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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함이 우리의 미학!

  • 작성자 오월 숲
  • 작성일 2022-05-15
  • 조회수 329

야, 한 발짝 내디딜 때 원을 그려봐
창백한 계절이 지루하다는 말, 기억나?
한 발짝 또 내딛고 숨을 쉬어 봐
다 낡아버린 넓은 호텔의 침실용 탁자가 보여?


거미줄로 메워진 현관문을 보고 감탄할 때, 곁에 서서 '이건 시간으로 메워진 거야, 거미줄이 아니라' 고 말해줄 사람 하나 없이 투박한 길을 걸어보자!

음..그리운 녹음은 반년 후의 일이고
그리운 바람의 습도는 몇 달 후의 일이지
초록색 빈 유리병이 가득 쌓인 뒷마당도 나 말곤 올 사람이 없거든..
책을 펼쳐 떠다니는 문장들 사이에는 얼음이 녹아 밍밍해진 콜라가 있고, 흐드러지는 봄 나무가 있어
커튼 뒤에 숨을 순 없을까?
언제나 나를 따라다니는 마음이 버거워서.

물.
그래 물!
소금 내음 가득 섞인 비릿한 바닷물 말이야. 낭만 같은 건 없어도 돼!
이제 우리는 날것의 아스팔트와 흰 하늘 아래서 책장을 헤엄쳐보자


가끔은 텅 빈 원통모양의 길로 끝없이 들어가구요
그곳엔 아무것도 없어서 나의 외침이 크-게 울려요

누구는 이 길을 보고 이렇게 말해
다 벗겨진 저 페인트 칠 좀 봐, 초라하다-라고.

초라함이 우리의 미학! 그렇게 이름 붙여보자
사실 난 미학 같은 거, 필요도 없는데.
한 발짝 내디딜 때 구름으로 메워진 흰 하늘아, 울지 마!

오월 숲
오월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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