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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 작성자 별무리
  • 작성일 2024-03-30
  • 조회수 209

하나 묻겠습니다.
길 좀 묻겠습니다.
저는 눈을 뜬 지 얼마 되지 않아, 꽤 세상 물정에 어두운 처지인지라 어느 길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좁은 길로 가야 합니까.
넓은 길로 가야 합니까.

물론, 넓은 길이 맞겠지요.
사람들이 붐비는 모습을 보면 절경,
역시 저곳이야말로 많은 사람이 모인만큼,
그 인생, 삶의 발전, 발군.

아아, 역시 줄기가 얽힌 저곳, 새싹이 고개 쳐들며 꿈쩍하지 않는 뿌리와 부닥치고, 멍이 들며, 햇살이 가려져 그늘 아래서 신음하다, 결국 비열하다면 비굴하고, 영리하다면 교활하게 고목의 줄기를 빙빙 휘감으며 뱀이 되어 전진하는 길은, 마천루와 마천루의 틈새, 잿빛의 삭막한 불길에 번져 싱그러운 초목들이 황량한 잿가루 더미가 되어감에 순응하는 절차, 창문을 깨고 그 너머 숨이 턱 막힐 듯 밀려오는 하늘을 치밀하게 채운 인공 거목들의 풍광을 향해 격렬하게 포효하고 싶습니다.

넓은 길 안에는 수많은 좁은 길이 차곡차곡 포개어,
하늘 아래 가득한 좁은 문을 향해,
아득한 꼭대기를 향해,
좁은 정상을 향해, 항상, 줄곧,
이 미궁을 헤매어 길을 잃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기, 길 좀 묻겠습니다.
넓을수록 빽빽하고, 좁을수록 그늘은 짙으니,
이곳은 메마르고 메케한 벽들의 왕국,
난 당최, 이방인은 어디로든 갈 수가 없는 몸입니다.

스스로를 닦달하여 벽을 타고 악착같이 기어라니,
박정함에 모두 당연히 수긍하는 것이,
내 눈엔 조금 일그러진 것이,
태양의 눈을 피해 어둡고,
달의 눈에 띄기 위해 밝은 네온이라는
내겐 도무지 당치않은 것에
모두 눈이 멀어버린 건 아닐까,
어딘가, 길이란 것 자체가 사실,
모두가 속고 속이니 기만과 모략 위에 설립된 미망,
전부 부질없는 허무이고,
내 앞길은 까마득한 지평선처럼 보이나,
실은 거대한 벽,
길이란, 지평선이란,
그 광활한 벽 위에 내가 꾸며낸 환상이 아닐까,
그러나 난 지금,
그 잿빛의 그늘진 미궁에서 길을 잃어 제자리를 하릴없이 맴돌고 있는 듯, 조금의 발전도 진일보도 없이, 오늘도 어김없이, '매일'이란 질곡에서 허우적대며 반쯤 가라앉은 허무를 가당찮은 우울에 이글거리는 목소리로, 홀로 불이 꺼져 푸르게 고즈넉한 방 속에서 인공 빛에 기대어 노래하고 있습니다.

책하고 있습니다.
보듬고 있습니다.
당신, 나, 혹은 모두, 또 어떨 때는 아무도, 그러나 역시 나는 누군가를 미워하며, 독살스러운 시선의 태양으로부터 도망쳐, 막연히 저 별에게, 밤에 지는 별이 아닌, 아침에 저무는 별들에게, 길거리를 장악한 인공별들이 아닌, 옛 항로를 인도하던 별들에게.

그러니 다시 묻겠습니다.
하나 묻겠습니다.
길 좀 묻겠습니다.
저는 눈을 뜬 지 얼마 되었을지도 모르나, 꽤 세상 사정에 진저리 치는 서글픈 처지인지라 어느 길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괜찮으시다면 당신이 가실 길을 얘기해주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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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별무리
  • 2024-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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