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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한 시간

  • 작성자
  • 작성일 2019-07-08
  • 조회수 419

연달아 수음을 하다 지쳐 잠든 날은 꿈을 꾸지 않았다

만성적인 비염 산 채로 질식해 가던 날들 머리를 쪼개 찬 물에 헹구고 싶었다 코 안에 고인 피를 아래쪽에 보내려 안달하던 밤들이여,
이불은 땀에 젖고 몇 장의 나뭇잎으로 바닥을 쓸던 날들의 추함을 기억한다 습기 찬 방에 구르는 돈벌레, 교회 화장실에서 울며 힘을 줄 때 스피커에서 울려퍼지던 찬송가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내 죄를 정케 하신 주 날 오라 하시네...

눈물로 회개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죄 지으러 떠나곤 했습니다 지나가는 행인을 붙들고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괜히 성당 주위에서 서성거리다 다 지나간 하루, 버거워서 중도포기한 글자들이 달려들던 날에는 방문을 걸어잠그고 수음에 열중했다 흘러내려간 씨가 어느 하수도의 쥐새끼를 잉태시키는 꿈을 꾼 날 아아, 차라리 양도하고 싶던 목숨이여

늦은 밤 기숙사로 가기 위해 잡아탄 지하철은 속절없이 비틀거렸고 길고 긴 창자를 통과하는 듯 구불대던 시간들 몇 개의 융털이 산들거리는 동안 정신을 잃고 종점에서 배설되곤 했다, 길가에서 버스정류장에서 거미줄 낀 대합실에서 몇 번인가 눈길을 끄는 여성들이 있었다 뒤돌아볼까 하다 도망치듯 옮기던 발걸음 방 안에서 마구잡이로 쓰던 연애 편지들 사랑은 거미줄 낀 대합실에 걸린 사절지 달력처럼 부끄러운 줄 모르고 다리를 벌렸다 시선도 마주치지 못한 채 웅얼거리던 단어들은 입 속에서 썩었고 나는 왜 이 모양인가, 창문을 열어도 풍기는 악취 사상의 피고름을 꿀럭꿀럭 게워내곤 찬물에 머리를 박았다

어느 동네에서나 발 붙일 곳 찾을 수 없었다 몇 년을 살다 충동적으로 떠난 뒤 돌아와 보면 남의 일처럼 낯설기만 했다, 친구들은 살 길을 찾아 떠나갔고 제각기 구덩이를 파고 기나긴 겨울을 견뎠다 사람이 궁금해 철학을 공부하는 친구가 새벽에 취한 목소리로

야, 너 신을 믿니, 신은 죽었다, 니체가 진작에 죽여버렸다구, 근데 니체는 매독에 걸려서 미친 채 죽었으니까, 결국 니체는 신을 죽이구, 신은 니체를 죽여버린 거지, 듣고있냐, 듣고있냐구 이런 씨...

전화를 끊고 나서 니체와 친구를 위해 기도해볼까 하다 그냥 잠들었다 그런 일이 있었고 지나고 나면 그런 일이 있었던가, 남의 일처럼 낯설기만 했다 오래 헤어졌다 다시 만날 때의 어색함이 싫어 차라리 영영 못 만나길 바라던 인연들이 있었고 그중 일부는 정말로 영영 만날 수 없었다, 자꾸만 입 안이 썼다 물을 들이켜도 목이 말랐다

밤거리를 걷다 보면 어느새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 혹은 누군가를 쫓는 듯, 어두운 골목에서 자꾸 이상스런 얼굴들이 헤죽거리고 점멸하는 가로등이 손짓하는데, 공터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누군가는 개똥 위에 박힌 호박씨를 빼먹으면서 자유를 찾아 남으로 오는 밤 자유는 개똥 위의 호박씨만한 가치라도 있는 것이었을까 왜 너는 나일 수 없는지, 외로웠다 외로웠다, 침몰하는 스물이여 종로에서 뺨을 맞고 한강까지 돌아오는 길 강물은 도시의 빛을 먹고 무엇을 뱉는지, 외로움의 기슭에서 바스라진 나날들이여

텅 빈 방에 기대 울컥울컥 액을 토하고 쪼그라든 음경처럼 고개를 숙일 때 말라붙은 나뭇가지와 터진 음식물 봉투 틈새에 몰리는 파리떼를 생각한다 왁자지껄한 축제 소리가 들리고 젊은 남녀들이 부둥켜안고 살을 비비는 동안에도 웃을 수 없었다, 그 모든 몸짓을 언젠가 설명해야만 한다 구토감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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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9-16
새의 시체는 왜 혼자 남는가

  Monologue. 떼로 다니는 것들이 가장 외롭다   Act 1 어젯밤에 또 하나가 추락했다 떼 안에 있다가 떼를 떼어놓고 새가 되는 순간 어김없이 곤두박질치는 혼자 지기는 너무 무서운 존재의 무거움을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Act 2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끝까지 너는 너였을 뿐이라는 것 다 식은 커피를 맛있게 마시는 일처럼 우리는 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암묵적으로 웃을 것이다 입꼬리에 경련이 날 때까지 서로의 등을 두드리면서 웃다가 돌아서면 생경한 얼굴, 불쾌한 예감   Interlude 가끔 이 세상이 이렇게 얇은 끈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 놀라울 때가 있다 책을 사기 위해 돈을 인출할 때 급히 학교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아탈 때 뜨끈한 국물을 마시려고 지저분한 포차에 앉을 때, 나는 사람들이 이렇게 단순한 것들에 기대서 산다는 것이 불안해진다 곳곳에 거미줄이 쳐져 있고 그걸 피하기 위해서 고개를 깊숙이 숙여야 했다, 몇번이고 태풍이 불었지만 거미줄은 누나의 치맛단을 옭아맨 도깨비풀처럼 전신주에서 가로등에서 골목과 골목 사이에서 타일과 돌담 콘크리트 틈새에서 날아가지 않았다 모두 흘끔흘끔 눈치를 보면서 뜨거운 국물을 급하게 마셨고 포차 입구가 펄럭이는 동안 털이 부숭부숭한 거미 다리가 아파트만큼 커다래 보였다 재수없는 취객이 거미줄을 밟고 꺽꺽 소리를 내면서 체액을 빨리는 동안 사람들은 무리지어 도망쳤다, 나는 아니라고 믿으면서 도망쳤다 그것이 우리의 보호색이었다 그럴 때마다 새들이 북동풍을 피해 날아드는 것을 보았고 그들 중 대부분이 촘촘한 거미줄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잦아드는 울음소리 무리를 지어도 각자 떨어야 했다   Act 3 Improvisation 뒤통수가 정말 뒤에 있습니까,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을 나는 존경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앞에 가는 사람의 뒤통수만 보고 자기도 그렇겠거니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날 문득 뒷머리를 쓰다듬던 사람이 거기가 사실은 텅 비어 있고 그 깊은 구멍에서 자기가 줄줄 새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는 날, 또 새는 추락할 것이고 남은 사람은   Catastrophe 알게 될 것이다 무리지어 날던 새는 어디로 가서 죽는가 새의 시체는 왜 혼자 남는가를   Fade Out.

  • 2019-09-08
Jo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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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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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병국

    안녕하세요, 독님. 오랜만에 뵙네요. 반가워요. 시 내용이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은, 제 오해가 아니겠지요? 서사 구조를 취한 시여서 읽기에는 부담이 없었는데 어쩐지 80년대 후반 B급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자꾸 드네요. 시적 화자의 행위가 딱 그때쯤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서요. 물론 지금도 어느 곳에서든 만날 수 있는 인물일 수도 있겠지만요. 그런 점에서 익숙한 행위가 과잉된 정서를 안고 전개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요. 과연 저 문장 들 속에서 시라고 할 만한 부분이 어디에 있을까 고민하게 되고요. 진한 자기 감정을 토로 하고 있는 화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 구체적 행위와 감정들을 좀 덜어내고 그 사이사이에 여백을 주는 건 어떨까요. 한 템포 쉬어갈 공간을 마련해주는 방식으로 시를 퇴고했으면 합니다.

    • 2019-07-10 15:24:10
    이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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