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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운동장을 가로질러 간다는 것은」

  • 작성일 2009-08-31
  • 조회수 6,751




운동장을 가로질러 간다는 것은

 

유홍준

 

 

가로질러 간다는 것은 저절로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는 사람은

 

길쭉한 사람이다 다리도

길고 목도 길고 뒤통수도 길고 귀도 긴 사람이다 어깨 축 처진

검정 옷을 입은 사람이다 제 삶이 어떤 건지 미리 한 번 중간점검해보는 사람이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

한 가운데 서 보는 사람은

 

차마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 흙먼지를 한 번 오지게 뒤집어 써보는 사람이다 어디 피할 데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사람이다 마치 고문당하는 사람이고 마치 숙청당하는 사람이다 모름지기 인간의 그림자가 이렇게 길고 이렇게 홀쭉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사람이다

 

가로질러 간다는 것은 스스로 고개를 꺾는 것이다

그림자 중에 가장 긴 그림자는

운동장에 드리운 그림자다

 

 

 

출전: 『서시』2009년 봄호

 

시: 유홍준

1962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1998년『시와반시』신인상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喪家에 모인 구두들』『나는, 웃는다』등이 있으며, 윤동주문학상, 시작문학상 등을 수상함.

 

낭송: 최옥자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천천히 걸어가 본 지 참 오래되었네요. 편편하고 노골적이고 먼지 이는 맨흙 운동장. 인간이 되어 '인간의 그림자'를 홀로 끌고 가게 되는, 길고 둥근 운동장. 정말이지, 피할 데가 손톱만큼도 없지요. 나의 전말이 백일하(白日下)에 드러나는 운동장.

차라리 운동장처럼 숨을 데 없는 곳이 몇 군데 더 있었으면 좋겠어요. 거짓 꾸밈을 허락하지 않는 곳, 본때를 보여주는 곳, 내가 나를 바라볼 때 눈물짓게 하는 곳. 그런 고집스레 드센 곳 어디 없나요? 그런 곳 살갗 쓸리듯 좀 지나가봐요.

 

2009.8.31. 문학집배원 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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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3-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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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2-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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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4건

  • 익명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면서 급한마음에 초등학교운동장을 가로질러 걷는다.아이은 선생님이 보드블럭으로 다니라고 했다며 겁을 먹는다.하지만 난 언제나 빙 두르는것은 싫다,가로지르는것이 좋다,흙먼지를 뒤집어 쓰는것이 싫고 신발에 흙이 묻는것이 싫지만 난 뭐든 빨리빨리에 익숙해져버린탓에 무조건 가로지르고 본다.운동장을 가로질러간다는것은 시에서처럼 긴 그림자가 드리우는 내삶을 보여주는것인지도 모른다,내몸어디하나 숨길곳없어도 피할데가 손톱만큼도 없어도 운동장을 가로질러가면서 내그림자를 보면서 난 내 인생을 보는지도 모르겠다

    • 2009-08-31 04:11:42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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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글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참 편안하고 좋내요 자주 들어 와서 들어야되겠어요 감사 합니다.

    • 2009-08-31 10:24:59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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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요즘은 운동장을 잔디로 깐곳도 있더라구요.그런곳에선 먼지나는 운동장 한바퀴돌면 흙먼지 가득하게 이는 광경을 볼수없을텐데...그림자 놀이에 빠진 둘째딸아이의 미소가 생각나게 하는 시인것 같아요.한참 개모양,세모양등 모양내기에 즐거워하는 아이에게긴 그림자를 만들어주는 운동장은 상상의 세계가 될것 같네요.편안하고 정겨운 시미소가 절로나는 시인것 같아 오늘하루 기분좋게 시작합니다.

    • 2009-08-31 10:53:33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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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속내를 알 수 없는 다 같은 색의 까만 그림자...감추고 감추고 감추며 살려 하지만 결국 자신의 삶은 어떻게든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입니다. 한 평생 자신에게, 또 남에게 부끄럼 없는, 그림자까지도 아름다운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네요..

    • 2009-08-31 11:06:09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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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여럿이 어울러서 놀수 잇는 운동장, 그림자가 생기는 밤중.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정면이 아닌 측면으로 그림자를 본다는 것은 삶속에서도 여러가지의 시도를 해보았지만 실패로 내려앉아 상실감으로 깊은 나날을 지내다가 다시한번 세상을 향해 내젓고 싶지만 소심하고 움츠려지는 마음을 다잡고 운동장을 택한것이 아니였나 싶네요. 어둠속에서 야간산행하는 것보다는 안전주의이면서 세상에 대해 똑바로 설수 없는 비열감. 아니 어쩌면 가장 기다란 그림자를 보고는 똑다른 삶의 발견일지도....살면서 가끔씩 정신지체아적인 행동으로 사는 경우가 종종있어요.

    • 2009-08-31 11:41:29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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