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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한 삶

  • 작성자 청울
  • 작성일 2019-04-15
  • 조회수 280

당신은 직교라는 단어에 대해 수학적 의미와 국어적 의미를 부여했고 수학적 의미의 직교에만 기생하길 원했다 그것은 당신이 도導함수의 도와 무인도島의 도를 헷갈리며 시작된 일이다 당신 이름의 도島는 종종 쓸쓸한 고요를 지녔으므로 당신은 도島와 같은 삶을 살았으므로 어쩌면 당신은 도導와 같은 삶을 살고 싶어 했으므로,

(밟아온 길과 밟고 싶은 길의 피부가 같다면 헷갈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아버지, 저는 평생 헷갈리는 도 씨가 되겠습니다 해저에 발을 묻고 사는 삶과 사람도 연인도 이끄는, 헷갈리는 그런 도 씨요)​

윗집 도 씨 아재는 그랬다 해저에 뿌리를 내려 물 위에 우두커니 섰다 혼자 열매를 피울 수 있지만 먹지는 못했다 아재 머리 위엔 열매를 전부 먹는 탕자 여인과 그 아들이 있었으므로 아재는 그때도 헷갈리는 도 씨였지만 우뚝 선 섬처럼, 아재가 발을 빼기까진 천 발자국이 더 남았으며,

(돈만 벌어오면 부인이 다 까먹는다면서요? 돈만 벌어오면 아들 놈이 가져간다지요?)​

윗집 도 씨 아재는 그렇다 묻어둔 발을 들어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열매는 없지만 탕자 여인도 없었다 아들은 탕자 여인 옆에 있었는데 발을 옴찔옴찔 아버지, 아버지, 아재는 쿵쿵, 쿵쿵, 철퍽하고 뭍으로, 아재는 헷갈리는 도 씨를 그만두었다 도島를 버리고 도導를 이마에 떡하니 세웠다 이제 도 씨 아재는 쓸쓸하지 않아, 아재는 이브를 만났거든

당신은 여태껏 그랬고 앞으로도 그러겠지 탕자를 따라갔다 온 아들과 마천루의 이브와 평생을 걷겠지 어린 이에게 수학적 직교를 가르치는 은사가 되겠지

(밟아온 길과 밟고 싶은 길의 피부가 같다면 헷갈려도 좋다고

길의 끝을 헷갈리지 않는다면 그래도 좋다는 얘기다,)​

아재는 도도한 길을 걷는다 피부가 같으면 뭐하냐고 우린 그 핏줄을 들여다보아야 되지 않겠냐고.

*

¹島 : 섬 도

²導 : 이끌 도, 인도할 도

청울
청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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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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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울
  • 2022-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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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울
  • 2022-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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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병국

    안녕하세요, 청울님. 늘 흥미로운 시를 올려주시네요. 잘 읽었습니다. 제가 수학에는 정말 문외한이라 검색을 하게 되네요. 그랬더니 시가 수학적 의미의 직교 혹은 도함수적인 측면은 잘 보이는데 무인도의 섬은 어떻게 해서 파생된 것인지 의문이 남네요. 경제적 관점에서 교차하는 도씨와 여자/아들의 의미는 형성되고 그러한 도씨를 섬과 같은 존재로 형성했다고는 보이나 그것을 국어적 의미의 직교로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국어적 의미보다는 수학적 의미에 기생하는 존재에 주목한다 하여도 말이죠. 그런 이유로 “도島를 버리고 도導를 이마에 떡하니 세웠다”는 표현은 도씨의 의지적 측면에서 아이러니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다만 시의 주 대상이 당신인지 도씨 아재인지 불분명하여 시적 화자의 위치가 어디에 놓여 있는 것인지 모호하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마천루의 이브’도 마찬가지이고요. 수직과 수평의 교차를 위해서라도 그 두 개의 이미지가 시 안에 첨가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마천루의 의미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어쨌든 조금만 고치면 아주 좋은 시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 2019-04-17 15:41:05
    이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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