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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심장이 뛰다

  • 작성일 2009-07-27
  • 조회수 244

 


모 대형마트 지하 1층에 있는 도서관을 나는 자주 이용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땅 밑으로 내려가면 바로 눈앞에 도서관이 있었다. 그다지 크진 않은 도서관에는 나의 손길을 기다리는, 조금은 때가 탄 책들이 살고 있었다. 도서관의 사람들, 그 중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지혜의 샘물에 빠지는 것은 익사하더라도 차라리 행복하다는 학구적인 사람들(드물게 나타나는), 그냥 여가시간을 위한 책들을 빌리는 사람(대부분)도 있다. 나로서는 전자보다는 후자에 더 가깝다.

 지하1층, 부모님들이 쇼핑하는 동안 아이들은 예쁘게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아무리 버릇없고 말썽을 많이 피우는 어린이도 도서관에 들어서면 조용해지는 이유가 뭘까. 어른들과 아이들은 책을 고르는데, 그리고 읽는데 열중한다.

 나는 산책을 하듯 책들을 둘러본다. 무슨 책을 고를까 망설인다. 가끔은, 책을 고르기 위해 도서관을 돌아다니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쾌락이다. 책뿐만이 아니라, 쇼핑을 하러 옷을 고르는 것도, 레코드점에서 음반들을 살펴보며 그것들이 모두 자기 것 인양 행복해하는 것도 결국 같은 것이다.

 책은 그리 어렵지 않게 읽혔다. 대부분 소설의 소재가 음악에 관련되어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한 편 한 편 소설을 읽어갈 때마다 나의 곁을 잠시 머물다 떠나가는 향기로운 여운은, 무언가 음악을 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기도 하다.


자동피아노 - 음악을 해석하지 않는 어린아이의 연주


 책의 맨 뒤에는 김중혁 작가가 독자들에게 드리는 ‘카세트테이프’가 있다. 옆에는 작가가 사인과 함께 남긴 글이 있었다. 거기에는 이런 물음이 있었다.

 “소리란, 그리고 음악이란 어디에서 만들어지고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요? 사라진 소리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이때「자동피아노?의 비토 제네베제가 한 말이 내 머리 한 구석에서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음악은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소멸되는 것입니다. 어디에나 음악이 있습니다. 그 음악들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로 사라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지금 이곳 어딘가에도 음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아니스트는 음을 만들어 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음을 자신의 몸으로 소멸시키는 것이 피아니스트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저는 멀고 아스라한 소리들이 좋습니다. 콘서트홀에 가지 않는 이유는, 모든 소리들이 너무 가깝게 들리고 음악을 만들어내려는 피아니스트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소설을 읽을 때는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고 넘어간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는 왜 음악이 소멸되는 것이라고 했을까? 피아니스트는 왜 음을 자신의 몸으로 소멸시켜야 한다는 걸까?

「자동피아노?의 주인공(‘나’)은 아직 소년이다. 음악을 해석하지도 않고 분석하지도 않는다. 어린아이처럼 세상을 자신의 눈에 비치는 그대로, 어떠한 고정관념이나 편견도 없이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는 비토 제네베제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그의 ‘어른스러운 연주’를 동경하게 되지만, 비토의 그런 철학은 주인공에게 있어선 이해할 수 없는 어른의 철학일 뿐이었다.

 비토 제네베제가 생각하는 음악은 관객들, 즉 타인들과의 소통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내면에 있는 음악과의 대면이다. 음악이 소멸된다는 말의 의미는 나도 아직 잘 이해할 수 없지만, 나는 가끔씩 생각해본다.

 자신이 연주하는 음악과, 자신의 내면에 있는 음악 - 심장의 박동과 비슷한 그 어떤 - 이 완벽하게 조화 될 때, 음악은 피아니스트의 몸을 통과하며 서로 맞부딪히며 상쇄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하고.


디제이, 그리고…….


 그렇지만 작가는 음악은 반드시 연주자의 해석이 없이 실현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비닐광 시대(Vinyl狂 時代)?에는 DJ 지망생이 나온다. DJ는 LP판을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그 음악을 리믹스(remix)한다. 그 과정에서 본래의 음악은 DJ에 의해 변형되고 마구 뒤섞인다.

 ‘남자’는 ‘나’를 LP들이 가득 꽂혀 있는 창고에 가둔다. 그는 디제이들이 본래의 순수한 음악을 망가뜨려 놓고 있다고, 단지 “음악을 잘라서 써먹을” 생각 밖에 안하는 디제이들에게 음악이란 돼지 목에 진주일 뿐이라고 한다.「자동피아노?의 비토의 관점에서 볼 때 남자의 말이 맞을 지도 모른다. ‘나’도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설의 결말에서 ‘나’는 다시금 디제이가 될 마음을 굳힌다.

 비토는 아무런 해석도 하지 않는 연주를 선호하는데 비해 디제이는 본 음악들을 오려 붙이고 덧칠하고 꾸며서 모자이크를 만들듯 음악을 만든다. 그런데, 언뜻 보기에는 다른 예술관을 갖고 있는 두 소설의 주인공들이 닮아 보이는 것은 어째서일까.

 - 새로운 것은 어디에도 없다. 누군가의 영향을 받은 누군가, 의 영향을 받은 누군가, 의 영향을 받은 누군가, 가 그 수많은 밑그림 위에다 자신의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이다. 그 누군가의 그림은 또다른 사람의 밑그림이 된다.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는 여러 개의 끈으로 연결돼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모두 어느 정도는 디제이인 것이다.

 「비닐광 시대(Vinyl狂 時代)?에 <팽귄뉴스>에서 볼 수 있었던 어떤 활기참이 명확히 살아있다면,「자동피아노?에서는 조금 덜하다. 그러나 둘 다 멋진 삶이다. 그렇다면 그 두 주인공의 닮은 점은 무엇일까. 바로 “어른이 되어가는 소년”이라는 것이다.


도서관 속에서

 

 각각의 소설들의 결말이 여운을 남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뭔가 허무한데?’

 라는 기분을 주는 건, 결말에서 ‘소년’이 어른이 될까, 말까 하면서 선택을 하지 않은 채 나머지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기 때문인 것이다.「유리 방패?에 나오는 두 면접 콤비의 미래도,「나와 B?에 나오는 "나와 B"의 미래도 아직 결정되지 않은 것이다. 소년과 어른의 경계에 놓인 그들, 선택은 어렵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무겁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도서관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다. 산보를 하듯이 책을 고르고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는다. 책을 읽으며 자신의 걸어왔던 길을 되짚어보고 점차 자신을 완성해나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악기들의 도서관?에서 ‘나’는 악기들의 소리를 녹음해서 대여해주기도 하고 소리를 ‘열람’할 수 있게 만들기도 한다. 주인공은 그렇게 책 한권을 뽑았다.「엇박자 D?에서는 D가 자신의 엇박자 합창곡을 완성한다. 그는 도서관을 나갔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당당하게.「무방향 버스 - 리믹스,「고아떤 뺑덕어멈??의 엄마는 두꺼운 책 한 권을 들고 먼 여행을 떠났다. 그들은 아직 덜 된 존재이지만, 자신을 완성해가고 있는 그들의 미래는 밝다. 소설집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우리는 리믹스 된다. 여러 명의 디제이가 한 곡을 리믹스 하는 방법은 수만 가지는 족히 넘을 것이다. 인간은 어차피 죽어 없어질 존재이고 인생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사람이 있다. 결국은 한 곡의 음악처럼 처음엔 반주가 시작되며 점점 고조되다가 잠깐의 클라이맥스를 거쳐 다시 하강하는 그런 거라고 한다. 더 볼 것도 없다고. 어차피 죽을 운명, 인생이 뭐 그렇지 안 그래? 그러나 그런 인생에는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그런 비트들이 있다. 모든 것은 비트를 잠재하고 있다. 모든 음악에는, 변칙적이어서 예측을 할 수 없는, 그런 비트가 있다. 그래서 음악은 듣기에 즐겁고 여운을 남긴다. 삶의 길은 거대한 도서관에 꽂혀 있는 책들의 문장 수만큼이나 많고 사람의 심장이 평생 동안 뛰는 횟수만큼 많다. 그리고 그 길들 중 자신의 심장의 비트에 가장 걸맞는 길을 찾는 것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도 모두 그 삶의 길을 찾고 있다.

 

 “소년의 마음을 가지고 어른이 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즐겁다.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웃는다.

 도서관 속, 흐뭇한 표정으로 책을 고르는 사람들의 심장에는 박동(비트)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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