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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

  • 작성자 싸물
  • 작성일 2007-12-06
  • 조회수 238

얼룩

 

 

 

  깜깜하지 않다면 떨어지지 않을 별의 눈물이 방 창문을 넘다 안개같은 형광등 불빛을 밀어내지 못하고 잊혀지는 겨울 밤

 

  사춘기를 지나는 나의 얼룩도 곳곳에 선연하게 떴다 말하자면 그것은 그녀의 까만 눈동자에 한 점 흔적으로 남고 싶은 둥근 신열, 아쉽게도 매번 팬티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해 백묵처럼 굳어버렸지만

 

  그러나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보다 눅눅했던 밤이었는데 학교 앞을 지나던 고양이의 동공에 트럭의 발바닥이 휭하니 지나갔던 것이다 길거리를 지나던 행인이 주변을 도둑처럼 헤매던 비닐봉투를 주워 그것을 치웠고 아이들은 그 자리에 분필로 고양이를 그려넣었다 사실 이것 또한 아주 옛날의 일이다

 

  어느 순간 세상은 얼룩을 지우기 위해 스스로 거대한 얼룩이 되어가는 것 같다

 

  그러므로 나는 아파트 꼭대기에 살던 시절 복도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한 켤레 구두를 멍하니 떠올릴 뿐이다 얼룩 하나 만들고 지우는 일이 생*이라지만 어느 날 아침 문득 사라져버릴, 그 희뿌연 얼룩을 찍어 누르기 위해 뭉친 어둠은 어디에 있는 걸까? 지금 여기, 수 세월의 깊이로 스며든 사랑도 거기 그 쯤에선가 제 설질을 녹여 흩어질 것이기에.

 

 

  *이병률,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의 「생의 절반」 중에서

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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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사람     숫한 보푸라기가 내리던 밤이야 나는 눈알을 파내고 그 자리에 둥근 단추를 박음질해 넣었어 그 때부터 이미 세상은 헤질 만큼 헤져있었던 거야 나는 위태롭던 모든 것을 메우기 시작했어 그녀 앞에서 울음을 틀어막았으며 어머니의 찢어진 지갑을 닫아버렸지 동의할 수 없는 것에 동의하는 법을 배웠어 흉터를 감추던 손목시계처럼 언제라도 벌어질 것 같거든 단추를 뽑아 주기만 하면 되었거든 그러므로 절대 슬퍼해선 안돼 아파해서도 안돼 눈물을 녹이는 순간 내 스스로 사라져 버릴 테니까, 지금도 차갑게 웃는 법을 연습하는 중이야 자, 나는 내 입을 찢었다 얼어붙은 웃음이 슬쩍 만들어졌다   

  • 싸물
  • 2008-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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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싸물
  • 2008-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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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싸물
  • 2008-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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