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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 작성자 탈퇴 회원
  • 작성일 2018-09-24
  • 조회수 377

열 살

 

나는 호기심 많은 초등학생
학교에서 문학 수업 때
선생님은 다정한 눈으로 말하셨지
경수야 네 시는 너무 설명적이구나 시는 은유적이어야 한단다
나는 가슴 깊이 새겨 들었어 선생님 말씀이니까
꼭 그대로 따라 써야 한다고

 

열 다섯 살

 

내 꿈은 시인
오늘도 나는 시를 쓴다
낙엽 한 장 떨어지는 가을 풍경 아
시심이 절로 솟아오르는구나 시는
설명적이지 않으면서 은유적이고
최대한 해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써야
좋은 시란다 그게 진짜
좋은 시란다 알겠지,

 

열 아홉 살

 

내 장래희망은 여전히 시인
사람들은 눈앞의 현실을 봐야한다지만
나는 죽을 때까지 시를 쓸 거야 시를 써서
한용운이나 신경림 같은
역사에 길이길이 기억될 위대한
시인이 될 거야 암 그렇고 말고 나는
시인이 되고 말 거야

 

스물 세 살

 

나는 우리나라 지키는 군인
험악한 김 상병님이 물으신다 야 인마
지금 뭐 하는 거야?
시 쓰는데요
시?
네 시요
지랄하고 자빠졌네. 얼른 교대나 해!
상병님이 공책을 빼앗으신다 찢어진 종이가
태극기처럼 휘날린다 나는 서둘러 일어나
교대 근무하러 나선다 연필은
버린다

 

서른 한 살

 

나는 달세 밀린 반지하방 사는 백수
편의점 라면 사다 차가운 물에 녹여 먹는다
공모전에 몇 편 접수했으니
다음 달에는 소식이 있겠지 나는
누가 뭐래도 포기하지 않는
위대한 시인이니까

 

서른 여덟 살

 

내가 옥상에서 담배 피우는데 언제 올라오셨는지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얘야,
너도 이제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해야하지 않겠니
이제 며느리도 보고 손주도 보고 싶구나
나는 귀를 막는다 어머니,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나도 다 컸어요
어머니는 조용히 물러가신다 그래그래, 알았다...

 

마흔 다섯 살

 

나는 아직도 무직자
칠 년 전 그 옥상에서
아름다운 밤하늘을 바라본다
아, 그래 시는 좋은 거구나
이렇게 달도 보고 별도 보고
구름도 보고 검은색도 보고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어머니,
어머니는 어디로 가신 걸까 다 자라버린 자식 놔두고
한 편의 시 쓰러 산책 가셨나
그래 이왕 갈 거
나도 시나 쓰고 갈까
오래전 던져버린 시
내가 쓴  시

 

쉰 한 살

 

나는 나이 든 헬스장 청소부
취직한 지는 오래됐는데 익숙하지는 않구나
구겨진 종이를 편다 글씨가 쓰여있다
시다. 내가 어제 쓴 시.

 

일흔 일곱 살

 

나는 정자에 앉았다 말없이
까마귀 본다 재수없게 생긴 까마귀다
나는 까마귀를 노려보다 가방에서
밧줄을 꺼낸다 그래
드디어 시를 쓰는구나 한번 읽어보지도 못한
내 시
드디어 한 줄 완성했다 그러자
온몸이 하늘 위로 붕 뜬다 가볍게 새처럼, 까마귀처럼
마침내 이 나이 먹어서야
시를 썼다
시를 쓴다
시를 쓰고 있다
시를

탈퇴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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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미

    안녕하세요 모로님 반갑습니다. 올려주신 시 잘 읽었습니다. 이건 합평 여부를 떠나 재미있었어요. 잘 쓰셨네요. 좋습니다. 좋아요. 그런데 시인의 인생을 왜이리 비극적으로 쓰셨어요. 개인적으로 참 슬퍼지네요. 시인의 입장에서 볼 때요 ^^ 총체적인 이야기를 좀 드리자면 사십대 오십대에는 생활은 그럴지라도 시를 쓰면서 깊어진 사고는 분명 있을 건데요. 그런 얘기가 조금 더 들어가주면 좋을 것 같아요. 일단 지금 모로님은 쏟아져나오는 말들을 받아적을 때입니다. 내용을 보니 하나씩 교정하는 것보다는 지금처럼 쏟아지는 것들을 정직하게 써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의 시가 더 기대됩니다. 모로님 좋은 작품 감사합니다 계속 기대할게요 ^^

    • 2018-10-04 22:42:05
    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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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이수안

    잘 읽었어요. 한 사람의 생애를 시적으로 압축해서 표현한 점이 신기(?)하네요. 전 시에 문외한이라...특히 말미에 시를 강조하는 부분이 좋아요

    • 2018-09-30 23:34:31
    최이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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