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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작성자 슈뢰딩거
  • 작성일 2013-07-06
  • 조회수 203

도가니

 

나는 너를 솥에 넣고 삶는 상상을 한다

표백제를 붓고 수십 번 눌러 빨아도

네가 남긴 발자국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건 봄의 일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일어난

그러나 이제는 모두가 아는 일

 

비명을 듣지 못한 것이 아니라

듣지 않은 것

날 찾아냈을 때는 이미 늦었다, 고 그들이 합창한다

 

다음 날 학교는 침묵으로 흘러넘쳤다

나는 루 살로메 같은 요부에서

죄없는 피해자로, 또 어우동 같은 헤픈 계집애가 되었다

 

100일이 지난 밤, 지금 나는 안다

아무도 나를 도우지 않았음을

다들 나를 부끄러이 여겼음을

내가 순결이 아닌 나를 잃었음을

 

너도

친구라는 이들도

선생님도

잊기로 결심한 나도

 

모든 죄가 흘러들어, 모여

뒤섞이고, 들끓는 이 도가니로

사이좋게 한솥밥을 먹는 사이란 걸.

슈뢰딩거
슈뢰딩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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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태우고

너를 태우고 가는 길 담장엔 때이른 능소화가 벙글고 벙글고, 벙글어   내 겉옷을 붙든 손 페달을 밟는 두 발 발밤 또 발밤   아직 바람은 차다지만 나는 봄 내음을 맡았네   이제는 겨울 내 날숨이 하얗게 흩어지고 한 사람 분 무게를 인 자전거가 위태해   소리도 없이 먼지가 되어 단지 안에 잠든 너 국화 한 다발쯤 될까, 너의 무게   잘 가 뱉지 못한 말은 이에 부딪혀 으스러지고   잘 가, 하지 못한 말이 맴돌고, 맴도는 너를 태우고 가는 길       부제 : Ride with you, Burn on you     - 친구를 보내면, 작은 단지인데 너무 무겁습니다. 위태한 것은 자전거가 아닌 '나'였던 것 같습니다.ㅎㅎ   이과를 선택했더니..ㅠㅠ 엄청나게 바빠진 탓에 글틴에 자주 못 들리네요ㅠ.ㅠ... 재밌게 읽으셨다면 좋겠어요:)

  • 슈뢰딩거
  • 2013-10-18
원예일기 2

여기 밑독이 빠진 화분이 있다 햇빛은 화분을 채우지 못하고 흘러넘치곤 한다   나는 너에게서 느리게 숨쉬는 법을 땅을 핥는 법을 해를 마시는 법을 허리 굽혀 살피는 법을 배운다   깨진 노른자 같은 태양이 발금발금 꽃눈을 피워 올리면 나는 아룽아룽 가슴이 설레어 온다

  • 슈뢰딩거
  • 2013-05-06
원예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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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슈뢰딩거
  • 2013-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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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저도 공지영 작가님의 소설이 생각났습니다. 이런 것은 늦게 쓰는 사람이 손해입니다. 저도 그래서 써놓고 책을 읽다보니 비슷해서 발표하지 못하는 시가 여러편입니다. 억울해요 흑흑ㅠㅠ도가니라는 의미는 마지막 연에 있겠지요. "모든 죄가 흘러들어, 모여/ 뒤섞이고, 들끓는 이 도가니로/ 사이좋게 한솥밥을 먹는 사이란 걸." 아주 강렬한 문장입니다. 우리는 선하고 타인은 죄인이라는 우리의 사고, 이런 사고는 이데올로기에서도 국가간의 대립에서도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우리의 흠을 보지 못하고 점점 죄를 지으며 늙어가는 것이겠지요. 최수철 선생님의 소설 얼음의 도가니도 있는데 한번 읽어보세요.

    • 2013-07-15 16:20:32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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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택석

    잘 읽었습니다. 동명의 소설을 모티프로 한 시이지만 표현 때문인지 참 새롭게(원작을 읽지는 않았지만..ㅋ;)느껴졌어요.

    • 2013-07-07 15:28:00
    권택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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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공지영 작가님의 도가니는 정말 흥미롭게 잘 읽었지만 거기서 모티프를 딴 글은 아니에요 ㅎㅎ;;

      • 2013-07-07 20:06:02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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