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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들의 도서관-나와 B> 그리고, 나

  • 작성일 2009-07-27
  • 조회수 247

 

 B가 화자에게 그의 왼손, 단단하게 굳은살이 박혀 마치 ‘손가락 끝을 잘라낸 다음 그 위에

다 돌조각을 이식해놓은 것 같은’ 왼손을 보여주었을 때, 나는 한없이 어설픈 둥당거리는 기타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돌려 한없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반 년 전에 이미 죽어버린, 기타를.

 

 중학교 이학년이었다. 적당히 자란 나이. 나는 뜬금없이 기타를 배워보겠다고 나섰다. 그것도 통기타. 다시 말해 어쿠스틱 기타. 엄마는 그러든지, 라고 했고, 인터넷을 뒤져 C코드, D코드 따위를 중얼거리며 나는 기타학원으로 향했다. 학원에서는 기타를 한 대 사라고 권유했다. 그래서 샀다. 신제품, 클래식 기타를 개조해 만든 연습용 통기타(라고 선생님이 말했다. 대리 구매를 맡겼으므로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일 년 반 동안, 매주 토요일 두 시간을 선생님 얼굴을 바라보며 지냈다. 눈물 나는 레슨이었다. 너무 입을 많이 벌려서 턱이 아팠다. 하암. 하아암. 가방에서 기타를 꺼내고, 내 꼬임에 넘어가 함께 배우기로 한 친구와 장난을 치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좀 연습하는 시늉을 하고, 대충 음이 들어맞으면 선생님은 왜 아이가 한 달 째 C코드를 연습하고 있죠? 라는 추궁을 받지 않기 위해 휙휙 진도를 나가고, 가방에 기타를 집어넣었다. 오늘 레슨 끝.

 

 그리고 중학교 삼학년 겨울방학 때 집어치웠다.

 

 심지어 ‘로망스’하나도 완벽하게 연주하지 못하니, 엄마는 학창시절의 남학생 1까지 들먹이며 그동안 뭘 배운 거냐고 말했다. 우스운 수준이긴 하지만 제법 굳은살이 박혀가던 내 왼손가락들은 다시 내 정신상태처럼 흐물흐물해져 갔다. 싸구려 기타는 직사각형 방의 꼭짓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갈색 몸이 점점 뽀얗게 변해갔다.

 

 이런 시점에서, 나에게 ‘나와 B’는 다른 작품들보다 좀 더 메아리치며 다가왔다. 그는 전자기타를, 나는 어쿠스틱 기타를 쳤고, 음악에 대해 대화를 나눌 친구도, 좋아하는 아티스트도 하나 없은데 괜히 혼자서 고심했다. 나, 음반 매장에서 아르바이트 한 적 없나? 그만큼 화자는 내게 각별했다. 모든 말 하나하나가. 기타를 그만두었을 때 느낀 일말의 비참함까지도.

 

 사실은, 싫었다. 기타를 배운답시고 괜히 느꼈던 우쭐함. 사람들 앞에서 무언가 연주해보여야 한다는 부담감. 기초 하나하나를 밟아나가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성습함. 모든 것이. 그래서 나는 화자에게 부러 비아냥거렸다. 억지를 썼다. 당신, 기타 연습할 때 마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건 기초 연습하는 것이 질린 거고, 햇빛 알레르기는 세상에 남부끄러운 거 아냐?스스로에게 던지는 비웃음. 그러자 B가 나에게 대꾸했다. 야, 좋아한다면 두세 번은 시도해봐야지. 계속 시도하다보면 어느 순간 정말 좋아지거든.

 

 젠장. 어쨌든 화자는 다시 기타를 배우기로 작정했다. 아직 자신의 손가락 끝은 무르다며. 그럼 내 손가락은 어쩌라고. 심란한 마음으로 육번 줄부터 일번 줄까지 손끝으로 둥기당둥당당 숫제 두드렸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이 환해졌다. 나는 앞 페이지로 뛰어갔다. 일반인보다 몽땅한 내 새끼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좋아. 당신이 심장을 극복한다면, 난 내 손가락들과 함께 음표를 삼키겠어. 짧고 뭉툭한 손가락도 88개의 건반 위에서 놀 수 있다는 걸 보여주지.

 

 음악, 을 좋아하니까, 한 번 더 시도해보는 것이 옳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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