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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릅

  • 작성자
  • 작성일 2016-10-17
  • 조회수 3,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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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학(강대영 외)’ 239쪽 우측상단 사진 10-27

준아, 내가 아는 세상의 다른 모든 준에게는 또다시 세상에 한 사람의 준이 사라졌다고 차마 말해줄 수가 없어 오늘은   아아 그래 너의 부고는 아홉 사람을 거쳐 비로소 나에게로 전해졌구나 너에게 맞는 옷 또한 이 세상에는 부재하여 너는 존재하지 않는 몸을 공허로 감싼 채 매트리스 없는 침대 위에 뉘였다 그들의 카메라는 너의 부재를 촬영할 수 있었으나 이미 휘발하여 바람에 섞인 너의 언어는 차마 해독할 수 없었으므로 너의 육신은 기록되어지나 너의 정신은 기억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젠가 머리가 반쯤 벗겨진 교수가 되어 연단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채 말하겠지-   사진의 사체에서는 전형적인 지상시체 손괴현상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사망과 동시에 부패는 시작됩니다 부패한 사체에 모여든 파리는 코건 입이건 귀건 축축한 곳이라면 어디에나 알을 낳습니다 구더기는 자라 파리가 되고 파리가 되어 알을 낳고 알은 다시 자라 구더기가 되고 다시 파리가 되어 알을 낳고 그렇게 여러 세대에 걸쳐 구더기는 사체를 파먹어 이렇게 종내에는 뼈와 머리털을 빼곤 무엇도 남지 않습니다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그런 것입니다   준아, 내가 아는 세상의 다른 모든 준은 또다시 너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차마 너의 모습조차 알아볼 수 없어 오늘은  

  • 2018-02-19
방어흔

  …겨울이 오기 전에 미리 이별을 해두었습니다.   떠나지 못한 기억은 떠나온 기억만큼이나 아름답지 못했습니다. 당신과 함께 찾은 겨울 산을 아직 기억합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나는 당신으로부터 열두 걸음 떨어져 걸었습니다. 정상에서 하류로 하류로 하염없이 몸을 내던지는 폭포수를 바라보면서 나에게 당신은 너도 이젠 어른이 되어야지 하고 말했습니다. 채 녹지 않은 살얼음이 떨어지는 물줄기를 잽싸게 파고들었습니다. 나는 늙지 않는 나라를 찾아 떠났다는 옛이야기 속 소년의 마음으로 영원히 아이이고 싶다고 대꾸했습니다. 당신이 무어라도 대답하였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래도록 살았던 초인종이 고장 난 집에서 아직 나는 홀로 살았습니다. 나는 종종 시간의 흐름을 역행하곤 했고 대문 앞에 설 때는 오랜 버릇으로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리듬으로 문을 두드리곤 했습니다. 문 건너의 당신은 부재했으므로 나는 열쇠를 찾아 주머니 속을 헤메었습니다. 텅 빈 가정은 새벽 네 시의 버스 정류장보다도 고요했습니다. 언젠가 할머니, 나는 할머니가 없는 세상은 죽어버릴 꺼야 하고 말했던 어린 나를 아직 기억했습니다. 달은 적당히 무르익었고 밤은 적당히 깊었고 그럴 때에 적당히 뜨거운 물에 적당히 검붉어진 팔목을 담그어야 한다고 알려준 사람이 누구인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습니다.     덧) 방어흔과 주저흔은 자살과 타살의 여부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단서이다. 주저흔은 자살을 목적으로 스스로의 몸에 가했으나 치명상에 이르지 못한 자해의 흔적이다. 반면 방어흔은 타인에 의한 공격을 방어할 때에 생기는 상처이다. 이 둘은 죽음에 대한 무의식적인 저항의 흔적이라는 공통점을 지니나, 그 저항의 대상은 상이하다.  

  • 2018-02-02
폭포

  우리가 별도 달도 없는 이 밤을 걷는 건 저 검푸른 물에 모두 휩쓸려가 버렸기 때문일거야 나는 그대와 등을 맞대고 앉아 하염없이 하류로, 하류로, 몸을 내던지는 물줄기를 지켜보았던 것을 기억해.   속삭였어 있지 나는 자그마한 시냇물로 흐르고 싶었어 가만가만 노래를 부르며 논둑 사이로 춤을 추듯이 그대는 퍽이나 나이가 든 것처럼 말했어 아냐 어른이 된다는 건 저 검푸른 물에 섞여 휩쓸려가는 거야 소리 없는 노래를 부르며 움직임 없는 춤을 추듯이.   그대가 풀 먹인 저고리처럼 웃으며 아득한 하류를 바라보았던 것을 기억해. 어릴 적 보물 상자에 숨겨두었던 새파란 수채 물감 따윈 이미 시간에 내주었는걸 통행료로. 그래 어른이 된다는 건 저 검푸른 물에 새하얀 거품이 되어   우리가 별도 달도 없는 이 밤을 걷는 건 저 검푸른 물에 우리가 섞여가고 있기 때문일 거야 나는 그대와 손을 포개고 앉아 하염없이 하류로, 하류로, 팔을 내뻗는 물줄기를 올려다보았던 것을 기억해.

  • 2017-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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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 http://teen.munjang.or.kr/archives/94623 […]

    • 2017-02-20 23:24:30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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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aurie

    경상도 머스마와 가시나의 이야기인데 '칼날'과 '세 번째 서랍 맨 구석에 숨어있는 긴 밧줄'이 뭘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 2016-10-22 22:57:55
    laur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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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 그렇겠다.... '가시나'와 '머스마'는 세상의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가시나'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있고, 그래서 자살을 생각했어요. '머스마'와 '슈릅'은 가시나를 아껴주는 대상이고요.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결국 사람에게 받은 사랑으로 지워진다'..... 정도의 메세지를 담고 싶었어요. 하지만 제 표현력이 부족한지라....또르륵

      • 2016-10-23 12:2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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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정말 감사해요!!! '경상도~' 부분은 정말 다시 읽어보니까 지역적 편견이 담긴 것으로 읽힐 수도 있겠네요. 주의를 기울여야겠습니다!!

    • 2016-10-18 23:4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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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래바람

    반가워요. 글틴에서의 즐거운 활동하시길 바래요. 한글자 닉네임이 유행하나봅니다. '곧', '객' 님들이 손님처럼 잠시 들렀다 곧 가려고 그런 건 아니겠죠. 시 재밌게 읽었어요. 시를 많이 쓴 느낌이 듭니다. ‘슈릅’은 우산의 옛말, 순우리말이죠. ‘슈릅’이라는 단어와 ‘슈르릅’이라는 소리를 연결해 부드러운 어감을 만들어냈고 ‘슈릅 슈르릅을 씌워 씌워줘’라는 리듬감 넘치는 구절이 눈길을 사로잡네요. 전체적인 이야기를 끌고가면서 환기가 되기도 하고 반복적인 사용은 작품 전체의 리듬감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남녀 간의 애틋한 연애 감정을 드러내고요. 다만 ‘경상도 머스마는 절대 절대로 “가시나야 니가 좋다”라고 말하지 않는 게 규칙이야’ 부분은 미묘하게 걸린답니다. 경상도라는 지방과 머스마라는 성별로 분류된 집단의 특성을 규정지어버렸어요. 그렇다면 전라도 머스마는 “니가 좋다”라고 말해도 되는 규칙이 있는 걸까요. 여기와 저기를 구분해 나누고 한쪽으로 편협하게 구분 짓는 건, 시인의 사고와도 연관된답니다. 비약하자면 “술은 여자가 따라줘야 제맛이지” 이런 뉘앙스의 말들은 생활이나 문학에서 사라져도 좋을 것 같거든요. 어쨌든 마지막 장면은 알퐁스 도데의 ‘별’을 연상시키기도 해요. 머스마와 가시나의 애틋한 감정이 행동과 말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에 더욱 공감대가 크지 않나 싶어요.

    • 2016-10-18 13:40:05
    고래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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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생 글 써주시옵소서...(무릎 꿇는다) 흐이이익..하...쏘 스윗...

    • 2016-10-17 23:3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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