로 보지 않는 이유는 해당 시기, 근대의 유명한 자살 예찬가들이 말로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삶의 방식에서 삶 또한 예찬했기 때문이다. 식사 후 플룻을 연주한 어떤 철학자와 풍성한 식사자리에서 자살을 논한 쇼펜하우어가 좋은 예시이다. 자살이 유전자의 표현형이라면 설명하기 힘든 현상이므로 밈이 개입했다고 보겠다. 탈출구, 해결책으로 던져지던 자살이라는 개념은 현대에 들어서 드디어 진지한 철학적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더이상 삶과 자살을 동시에 예찬하지 않는다. 밈의 복제과정은 유전자보다 덜 엄밀하기 때문이다. 유전자 복제는 단계별로 억제제를 갖지만 밈의 복제에 있어 억제제는 개체들이 공유하는 사회적 가치라는 또다른 밈 뿐이다. 유전자의 돌연변이는 개별 유전자에게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반면 밈은 대면이든 비대면이든 감각을 이용한 의사소통의 방식으로 복제되기 때문에 돌연변이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며 따라서 개념이 바뀐 것이다. 위의 주장이 사회, 철학적 관점을 모두 사용한다고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밈으로서의 자살과 철학적 자살, 사회 구조적 자살을 보는 관점 사이 관계를 짚어야겠다. 우선 밈에 관한 관점이 가장 근본적이다. 개
작성일 2024-04-11 작성자 데카당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06상세보기 -
수필 단두대
이제 시험도 15일이 남았다아니 단두대에 올라가기 까지 15일이 남았다시험이 다가오면 믿었던 나도 못 믿게 되고 모두가 나의 적이 된다시험이 다가오면 남의 불행을 빌어보기도 남의 불행에 기쁨을 느끼기도 한다단두대에 올라갈 준비를 한다는 건 악한 나를 마주하는 거다나는 악한 나를 마주하고 싶지 않다아니 정확히 말하면 악한 나를 마주할 자신이 없다하지만 나약한 나는 매 시험이 내 인생을 결정하는 것 같은 두려움에 악해질 수밖에 없다살아 남으려면,그 많은 사형수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난 그들의 불행을 빌수밖에 없다어떤 이들은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죽으라고 손가락질을 보낼 지도 모른다하지만 만약 그들이 진짜 단두대에 올라가 그 중 몇명만 남기고 다 사형시킨다 하면 악해지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나를 향한 신뢰와 휴식이다그치만 지금은 그 어떤 것도 누릴 수 없다쉴 틈 없이 달리고 달려 그들 사이에서 빠져나와야한다그래야 살 수 있다이제는 도망치고싶지 않다도망치는 법으로 살아내고 싶지 않다이제는 진짜 나를 숨기고 싶지 않다가짜의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는데세상에는 진짜밖에 존재 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현실은 아니었다한살 두살 먹을수록 마음의 주름은 늘어나고그럴수록 난 현실이라는 거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나는 꽃만이 가득한 거울 겉모습만 보고 자라서 거울 속을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동심에서 벗어날수록 세상이라는 벽에 많이 부딪혔다이제는 나이를 먹지 않아도 주름이 생기는 법을 알게 됐고더 엄한 단두대에 올라 갈 일은 빨리 오고있었다지금은 그나마 덜 엄한 단두대라고 할 수 있다그래도 단두대는 단두대다내 삶이 이런건 그 누구의 탓도 아닌 나의 탓이니까난 나라는 존재를 외면하고 그저 겉으로만 보이는 나에게 의존했다지금까지 어떤 일이 있었든 모든 일을 다 나에게로 화살을 돌렸다그래야 편했으니까남을 미워하기 보단 나를 미워하는 게 더 편했다그게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었고그게 내가 예쁨 받는 법이었다지금은 나를 미워하는 나보단 남을 미워하는 나만이 남았다앞으로의 나에게는 도망치는 삶은 없을 거다어떤 짓을 해서도 살려고 발버둥을 칠 거고깨진 돌이라도 붙잡을 거다두번 다시 심해 속으로 들어가고싶지 않다남은 15일 동안은 악마로 버텨내여 할 것이다부디 이런 나를 미워하지 않기를
작성일 2024-04-08 작성자 차윤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40상세보기 -
수필 나의 조금 아픈 사랑
그렇다. 내 인생은 미치도록 복잡하다. 그런데 아무도 관심이 없다. 이 복잡하고 답답한 사실을 증명해보고 싶어 쓰고 버린 내 글들과 시간이 참으로 아까울 뿐이다. 모두가 어지러운 인생, 모두가 특별해지기 위해, 위대해지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 세상에서 나 위다윗이 얼마나 특별한지 듣고 싶은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뭐, 그렇다고 내가 정말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요즘 지하철만 타도 남고딩들이 신나게 욕을 쏟아 붓는 그 “문제적” 기독교 (어떤 불특정 다수에게는 *독교이겠지만)를 독실하게 믿고, 그 신앙에 자신의 젊음을 던진 목회자 부부의 외동아들이자 어릴적부터 동성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꼈으나 그걸 억제하며 버텨온 꽤 인내심이 특출난 사람이라고 말하면 적당할 듯 하다. 참고로, 이미 보편적인 상식이지만 기독교는 동성애를 “사랑”의 형태가 아닌 인간 본성의 “뒤틀어짐” 내지는 인간행위의 “탈선”으로 규정한다. 더 나아가 가정의 가치를 강조하는 오늘날 정통 개신교 내에서 동성애라는 죄와 그 죄를 행하는 LGBTQ 집단의 사람들은 주로 공감과 긍휼 대신 극심한 혐오, 경계와 거절을 받는 대상이다. (기독교인들도 당연히 양심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대우가 노골적이다기 보다는 동성애자들은 그러한 대우를 받는 게 합당한 사람들이라는 암묵적인 동의를 하는 것에 가깝게 보여진다.) 부모님께서 내가 여성의 몸보다 남성의 몸에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을 안 것은 내가 사춘기를 시작할 즘, 초등학교 5학년때였다. 두분 모두 굉장히 속상해하셨지만 기도와 통제 속에서 충분히 꺾일 수 있는 죄의 씨앗이라고 여기셨던 것 같다. 물론 이 씨앗은 보수적인 환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성장했고 오늘날 나는 더이상 내가 남편으로 한 여자를 사랑하며 신앙안에 가정을 이끄는 가장이 되는 것을 상상할 수 조차 없게 되는 남자가 되었다. 내게는 게이라이프 아니면 독신밖에, 적어도 솔직하게는, 선택권이 없게 느껴진다. 다행히 성경은 독신라이프를 반대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서 기독교 핵심교리를 확립했던 사도 바울도 독신으로 살았다. 문제는 내가 그걸 원하는가이다. 아니, 내가 그걸 견딜 수 있는지이다. 아무리 내가 애늙은이라도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갈망은 곧 스무살이 될 나에게 다른 이성애자 젊은이들보다 덜 강하게 일어나진 않는다. 어쩌면 더 강할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에게 납득이 안갈지 모르겠지만, 난 동성애가 죄라는 명제에 동의한다. 그러나 오늘날 크리스챤들이 동성애에 대해서 갖고 있는 편견과 오해, 적대심에는 조금도 동의하지 않는다. 동성애라는 욕구는 한 남자의 한 여자를 향한 자연스러운 욕구만큼 실제이며 이 끌림은 육적인 필요를 넘어서, 한 인간의 영적, 정신적인 필요까지를 담고 있다. 동성애에 대해 말할때 흔히 내 교회 지인들은 “게이들은 온전히 성적인 욕구를 해소하는 목적으로 다른 남자들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인사이더로서 분명한 것은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도 이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상호간의 케미, 친밀감, 대상의 지적 능력,
작성일 2024-04-08 작성자 위다윗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316상세보기 -
수필 자의적 해석의 자의적 해석
문학작품이든 철학 저작이든 글을 바라보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리고 각 방법마다 꽤나 명확한 차이점을 갖는다. 문학의 예를 들어 대한민국 경기도 소재 일반 고등학교에 재학중인 학생이 내신의 어려움을 산맥을 넘는 어려움을 노래한 시에서 비유했다고 해보자. 산의 초입은 수월하기 때문에 경험이 적은 경우 완급 조절을 실패해 급하게 걷게 되고 능선쯤에서부터는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 산 하나를 넘으면 또다시 다른 산의 초입이라 힘을 빼고..반복이다. 글 내부의 정보만으로 해석할 경우 이 글은 그저 조금이라도 더 슬기롭게 산맥을 넘는 방법을 제시한 설명문이 될 것이지만 저자에 대한 정보가 제시된다면 내신 대비 방법에 대한 설명문이 문학적 성격까지 갖게 된다. 철학 저작을 생각해보자. 위의 예에서와 같은 학생이 어느 날 얻은 삶에의 시선을 시로 풀어내려고 한다. 시시포스와 바위에 대해 노래한 시는 학생의 부조리주의적인 깨달음에 대한 정보가 제시되지 않는 한 신에게 반항한 사람에 대해 경고하는 그리스의 신화를 형식이 없는 현대시로 풀어 쓴 것에 불과할 것이지만 정보가 주어진다면 경고의 메시지는 사라지고 높은 곳을 향해 계속해서 올라가는 시시포스의 행복함을 알려주며 절대적 진리인 신을 거부하고 자신의 진리를 찾아내기 위해 계속해서 좌절해도 멈추지 않는 부조리한 인간상을 제시한다. 같은 정보가 주어지더라도 사람들마다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질 수도 있다. 위의 학생이 쓴 내신의 어려움에 대한 시에서 갑은 고난의 연속이 찾아오는 고등학생의 생활에 대한 안타까운 시선을 발견하고 을은 즐거운 자기확인의 연속으로 구성된 고등학교 생활에 대한 예찬을 발견한다. 이 둘의 발견 중 어느 것을 받아들여야 옳을까? 알 수 없다. 학생은 얼마 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는데 sns 활동을 하지 않았고 일기를 쓰지도 않은 등 판단의 근거가 될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것은 자의적인 해석이다. 교과서, 시험에 가장 자주 쓰이는 방식으로 편집위원, 출제자들이 의도하는 바를 전달하기 위해 여러 해석 중 합리적이라고 받아들여지는 해석을 선택하는 것이다. 학생의 입장이라면 자신의 뜻을 멋대로 왜곡한 자의적인 해석이지만 어쩔 수 없다. 죽은 자는 말을 할 수 없고 출제자들은 권력을 가졌다. 그렇다면 글을 읽고 더 깊은 이해, 시험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감상을 원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미덕은 무엇일까? 자의적인 해석을 받아들이는 또 하나의 자의적인 해석이다. 유의할 점은 교과서, 교재, 문제집으로 공부해 정형화된 시험을 봐야 하는 사람이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자의적인 해석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연습이 요구된다. 그렇지 않은 경우 자의적 해석에의 자의적 해석은 예를 들어 이렇다. 위의 학생이 돌아가는 수레바퀴에 대해 노래한 시가 발견됐다고 하자. 출제위원 병은 이 시에 대해 수레바퀴가 의미있기 위해 계속해서 돌듯이 자신도 돌아야만 의미있게 되는 삶을 사는 것에 대해 절망을 토해내는 시라고 해석했고 출제시에 그 해석을 담은 보기를 붙였다. 시험에 나오는 작품
작성일 2024-04-06 작성자 데카당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66상세보기 -
수필 화학 일기
오늘따라 유독 상쾌하게 일어났다. 알람이 울리지도 않았는데 눈이 떠졌다. 기분 좋게 시계를 딱 봤는데 아니 글쎄 8시 반이었다! 평소보다 한시간이나 늦게 일어난 것이다. 교복을 어영부영 입고 바로 뛰어 나갔다. 정신 없이 급하게 뛰어가느라 미처 돌부리를 피하지 못하고 내 오른 발이 돌부리에 걸리고 말았다! 나의 운동관성 때문에 결국 넘어져 무릎에 빵꾸가 뚫려버렸다.. 다행히 지각은 하지 않았다. 아침조회 끝나고 바로 보건실에 갔다. 보건 선생님께서는 내 무릎에 과산화수소를 부으셨다. 과산화수소는 물분자에 산소원자가 불안정하게 붙어있다. 상처에 과산화수소를 부으면 우리 몸의 카탈라아제가 과산화수소를 물과 활성산소로 분해시킨다. 이때 활성산소가 근처 단백질을 손상시킨다. 이 원리로 소독을 하는 것이다. 보건 선생님은 그 다음에 내 무릎에 이것저것 뭔가를 많이 붙이셨다. 아침부터 이런 일이 있어서 그런지 잠이 확 깨서 정신이 맑았다. 돌부리 때문에 넘어져서 아프긴 했지만 또 그 덕에 잠이 깨서 졸지 않고 4교시까지 수업을 잘 들을 수 있었다. 돌뿌리를 마냥 미워하진 않아야겠다. 아무튼 4교시 후에 점심을 맛있게 먹고, 화장실에서 양치를 했다! 나는 불소 치약을 쓴다. 입속 세균이 산성 물질을 만들어 내는데 이 물질은 범랑질을 녹인다. 염기성인 치약은 산성 물질을 중화하고, 치약 안의 불소는 내 범랑질을 회복시켜준다. 나를 충치로부터 보호해주는 참 고마운 치약이다. 5교시는 수학 시간 이었다. 나는 암산을 정말 못하기 때문에 아주 간단한 곱셈도 하나하나 손으로 써야한다. 그래서 나는 수학시간엔 샤프심을 넉넉하게 가지고있어야한다. 샤프심은 흑연 덩어리다. 흑연은 다이아몬드와 같이 탄소로 이루어져있다. 흑연이 다이아몬드와 다른 것은 분자구조이다. 흑연은 분자구조가 판 형식으로 되어있어 쉽게 부스러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샤프심으로 흑연을 쓰는 것이다. 이번 수학시간에도 샤프심 하나를 거의 다 썼다. 아 물론 내가 말하는 샤프심 하나는 한 통이 아니라 정말 낱개 하나를 말하는 거다. 아무리 샤프를 많이 쓴다고 해도 한 번에 한 통을 쓸 정도로 많이 쓰지는 않는다. 아무쪼록 7교시까지 잘 마치고 집으로 안전하게 갔다! 오늘 하루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작성일 2024-04-04 작성자 기아햄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41상세보기 -
수필 나는 죽어가고 있다이 게시글은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를 요합니다. (폭력, 자살, 자해 등)
나는 죽어가고 있다. 한 사람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인지 과거의 망령인지 구분하기도 힘든 사람이 있다. 그는 고독 속에서 그 자신 속으로 끝없이 침잠하며 <말테의 수기> 속 말테의 말마따나 자신이 사는 현실 속에서 말라죽어가고 있었다. 말라죽어가는 과거의 망령이라니, 내가 봐도 우습다. 하지만 내가 백 년, 이백 년 전의 과거에 태어났어야 한다는 것은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자명한 사실이었다. 당장 내 책장을 봐도 현대 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10퍼센트가 채 되지 않았고 나머지 90프로를 각종 음악 서적들과 괴테, 톨스토이, 시엔키에비치 등이 사이 좋게 나눠갖고 있었다. 의자에 축 늘어져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내가 한심해 보인다고 이걸 읽고 있는 당신은 비판할지도 모른다. 비판해도 좋다, 비판은 당신의 자유이다. 그리고 애초에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모두 어느 정도는 한심하며 난 그 중에서도 더 한심하다고 여겨지는 부류이니까. 나는 책장을 향해 손을 뻗어 공책을 꺼내고 펜을 잡았다. 내 손에 쥐어진 펜의 펜촉에서 붉은색 잉크가 흘러나와 종이를 적셨다. 글씨를 쓰는 자신의 과업을 그 펜은 완벽히 완수해내고 있었다. 펜에서 흘러나오는 그 잉크-진짜 피도 아닌 것이-가 쓸데없이 비장하다. 21세기에 만년필을 쓰는 특이한 인간. 나는 내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생각하려고 애를 쓰다 그만두었다. 과거의 문물을 좋아하는 것이 비난받을 일은 아니니까 말이다. 적어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에 따르면. 불행하게도 그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라는 것은 종종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 아니, 생각보다 아주 많다. 나는 글쓰기를 멈추고 내가 쓴 것들을 바라보았다. 의식의 흐름대로 쓴 형편없는 문장들이 어지럽게 나열되어 있었다. 이런 식으로 더 써봤자 그 어떠한 유의미한 진전도 없을 것 같아 나는 발코니로 나갔다. 자정이 거의 다 되었는데도 길에는 사람이 많았다. 어딘가로 분주하게 걸어가는 그 사람들은 모두가 비정상적으로 똑같았다. 걸어가는 방향과 걸음걸이와 차림새는 다들 조금씩 달랐지만 죽은 물고기의 것과 같은 눈을 하고 로봇처럼 걸어간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그렇다. 그들은 모두 로봇같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개개인에게 역사상 가장 많은 자유가 주어졌다는 이 시대에 정작 아무도 자유롭지 않았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반복되는 노예와 같은 일상 속에서 아무도 자신이 자유롭지 않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길 건너편에 교복을 입은 근처 고등학교 학생들이 보였다. 정장을 입고 컴퓨터 가방을 든 회사원들도 보였다. 열두 시 삼 분 전이었다. 끔찍했다. 한밤중인데도 고요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풍경이, 아니 이 풍경을 만든 세상 전체가 끔찍하리만치 혐오스러웠다. 고요와 사색과 휴식은 끔찍한 세상에 밀려 쫒겨난지 오래였다.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 그 풍경들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제 몸에 맞지 않는 새장에 갇힌 새가 미쳐서 자신의 깃털을 뽑아대듯 마구 엉킨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그래, 나는 태어나면 안 되었다. 나
작성일 2024-04-01 작성자 Alicja 좋아요 1 댓글수 0 조회수 247상세보기 -
수필 4월 테제
윤리는 걸핏하면 목을 조르려 하고 높이 솟은 절벽면의 사회는 어떻게 굴러가도 지나쳐 버리고 만다. 그러니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누군가의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따라, 윤리가 학문임을 인정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도대체 어찌 생겨먹은 것이 학문이라는 이름을 달고 내 목을 조르려고 하나? 스스로 의미없는 말들만을 골라서 지껄이며 제 목에 칼을 차게 하는 것이 학문이라고? 그러고는 사회에 책임을 모두 지게 하는 것이 학문이란 말인가? 그것이 어떻게 학문이라고 불릴 수 있는가? 윤리라는 것들을 학문이라고 부르기 위한다면 전체적 공해주의라는 이름이 더 나을 것이다. 물론 윤리라는 종양을 뚝 떼어냈다고 해서 사회학에 어떤 의미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윤리의 팔을 빌려 궂은 일을 해왔을 뿐, 중요한 일들은 결국 윤리를 잠시 떼어둔 채 했다. 그리고 모두 실패했다! 어느 사회가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있었는가? 가정에 대한 견해는 모든 가정을 뿌리뽑아 햇볕을 쬐게 했다. 학교에 대한 견해는 생각없는 기계들이 돌려 생각없는 기계만을 만드는 컨베이어 벨트로 바꿔놨다. 가장 구역질 나는 국가에 대한 견해는 어느 누가 게워낸 것이든 독재의 변호인으로밖에 서지 않았다. 뭐? 역사를 보지 말고 현재를 보라고? 너무나 슬프게도 무엇하나 바뀌지 않은 것이 아닌가? 저리 치워줬으면 한다. 앞을 보니 암막에 덕지덕지 붙은 소원들은 면면이 쓰레기들이고 옆을 둘러보니 이곳이 폐수 처리시설이 아니고 무엇인가? 남은 선택지는 나가는 것과 뒤로 돌아앉는 것인데 나가기에는 출구까지 가기 귀찮으니 일단 돌아서 생각해 보련다. 되도록 빠르게 돌아앉아서 냄새까지 나기 시작한 폐수에게 관심을 끄게 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래도 남은 문제가 있다면 믿겠는지? 돌아앉은 후엔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사실 뒤쪽에 있는 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데, 돌아앉기 위해서는 어째서 돌아앉으려고 하는건지가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여기는 또다른 쓰레기들이 굴러와 성을 내며 배설한 것에 공손히 답해야 한다. 뭘 어쩌란 말인가? 보기 싫은게 있어 고개를 돌리는 것조차 다른 심오하고 창조적인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건가? 어느 누구의 두개골 속에서 그런 생각이 기어온건가! 뭐? 사명감? 문제 해결? 쓰레기들이 분리수거를 위해 아등바등 분류표를 붙이는 것이 웃기기만 한데 주석까지 붙여대니 할 말을 잃고야 만다. 우선 웃기지도 않는 완장질을 그만두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문제 해결법인데 자기 완장을 벗기는 싫으니 일단 더이상 완장을 주지 않으려는 심보만 부리는 것들. 이 쓰레기들에게 어떤 사명감이라도 있었겠는가? 대답해달라! 선긋고 틀을 잡는 것에 재미를 붙인 것 뿐인 것들이 완장질을 하는데 그 뒷줄에 있는 사람은 안된다 이건가? 역겹다, 역겨워! 나오라! 나도 그 반짝이는 구토자의 완장 구경이나 한 번 시켜달라! 뭐라뭐라 말하기는 했지만 중요한 것은 당신들과 똑같이 도피나 해보자는 것이고, 당신들과 똑같이 그 도피에 어떤 변명도 붙이지 않고 해보자는 것이다. 당신들이 만들어놓은 완장 나도 껴보고 나
작성일 2024-04-01 작성자 데카당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57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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