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넋두리

  • 작성자 별무리
  • 작성일 2023-12-31
  • 조회수 639

거추장스러운 짐을 주렁주렁 달고선 한 발짝.

그러나 곧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에 몇 개를 덜어놓고선,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잘 있거라, 밋밋한 위로의 말을 남기곤 또 한 발짝.

허나 갈팡질팡하며 우두커니 선 채 또 뒤를 돌아본다.

몇 번씩이나, 시퍼런 입술을 깨물곤 형제 모두 훨훨 어연번듯하게 날아가나 좁아져 버린 둥지에 홀로 처연히 남겨진 우둔하고 미련한 새처럼, 울상을 지은 채 도저히 돼먹지못한 표정으로 짐들을 향해 미적지근하게 손짓한다.

그러나 이 잠깐이 소모된다는 사실에 편집적인 갈증을 느끼며 씩씩거리는 뒷모습, 분개하는 새, 스스로의 게으름은 곧 와룡이란 변명거리로 포장될 뿐, 전혀 변변치 못한 문필가, 아니지, 아니야. 너무 부끄럽다.

스스로 '문필가'라니.
쇼펜하우어에게, 나쓰메 소세키에게, 다자이 오사무에게, 나카지마 아쓰시에게, 헤밍웨이에게, 카프카에게, 도스토옙스키에게... 아무튼 그들에게 면구스럽고 죄송스러워 내려간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이대로 날갯짓을 해야 하니, 어른이니 돈을 벌어야 하니, 경제는 어떻다니, 정치는 노상 글러 먹었지, 수학은 공식이지, 영어는 요령부득, 국어는 늘 의문투성이뿐, 내 사색과 또렷하지 못한 이단 같은 사상은 세상에 녹아들지 못하며, 그저 마이동풍 따위다.

역시, 날갯짓은 폭풍을 몰고 온다. 그런 관점에서, 난 평화주의자로군. 나의 성공이 어느 부분에선 필패, 어린아이의 치기, 여전히 놓지 못한 욕심, 태양의 심술 탓으로 돌리고 달님에게 기도한다.

허나 달이 뜬 세계에서 깨어 있는 자들은 이해받기를 포기해야 한다. 모두 태양의 신도, 나는 이단자. 달님은 침묵을 즐기시나 보다, 틀렸다. 이미 알고 있지 않나. 태양은 별이고, 달은 한낱 위성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별에게 빌어야 하겠으나, 주위를 둘러보라. 인공별이 거리에 빼곡히 즐비하니, 철수, 어두컴컴, 달님은 외로우시다.

아아. 밤을 이해해 주실 임자는 어디요.
나의 짐은 그대들의 짐과 비교하여 확연히 가벼울지 모르나, 난 고작 한 발짝 내딛기도 두려울 만치 버겁다. 혹여나 버려도, 경박한 비소로 묵살하지 못할 죄책감이 등줄기를 기어다닌다.

나는 머무른 바람. 굳은 강물. 우매한 새. 방치된 작품. 망각된 활자.

쓸모는 미신이다. 허나 조용히 움츠려 쓸모에 맞물리지 않는 사람에게 죄악이라니.

애시당초, 짐승에겐 선과 악이랄게 없으니, 잘못된 건 인간이 아닌가?

이런 말을 해보았지만, 멸시받는 건 나다.
허무주의, 데카당, 그런 것들로 간주하곤, 골칫덩어리 취급이지. 나름 필사적으로 해명해 보지만, 틀렸다. 땅, 땅, 땅. 망치 소리가 울리며 난 이미 사춘기, 어딘가 이상한 애, 설득은 무슨,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이윽고 적적한 무표정.
혹여나 굴복하면, 비굴하게 웃는 얼굴로, 물론 이의 없다를 연거푸 외치고, 가늠만 해도 끔찍하군.

혀를 가볍게 찬다. 역시, 이런 생각은 지친다. 이야기를 이어가야 하는 형편의 내가 책임은 내치고 이따위 글을 쓰고 있다니, 또 한미한 죄악감. 아아, 인간이 없다면, 짐승이라면, 하지만 그건 자유일까. 새장. 새장. 둥지란 새장인가.

또 건실하지 못한 말씀을.

미안하다, 미안해.

어디 보고 얘기를 하는지 모르나, 거기는 벽입니다.

아, 곤란하군. 난 태생이 이러하거든.

아니요, 당신은 후천적인 겁니다. 그저 호기심에 일신을 위임하였다가, 노한 신께서 신벌을 내리신 거죠.

그럼 난 누구를 탓하면 되는가?

또, 그 소리를. 날지 못하는 건 순전히 본인의 탓입니다. 이만 인정하시지요.

으으.
진저리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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