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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틴의 언어로 말하다

  • 작성일 2007-07-25
  • 조회수 381

 

<글틴의 언어로 말하다>


 “그거 말이야, 네가 새로 낸 수필집!”

 “야, 그게 수필집이냐, 잡문이지. 너 그거 눈치 못 챘나 보구나. 그거 사실 문장 블로그에 올렸던 포스팅 내용도 좀 끌어다 썼어.”

 “뭐 임마? 어쩐지 어디서 본 내용이다 싶더라니.”

 “잠깐만, 잠깐만, 이번 해에 상 받은 사람 다 가운데로 와 봐. 샴페인 터트려야지.”

 “터트릴 샴페인 많으니 그냥 책 낸 사람들은 다 가운데로 서지?”

 “여기 온 사람들 전부 일어서게 할 일 나섰냐?”


나는 내가 도착한 장소의 소란스러움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이곳저곳에서 두서없이 떠들고 웃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 예상대로 TV나 신문에서 곧잘 봐서 얼굴이 낯이 익은 사람도 퍽 많았다.

 

글틴에서 처음 연락이 왔을 때 나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이었다. 글틴이라구요? 전화번호는 어떻게 아셨어요? 내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은 반가움의 탄성이 아닌 경계서린 말이었다. 나조차도 내가 급하게 설정한 거리감에 놀라 입을 꾹 다물었다. 가입하실 때 쓰셨던 개인정보 중에서 주소랑 전화번호를 공개하길 허락하는 회원에 한해 주소록 만들었던 거 기억 안나요? 하고 묻는 말을 가만 들어보니 그랬었던 것도 같아 우선은 긍정을 했다.

 

글틴 관계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은 무슨무슨 날에 첫 번째 글틴 모임이 있을 예정이니 참석을 부탁한다고 말했다. 나는 생각해보겠노라 말하고 우선 전화를 끊었다. 보통 ‘생각해 보겠다’는 말은 거절을 예의바르게 할 때 쓰고는 했지만, 수화기를 내려놓은 후 나는 정말로 생각해보았다.

 

글틴……소설다운 소설을 써보겠노라는 희망을 품었던 학창 시절 자주 기웃거리던 사이트였다. 지금껏 잊고 있었던 A의 모습도 떠올랐다. 글틴 시절 내가 만났던 A는 소설가를 꿈꾸는 같은 또래의 소녀였다. 수많은 글틴 중 그녀의 모습이 유달리 오래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그녀가 나에게 보였던 소설에의 뜨거운 열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지금껏 매스컴이나 문예지 등에서 웬만한 글틴들의 이름을 한 번씩은 접한데 반해 A의 이름은 아무리 이 잡듯 뒤져도 찾아 볼 수 없었던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궁금증이 동하던 차였다. 글틴 모임이라면 유명한 문인이 많이 모일 테니 그 자리에서 글 몇 편정도 써 주십사고 부탁받으면 그 날 분치의 시간과 얼추 따져서 수지가 맞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인심 쓰듯 나에게 오늘을 허락했다. A에 대한 궁금증은 그 다음 이유로 미뤄 놓았지만, 혹여 A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여기 이렇게 이방인마냥 어중간하게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만 있는 것이었다.


사방에 낯익은 글쟁이들 얼굴이 있고 왁자지껄 떠드는 중에 글 이야기가 심심찮게 섞여 드는 걸 들으니 새삼 내가 언제부터 글 쓰는 것을 포기했는지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어지럽게 의식을 비집고 흘러든다. 글을 쓴다는 것이 대단한 사치로 여겨졌다. 하루하루 벌어먹고 살기 바쁜데……싶은 마음에, 시간이 나면 잠이라도 한숨 더 자고 돈 벌 일이라도 더 생각하려고 안간힘을 쓰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래도 글 쪽으로 포기를 안 하려고 힘들여 잡지사에 취직을 했다. 잡지사의 P가 등단을 한 소설가라는 말을 동료들에게 들었을 때 나는 분명 가슴 설레었었다. 나는 그녀에게 내 소설을 보여 줄 생각에 퍽 오랜만에 글이란 것을 공들여 썼던 모양이다. 그 날 P에게 퇴짜 아닌 퇴짜를 맞고 마셨던 술이 몇 잔이었는지 쉬이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니. 머뭇거리며 그녀에게 소설을 내밀며 어떻게 괜찮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너 아직도 소설을 쓰니? 수지가 얼마나 안 맞는 일인데. 그거 웬만큼 쓰지 못하면 뜨지도 못해. 알만한 애가 그러니. 이런 거 할 시간에 다음 번 잡지 기획이나 생각을 좀 해라. 아니면 글 늦는 작가들한테 독촉 전화나 좀 하던가. 요즘 사람들이 글을 안 써요, 글을. 투덜거리며 P는 말했다. 그렇다면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수지에 맞지 않는 글을 쓴다는 말인가. 그것도 원고료가 턱없이 적은 우리 잡지사에.

 

나는 그녀의 모순 된 이야기에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내 소설이 단 첫 문장 읽히고 퇴짜를 맞았다는 사실에 우습게도 눈물이 핑 돌고 만 까닭이었다. 학창 시절 밤낮을 꼬박 썩혀가며 쓴 소설을 글틴에 올렸던 적이 있었지……그때 술잔을 기울이며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글틴을 생각했다. 소설 담당 초록불 선생님의 평이 어찌나 매섭던지……공들여 쓴 소설에 가차 없이 달린 평에 손까지 덜덜 떨며 절망적 기분으로 평을 읽고 또 읽었던 그때가 새삼스레 생각나는 것이었다. 나를 제치고 주장원에 오른 글의 평을 읽고 또 읽고……그러나 이제는 내 글 아닌 글에 평을 해 줄 사람조차도 없는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그 사실에 입술을 짓씹으며 울었던 것 같다.


다음 날이었던가, 마감일을 넘긴 작가에게 독촉 전화를 걸기 위해 수화기를 들었다. 신호음이 오래 울렸다. 여보세요, 독촉의 말을 들이미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피곤에 젖은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약속했던 J 잡지사인데요. 글이…… 아, 기억해요. 죄송합니다. 곧 쓸 테니까요. 이제 다 써 가는데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었네요, 죄송해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평소 같았으면 이렇게 기한을 미루고 또 미루는 작가의 태도에 화가 확 치밀었을 테지만 쓰린 술기운이 남아있는 그 날은 어쩐지 전화기 바깥의 그가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는 무명작가이지만, 이렇게 적은 원고료에도 성실히 글을 쓸 약속을 거는 사람인 것이었다.

 

기한이 많이 지났으므로 나는 그에게 쐐기를 박듯, 그러면 이 일은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 해야 옳았지만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격려의 뜻으로 고개까지 주억거리며 알겠노라고 말을 했다.


유명 작가에게 글이나 받아 내기 쉬울까 하여 찾은 모임 장소였다. 그럼에도 나는 도착해서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인사를 한다거나 이야기를 시도하지 않았다. 글틴 출신의 유명한 작가들이 많다는 것은 질 좋은 글을 많이 받아낼 수 있는 그만큼의 가능성임에도 나는 썩 기분이 좋질 못했다. 학창 시절 주장원 선정에서 내가 몇 번 제쳐본 사람이 퍽 이름이 있는 작가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내 기분은 커피에 거꾸로 박힌 담배꽁초마냥 스산한 분위기가 되었다. 나는 결국 그 구석에 가만히 앉아 술이나 홀짝이다가 갈 마음을 먹은 참이었다.


“어머, 반가워요!”


밝은 인사에 놀라 나는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아, 네.”


얼결에 인사를 하고 얼굴을 살피니, 그녀는 글틴 시절 나와 이야기를 나눠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명인 K이다. 그녀는 퍽 유명한 시인이 되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그녀는 신나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글틴 참 그대로죠? 벌써 10년이나 지났는데 이 정도면 그대로인 축에 드는 거죠. 나는 내가 글틴 떠날 적에, 요즘 애들이 얼마나 글 쓰는 걸 지루해하는데 이 사이트가 얼마나 갈까, 했었다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오래 갈 줄을 생각이나 했겠어요? 아직도 예전에 같이 지내던 글틴 애들끼리 일년에 한번이라도 꼭 만나서 얼굴 보고 그래요. 이런 공식 모임은 처음이지만. 만날 때 한번 와요. 모여서 서로 글도 보여주고, 성과도 이야기하고. 아, 글틴 말이죠. 난 심지어 선생님들이 다 그대로인 데에 놀랐다니까요? 아, 선생님들이 몇 명씩 추가로 더 오시긴 했어요. 회원수가 늘어나니까 게시되는 글도 많아진다고 한 선생님이 다 심사를 볼 수가 없을 정도라네요. 나도 다음번에 추가로 선생님 뽑을 때 시 게시판 선생님 한번 해보고 싶어요. 아, 그거 알아요? 글틴에서 연장원에 당선되면 명문 대학에 그냥 들어갈 정도로 위세도 높아졌대요.”


취한 듯 술술 이야기하던 그녀가 문득 나에게 묻는다.


“요즘은 글을, 어때, 좀 써요?”

“요즘은 안 써요.”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니건만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시인 K가 묻는다.


“왜요?”

“아, 그게, 좀 바빠서요.”


눈을 동그랗게 뜬 시인 K에게, 차마 글을 쓰는 건 수지에 맞는 장사가 아니라 그래요, 하고 말할 수가 없다. 글에 손을 놓으니 딸이 정신을 차리기를 바랐던 부모님은 뛸 듯이 좋아했고, 같은 잡지사의 P는 소설에 손을 놓았다는 내 말에 대견하다는 듯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잘 생각했다, 정신 나간 사람들이나 그런 거에 목숨을 걸지, 산 입에 거미줄 칠 순 없잖아, 수지도 안 맞는걸 뭐하려고 하면서 기운 빼니, 그 시간에 운동이나 하면서 건강이나 지켜라.


“아, 그러고 보니 글틴 애들이랑 연락 안 하고 살았죠? 그럼 모르겠네, M은 이상 문학상을 받았고, T는……”


K가 열띤 목소리로 글틴 사람들의 수상 실적을 늘어놓는 모습에서 나는 우습게도 단 한 번의 상도 타보지 못했던 A의 모습을 본다. 글을 쓰겠다고 나서는 나를 만류하는 부모님과 한참을 싸우다가 글틴 캠프에 갔던 나는 그 날 저녁 A에게 부모님과 다툰 일을 털어놓았었다.

나 말이야, 문창과에 가겠다고 했더니 부모님이 말하더라. 거기 가서 돈을 어떻게 벌겠느냐고. 너 진짜 잘 쓸 자신이 있느냐고 말이야. 우리 집이 넉넉한 형편도 아니고. 역시 소설 같은 거 그냥 포기할까.

 

소설이 뭐라고 생각해? 넌 소설을 뭣 땜에 쓰느냔 말이야. 글틴 캠프에서 부르짖음에 가까운 진지함으로 A는 말했었다. 난 고백하려고 써. 내가 이렇게 나쁜 놈이다. 우린 이렇게 나쁜 놈이다. 나는 저런 놈을 나쁜 놈이라고 생각한다. 저런 놈은 바보 같은 놈이다, 하고. 난 소심해서 얼굴 맞대고는 말을 못 하거든. 내 말을 제대로 들어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고. 그래서 대충 이야기로 둘러대서 어떻게든 내 이야기를 해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거야. 그러고 나면 후련하니까. 그러니까 난 평생을 뭐든 쓰면서 살 거라구. 난 말을 하고 싶으니까. 말을 하고 싶은 건 내 자유의사야. 그러니까 딴 건 다 상관없지. 돈은 딴 걸로 벌면 돼. 그래도 글은 쓸 거야.

 

아, 그 철저하게 수지에 맞지 않는 삶이라니. 말하는 투로 보아 A는 그때부터 이미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온전한 글 한 편으로 만드는 데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인지. 그때 어렴풋 알고 있었으니 지금은 확실히 알고 있을 터였다. 나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A는 지금도 자신의 말을 하며 살고 있을까. 지금도 열여덟 살의 그 세계 속에서, 그 언어를 구사하며 살고 있을까. 나는 처음 이곳에 발을 들여놓고부터 A를 찾았지만 그녀는 좀체 눈에 띄지 않았다.


“어, 잡지사 분 아니세요?”


시인 K의 목소리가 뚝 끊기는 동시에 나는 나를 알아보는 목소리를 감지하고 고개를 돌린다. 밝은 표정을 하고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은 틀림없이 수지에 맞지 않는 글을 쓰는 무명작가였다. 그는 반가운 표정으로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제 글 같은 걸 실어주셔서 감사해요. 이번 달은 많이 미뤄졌지만, 이제 다 썼어요.”


그는 공손하게 말한다. 사실 감사할 건 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에게 할당되는 원고료는 턱없이 적다. K가 묻는다.


“요즘 힘들다며? 부모님이……”

“아, 그거 들으셨어요? 네, 조금요. 들어오는 돈은 없고. 살기 참 막막해요. 글질이야 뭐, 돈이 그렇게 잘 나오나요. 그래도 뭐, 언제는 안 그랬나 싶고 그래요. 부양할 가족이 없기에 망정이지, 아, 곧 생기겠죠, 그럼 정말 더 막막한데. 에라, 그건 그때 생각하죠. 여기 글 써서 안 힘든 사람 없어요. 누가 그러지 않았나요, 글은 뼈와 살을 깎아서 쓰는 거라고. 그래도 이걸 놓을 생각이 안 드니 그게 뼈와 살을 깎는 문제죠.”


나는 대답을 않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힘들 때마다 글틴 들락거리던 시절을 생각해요, 우습죠, 그래도 그때 받은 격려 힘으로 지금껏 살아요. 내가 구름빵 선생님한테 진솔한 글을 쓴다고 칭찬을 받았던 그 사람이고, 은하철도공무원 선생님한테 시어가 섬세하다는 소리도 들었었고, 물처럼 선생님한테 대상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소리도 들었고, 아, 무엇보다, 그 무서운 평 달기로 유명한 초록불 선생님한테, 계속 쓰면 가능성 있겠다, 그런 소릴 들은 사람이 아니냐 하면서 말이죠.”


그의 얼굴에 화색이 만연하다.


“아, 그러고 보니까, 얼굴 보니까 생각났네, 혹시 연장원 받았던 전적 있으신 분 아니세요? 이야기글에서, 맞죠? 제가 기억력 하나는 정확해요. 그 때 인터뷰에 실린 사진이랑 시상식 사진으로 본 얼굴이랑 얼추 기억이 나는데! 요즘에는 무슨 글 쓰세요?”


나는 글틴에서 들은 몇 문장의 칭찬들을 원동력삼아 지금껏 글을 쓰고 있다는 작가인 그에게 할 말이 없다. 내가 대답이 없자 내 침묵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그는 몇 마디를 또 신나게 떠들어대다가 다른 이야기 패로 옮아가버린다. 그때까지 나를 가만 살피고 있던 시인 K가 나에게 약도와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건넨다.


“지금이라도 써 봐요, 글. 모임에 나와요. 소설 하나 써서 들고. 알았죠?”


언제부터 소설을 쓰지 않게 되었더라. 나는 지나치게 일찍 도착한 바람에 잠시 벤치에 앉아서 앞의 놀이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몇 시간 전의 나를 새삼 생각한다. 아이의 공이 흙 위를 부드럽게 굴러서 내 앞으로 왔다. 나는 공을 주워들었다. 아이가 타박타박 걸어왔다. 나는 까닭 없는 장난기가 발동해서 지갑을 열어 만 원짜리 지폐 석장을 꺼내며 아이에게 말했다.


언니한테 이 공 안 줄래? 이거 줄 테니까.


그 아이의 양 쪽으로 갈래져 묶인 머리 모양도 그렇거니와, 공을 곧잘 가지고 노는 모습이 귀엽게 보였다는 것이 아이에게 그런 터무니없는 제안을 하게 한 이유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게 그런 돌발적인 행동을 하도록 부추긴 것은 공이 굴러가는 모습에 열중하는 그 아이의 눈빛이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싫어요.


예상했던 대답을 들은 내 입이 자연스럽게 미소를 짓는다. 이제 설명해 줄 일만 남은 것이었다. 아이의 허술한 동심의 세계를 깨고 무참스럽게 짓밟는, 누가 언제이든지 아이에게 해내야 할 일이었다.


그으래? 이 돈이면 그거 같은 공을 수십 개 살 수가 있어.


아이가 말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뜨끔해졌다. 내 알량한 짓을 다 꿰뚫고 있는 것만 같은 표정에 나는 순간 작아진다.

 그러면 너, 누가 너한테 평생 놀고먹을 돈을 줄 테니까 글 같은 거 쓰지 마라, 그럼 어쩔래? 열여덟의 내가 A에게 따져 묻는 모습이 희뿌옇게 되살아난다.


엄마가 나한테 생일 선물로 사 준 거예요.


똑같은 공을 수십 개나 살 수 있는 것이 무슨 상관이냐고 아이가 나에게 묻는 것 같았다. 공이 수십 개나 있을 필요는 없어요. 내가 아이를 잡아놓고 이유를 설명해보라고 했다면 아이는 아마 그렇게 대답했을 것 같다. 나는 그 눈에서 분명 A를 보았다. 너 지금 내가 한 말 듣기나 했냐? 눈썹을 찌푸리며 말하던 너. 넌 누가 너한테 평생 먹고 살 돈을 줄 테니 한마디도 말하지 마라, 하면 그럴 수 있느냔 말이야. 물론 처음 며칠간은 어떻게든 참아 보겠지. 하지만 원체 벙어리가 아닌 이상 그럴 수가 있겠어? 말을 하고 싶다는 기본적인 본능을 이겨낼 수 있겠느냔 말이야.

 

절대로 깨지지 않는 세계도 있다. 나는 사람들의 내부에 존재하는 세계란 것은 몇 번이고 무너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왔었다. 그랬기에 내 안에 있던 세계가 무너질 때 나는 담담할 수 있었다. 오랜 체념의 시간을 거치지도 않았다. 글을 포기하는 것, 어쩌면 나는 그것을 내가 언제든 겪어야 할 통과 의례 쯤으로 여겨왔던 것이나 아니었는지.



때맞춰, 자 기념사진 찍습니다하는 사진사의 말과 함께 사람들이 모여든다. 나는 슬쩍 자리를 비켜 나가려고 했다. 시인 K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뭐 해요? 이리 와서 같이 기념사진 안 찍고.”

“무슨……난 글쟁이도 아닌데요.”

“오늘부터 글쟁이 하면 되죠.”

“오늘부터요?”

“네, 오늘부터.”


나는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는 순간 경직된 얼굴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카메라를 붙들고 숫자를 세고 있는 사진사는 다름 아닌 A였다. 나는 그녀의 얼굴만 보고도 그녀가 아직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 옆 의자에 올려진 노트북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표정이 자신의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의, 그 글틴 캠프 시절 나에게 열띤 목소리로 말하던 그때의 표정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

 

다들 재미있게 쓰셨던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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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건

  • 익명

    와..정말 뭐랄까..진심이 묻어나는 글이에요!

    • 2007-09-01 01:19:41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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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대단하세요!

    • 2007-08-31 21:09:34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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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 /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