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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이 고인다 - 일상의 칼자국

  • 작성일 2009-07-27
  • 조회수 369

일상의 칼자국

 

내 몸에는 몇 개의 흉터가 있다.

다친 곳은 아물었지만 당시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고 흉터를 볼때마다 생각난다.

이런 흉터들은 잘 보이지는 않는 곳에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매우 볼품없는 모습으로 남아있지만 나는 그것을 어찌할 수 없다.

 

 

내가 처음 김애란 작가의 책을 읽은 것은 두번째 수능을 준비하면서 였다.

김애란 소설 속 주인공은 재수생이거나 시험 준비생이거나 아르바이트생 등 가장 음지에서 생산적인 일을 비생산적으로 해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자신이 나름대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손이라고 믿지만, 사회를 이끌어가는 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들을 아웃사이더라는 이름아래 멋대로 분류하고 구분하곤 한다.

이 소설 주인공들이 바로 그 비주류의 모습들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애초부터 비주류라는 어감에 반감이 들었다.

비주류라는 말에는 자신의 인생에서도 주인공이 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과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저주가 걸려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비주류가 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왠지모를 두려움이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 인지 이 소설은 나한테 흉터로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전반적으로 소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들의 모습을 세세하게 보여준다.

도도한 생활에서는 100년 전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지보적인 기계 앞에서, 등이 네안데르탈인처럼 점점 굽어가는 주인공을 통해서 인간다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퇴행하고 있는 듯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성탄특선에서는 사년을 사귀면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를 함께 맞는 연인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들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크리스마스 때 입을 못이 없어서 연인을 피해 시골로 내려가고, 돈이 없어서 또 상대를 피하기도 한다.

처음으로 함께 하는 크리스마스에는 그들을 받아줄 모텔은 없었다.

결국 찾아 들어간 곳은 사랑을 나누기에는 너무 누추한 곳이며, 그들보다 더 딱한 사람이 몰래 숨어들어 있는 방이었다. 결국 네 번째 크리스마스도 함께 하지 못했다.

다수의 연인에게 일상적인 것이 이들에게는 특별한 날에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침이 고인다에서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학원에 취직해서 내가 얼마짜리 인간인가를 매달 급여로 확인하는 주인공과 그녀의 집에 잠깐 함께 사는 후배가 나온다.

두 인물의 모습은 단지 허구인 소설 주인공들의 얘기가 아닌, 이 시대를 살아가는 20대의 모습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일상성 때문에 소설 속 주인공이 특정인물이 아닌 나나 너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우리는 생각하고, 불편하지만 그것들 받아 들이게 되는 것 같다.

 

우리가 그것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소설 전반에는 가장 소외된 인물들을 담담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고통을 토로한다면 먼저 질려서 멀리 떨어져 있었을 텐데 그와 반대되는 의연한 태도에 우리는 한발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담담하게 보여준다는 말은 자신의 비밀을 너무 쉽게 누설하는 느낌을 준다고 말할 수 있다.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고통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남의 가정사를 들은 나는 당황했지만 이내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되고,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없지만 듣는 것만으로도 뭔가를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타인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을 찾게 된 것이다.

 

 

주인공이 얘기하는 사건이 너무나도 일상적이기에 나는 책을 쉽게 덮지 못하고 경청했다.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은데 오히려 보고 있는 내가 더 힘이 들었다. 씩씩하게 헤쳐나가는 모습이 더 비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어둡고 눅눅한 생활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내가 이 소설을 읽고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던 것 같다.

뭐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담한 어조로 개인의 아픔을 풀어가는 인물한테 어떤 행동을 해줘야 겠다는 마음보다는 이 얘기라도 들어줘야 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비참한 삶을 마치 한다리 건너 사람들의 사건인것처럼 얘기하고 생활한다.

가세가 기울어서 비가 들어오는 단칸방에서 살면서도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호기를 부리기도 하고, 모텔에 갈 돈 이 없을 만큼 가난한 상대에 대해서도 애정의 끈을 놓지 않는다.

 

칼 하나로 자신을 키워낸 엄마의 죽음 앞에서도 주인공은 오열하는  대신 음식을 넣는다.

그것은 엄마의 죽음이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엄마의 죽음을 또 다른 삶의 예고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죽음을 소멸로 보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의 시작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당장 직면한 현실을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고  그것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받아들이는 독특한 시선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인물들 중에서도 자신을 버린 엄마를 떠올리면 증오가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침이 고인다는 후배가 나는 가장 인상적이었다.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인간의 기본욕구인 식욕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 강렬했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식욕이라면 인간이 결핍을 느끼는 것은 그리움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미안함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 기본으로 깔려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후에 주인공이 후배를 생각하면서 침이 고이는 것도 이런 이유때문이다.  

 

이처럼 소설 침이 고인다는 짧은 단편으로 긴 여운을 준다. 상처가 난 자리에 흉이 지는 것처럼 읽은 후의 느낌이 더 오래가는 것 같다.

 

여운이 남는 다는 것은 소설 전체가 주는 느낌 보다는 주인공 때문인 것 같다.

그들 대부분은 어떤 행동을 하지 않고 결심이나 감정으로 사건을 마무리한다.

그 이후의 사건이나 행동을 상상하기 때문에 여운이 남는 것일 수도 있다.

아웃사이더로 살아가는 이들이 어떤 능동적인 행동을 취하거나 그들이 처한 상황을 벗어나길 바라는 것은 비주류인 나의 욕심인 줄도 모르겠다.

이런 이유로 나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에 대한 뚜렷한 액션 없이 멈춰있는 정적인 인물들이 유독 아쉬웠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이 단편들이 허구가 아닌 작가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기를 바랬다.

왠지 인물들이 처한 현실이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김애란작가의 모습이었으면 하고 말이다.

나는 작가라면 우리와는 다른 사람일것이라는 생각을 해왔다. 

인간적으로 성숙했다거나 일반인들과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그런 종류의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소설과 작가가 세상을 보는 시선이 일치한다면 나는 조금 더 용기가 날 것 같았다. 누구나 나와 같은 한때를 보내고 그것을 받아들여서 아물어 가는 과정을 겪는 것이라고 위로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것이 흉터로 남을 지라도 일상의 한 부분이라고 받아 들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처한 상황과 너무나도 닮아 있는 소설 '침이 고인다'는 한동안 도마에 움푹 페인 칼자국처럼 오랫동안 여운이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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