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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틴을 졸업하며

  • 작성자 백산화
  • 작성일 2024-04-06
  • 조회수 98

생일은 2월이지만 이제야 글을 쓰네요.
늦었지만 졸업? 인사 드립니다.

활동을 거의 안 한 지라 저를 아시는 분은 없겠지만.. 혼자 남몰래 글틴에 들어와 여러 위로를 받았던 만큼 마지막 인사는 남기고 싶었습니다.

*
예전에 알던 국어 선생님께 소설을 보여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 좋은 말씀을 해주셨지만 기억에 남는 건 '네 소설엔 자기연민이 없어서 좋다'는 말이었어요.
어느날 깨달았습니다. 제가 '자기연민'뿐만 아니라 '자기'도 없는 소설을 쓰고 있었다는 것이요. 언제부턴가 저는 성인의 소설을 무작정 따라하고 있었어요. 제가 쓰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제쳐두고 어른스러운 소설, 성숙해보이는 소설을 쓰려고 노력했어요. 제 옆엔 중심을 잡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제가 엇나가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습니다.

엇나가고 있던 시절, (그러니까 고등학교 삼학년 초에) 글틴을 알게 되었고 멘토님의 피드백이 저를 잡아주었습니다. '소설이 작위적이다'라는 말이 그 어떤 말보다 도움이 되었습니다. 왜 작위적으로 느껴질까. 이야기가 제 안에서 흐르지 않기 때문이죠. 저 자신을 위해 쓰지 않았기 때문에. 거짓된 이야기를 써나갔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가 닫혀 흐르지 않았던 거죠.

그런 제게 글티너 분들은 자유로워 보였어요. 어떻게 보면 무질서해보이는 소설들도 있었지만, 그게 적어도 제 소설보단 나아보였어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한다는 것... 그게 소설의 본질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뭘 써온 걸까, 뭐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 생각이 어쩌면 저를 바꿔놓은 것 같네요. 성숙한 소설을 써야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제 이야기를 해보겠다는 다짐을 세우기까지요. 오래도 걸렸습니다.

저는 나름 고등학교 내내 자유롭게 살았는데요. 삼학년 때도 소설을 썼습니다. 운좋게 연재도 해봤고요. sf 소설을 몇편 썼는데 공모전에 저작권이 묶여서 글틴엔 올리지 못했네요. 공부하랴 마감하랴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글틴에 들락날락거리며 글티너분들의 글을 읽었습니다. 이상하게 소설보단 시를 많이 읽었어요. 그 전까지는 부끄럽게도 시인하면 백석 윤동주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날 글티너 분들의 시를 읽고 그동안 생각해왔던 시에 대한 이미지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아 정말로 아름답구나, 정말로 아름답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고 문득 수치심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시집을 읽기 시작했어요. 제 첫 시집은 기형도의 <잎속의 검은 잎>이었습니다.

나름 대치키즈 비스무리한 걸로 자라왔어요. 어려서부터 KMO니 영재고니 뭐 별 걸 다 하다가 시대인재 엔딩을 맞았네요. 학벌주의에 매몰되지 않으려 오랫동안 발버둥쳤습니다. 대학은 내 인생을 결정할 수 없어, 라고 자기세뇌하며 남들보다 자유로운 고삼을 보냈지만 스트레스를 받긴 했나봐요. 수능 이후로 넉다운 되어 소설엔 손도 못댔어요. 술과 유흥의 밤이었습니다. 친구들과 룸을 빌려 밤을 새고, 술을 마시고, 철없이 돈을 썼습니다. 내내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지만, 어쨌든 즐거웠고, 그런식으로 평생을 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소설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은 꽤나 이상했습니다. 그런 느낌이 들 때마다 다시 술을 마시고, 밤을 새며 게임을 하고, 저녁마다 길거리를 아무 뜻 없이 걸어 다녔습니다. 글틴이 아니었으면 그 상태에서 쉽게 헤어나오지 못했을 거에요. 나이가 다 차기 전에 소설을 글틴에 올리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다시 소설을 쓸 수 있었습니다. 남들의 시선 같은 건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제가 쓰고 싶은 소설을 쓸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게 소설의 본질이구나... 느끼면서요. 그 소설이 <이해>에요. 글틴엔 여러 번, 빚을 졌습니다.

저는 예대엔 가지 않아요. 하지만 늘 문학의 곁에 있을 겁니다. 간절히 바라도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언제까지나 소설의 곁에 있고 싶은 마음입니다. 소설을 처음 쓰겠다고 다짐했을 땐 여러 각오가 있었습니다. 성공하겠다... 뭐 이런 다짐도 했고요. 이젠 잘 모르겠습니다. 그 모든 각오는 서서히 흐려지다가 어느순간 저를 떠났어요. 이제는 아무것도 바라지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성공에 대한 마음은 서서히 흐려졌네요. 이제 저에게 확실한 건 죽음뿐이에요.

저는 젊고, 어리석고, 철이 없어요. 대단한 축복입니다. 돈이 되지 않는 것을 필요없는 것으로 취급하는 이 사회에서, 어리석음은 제 유일한 재능 같습니다. 어리고 철없고 젊은 마음으로, 언제까지나 문학의 곁에 남아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몇 마디 더 해보자면... 이건 그냥 제 생각인데, 유소년기에 글을 쓰시는 분들에게는 내면에 해결될 수 없는 고통이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문학이 아니면(또는 문학조차도) 해소할 수 없는 고통을요. 저 또한 그런 사람 중 하나였고요. 긴 터널 같은 고통을 지나왔습니다. 열다섯 살엔 절대로 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열아홉 살이 되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살아있고, 결국 성인이 되었네요.

고통은 창작의 어머니라지만 여러분들이 너무 많이 아프지 않기를. 너무 큰 대가를 치르지 않기를. 그냥 지나가는 마음으로 빌어봅니다.

행복하세요. 행복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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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김백석
    감동했어요

    명필이네요 완전

    • 2024-04-21 22:04:52
    김백석
    감동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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