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근 시인의 목소리로 듣는 「환한 집」
- 작성일 2024-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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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집
강우근
나의 어린 조카가 나를 좋아한다고 한다. 누나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너의 그 칙칙함을, 무표정을 좋아해”
가족 모임에 불편하게 앉아 있는 나의 모습이
만화에 나오는 부기라는 옆집 아저씨를 닮았다고
많은 것을 무서워해 바깥을 안 나가는 부기 아저씨를
소피라는 꼬마가 매번 불러내어 모험이 시작된다고
나는 그런 조카를 하루 맡아주기로 하고
“나는 하얀 집에 살고 싶어”
조카는 가방에서 스케치북에 그린 집을 꺼낸다.
여름에는 태풍이 오고, 가을에는 은행이 터져 나가고, 겨울에는 폭설이 떨어질 텐데.
하얀 집은 금세 검어질 것이다. 우리의 테이블에 놓인 생크림 케이크는 작아질수록 포크 자국이 어지럽게 남아 있다.
“삼촌은 어떤 집에 살고 싶어?”
나는 검은 집이라는 말을 삼키고
환한 집이라고 대답하며 애써 웃는다.
조카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고
환한 집은 어떤 집일까, 생각에 잠기는 사이
생크림 케이크에는
검은 파리 한 마리가 죽어 있다.
나는 서둘러 케이크를 치우고
조카가 돌아온 테이블에는
새롭게 놓인 생크림 케이크
“······삼촌이 배가 고파서”
“삼촌에게 추천해 줄 케이크의 맛이 아주 많아.”
환한 빛이 우리를 비추는 동안
우리는 생크림 케이크를 아무런 근심 없이 나눠 먹는다.
『 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 (창비, 2024)
삼촌은 알고 있습니다. 조카가 좋아하는 “하얀 집”이 계절만 바뀌어도 금방 때가 타고 검어진다는 사실을. 포크질 몇 번에 너저분해지는 생크림 케이크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아예 마음속에 검은 집을 품고 사는 것이 속 편하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지만, 조카 앞에서는 그런 티를 내고 싶지 않습니다. 검은 집 대신 환한 집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검은 파리가 죽어 있는 케이크를 얼른 치우고 자기가 먹은 것처럼 말합니다. 아직은 조카가 좋아하는 것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 그게 삼촌의 마음이겠지요.
조카도 알고 있습니다. 케이크 하나가 없어지면 다른 케이크를 맛보면 되고, 하얀 집이 더러워지면 다른 집을 또 하얗게 그리면 되는 것을. 삼촌의 “그 칙칙함을, 무표정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 칙칙함과 무표정 뒤에 숨은 소심함과 두려움을 심각하게 보지 않아서일 겁니다. 만화에 나오는 부기 아저씨처럼 소피라는 꼬마를 따라서 모험 한번 떠나면 금방 해결될 문제이니까요. 배가 고파서 케이크를 먹었다고 하는 삼촌에겐 오히려 더 많은 케이크를 맛보게 해주고 싶습니다. 그게 또 조카의 마음이겠지요.
서로 알고 있는 것이 이렇게도 다른데, 둘은 무리 없이 잘 지냅니다. 적어도 하루 동안은 근심 없이 지낼 것 같습니다. 단 하루라도 환한 빛이 드는 집에서 아무 근심 없이 지내고 싶은 마음. 그게 또 우리의 마음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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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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