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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꾼과 비둘기(퇴고)

  • 작성자 파판
  • 작성일 2020-09-30
  • 조회수 166

형과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손을 흔들었지, 파란 불이 되기 전까지

나 오늘 다리 한쪽이 뜯긴 비둘기를 봤어,
형은 날씨가 무덥다고 했다

더운 날엔 한쪽 다리 정도는 내줄 수 있어
신발이 발명되지 않은 세계에선 자신도 그랬을 거라고
형은 보도블록 색깔을 맞춰 걸으며 웃었다

거짓말과 허세가 만연한 날이야
내가 내가 형을 사랑해서, 이 모든 건 형의 뜻이어서
뜨겁고 따갑고 달아오른 바깥에 나온다
흥분된 상태야, 형을 만나면 실컷 욕을 내뱉을 수 있을만한

형은 횡단보도에 선 사람 아무나 가리키며
10년 안에 죽을 거라고 했다
예언은 주로 사기꾼의 것인데 형은 잠시 거짓말쟁이가 되고
나는 불규칙적으로 보도블록을 밟으며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했다

형, 다리 하나 없는 비둘기는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직 파란불인 신호등은 언제 빨간불이 될까
원래 사기꾼은 그런 것 모른다며
탕탕, 거짓말을 들킨 아이처럼
손을 총 모양으로 만들어 나를 쐈다
저격당했다
나도 10년 안에 죽을 것이다

내일은 진실만을 말할 것
형에게 죽임당하지 않을 것

빨간불이 됐다
이미 건넌 횡단보도는 필요 없는데 아쉬웠다

길에서 또 다리 한쪽 없는 비둘기가 보였다
형은 신발 한짝을 벗어줬다
이게 나의 자비야,
웃겼다

파판
파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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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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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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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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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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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0-04 23:15:08
    이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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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판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 2020-09-30 22:34:47
    파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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