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틴

부끄러운 얼굴을 가려라.거울 마주 보지 못할 얼굴을 가려라.내가 사랑하지 못할 얼굴을 가려라. 계속 지워라.사진과 그림과 글과 또 다른 무언가를계속 지워라.언젠가 사라질 그 얼굴을먼 시간이 흘러 다시 찾아보고 싶어질 때다시는 못 보도록 지워라. 그저 사랑하지 못할 얼굴이라면 그렇게 가리고 지워라.존재를 부정해라. 하지만 그 끝에는 나의 현재가 있었다.내 마지못해 사랑하는 얼굴이 있다.내 마지못해 사랑하게 된 얼굴이 있다. 결국 내가 부끄러워하던 것조차내가 사랑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발판이었다. 미처 버리지 못한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림을 바라보았다. 글을 바라보았다. 또는 다른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바라보고만 있었다. 버리지 못할 것이다. 버리지 못한다.,버리지 못한다. 그러니 나는, 그 미숙한 것을 사랑한다.나도 그것을 사랑한다.어린 것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사랑할 것이다.

• 피리명이
• 2023-06-24

돌돌돌, 돌돌돌,연필 깎는 소리.증기기관차 본 딴 연필깎이가 제 일을 하는 소리. 점점 짧아지는 연필과뾰족해져 찌르면 아픈 연필심이마치 송곳처럼 변해가는 것 같아. 짧고 날카로운 송곳짧고 날카로운 연필 연필 아래를 타고 내리는 격정의 강물이하얀 종이로 폭포처럼 흘러내린다.그리고그리고또 다시 흘러가이내 바다가 된다.이내 바다가 되었다. 바다에 녹은 것은 짧지도, 뾰족하지도 않았다.호수가 담아내기 힘든 것이 바다로 흘러가니 나의 호수도 잠잠하다. 그냥 그렇게호수가 감당하기 힘든 것을 바다에 나르다 보니어느 순간 바다가 쌓였을 뿐이다.

• 피리명이
• 2023-06-24

가랑비 내리듯 울긋불긋 내리는 것은 나의 눈물. 여우 같이 나를 홀렸던 것은 구름 위로 사라져이제 볼 수 없는 햇님아. 바람 한 점 없는 습한 날씨나를 불렀던 목소리도 물기에 젖어 스러졌으니이제 누가 나를 찾으리오. 악몽 같은 꿈속에서 나타난 것은 구김 없는 나요.현실에서 나가고 싶어 하는 나요.기어코 꿈이 꿈이라는 것을 알아채버린 나요. 쓰지 못하고 내버려둔 하얀 화선지에 떨어진 먹물을 지우고 싶어소매로 지우려다 오히려 더 번지고 말았네. 연필은 지우개로 지우면 되고,볼펜은 화이트로 지우면 되는데먹물은 어찌해야 할까. 결국눈을 내리감고 꿈만 꾸는 내가 있을 뿐이지.

• 피리명이
• 2023-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