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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디마자(吉狄馬加), 「첫사랑」

  • 작성일 2013-09-09
  • 조회수 2,588




지디마자(吉狄馬加), 「첫사랑」



어린 시절 어른들은 말했네

아이들의 얼굴은 모두 둥글다고

엄마에게 왜냐고 물었더니

그저 손가락으로 달님만 가리키셨지

그 달은 정말 둥글었네, 나뭇가지 끝에 고요히 잠든 모습에

나는 동생의 잠자리채를 떠올렸네

어떻게 하면 저런 어여쁜 색시를 채 올까

그때 지붕 밑엔, 황금빛 옥수수 다발이 가득 걸려 있었지

나는 소녀의 목걸이가 생각났네

나무 밑에서 놀던 숨바꼭질

달빛 아래 놀던 *‘신부 채기’

왜 그랬을까, 내가 찾아다닐 때마다

그녀는 살금살금 다가와

물 같은 달님이 되었지

그녀의 웃음소리가 내 옷을 흠뻑 적셨어

어느 날 그녀는 백양나무로 뻗어나

들판에서 사랑을 노래했네


그녀가 꽃 안장 위에 올라탔을 땐

나의 신부가 아니었어

그날 밤, 엄마는 내가 어른이 되었다며

못 입게 된 작은 옷들을

동생에게 주라고 하셨지

그러나 나는

웃음소리에 젖었던 그 옷만은

숨겨두었네

그날 밤의 달빛을 찾아다녔지만

오직 나의 영혼 속에 있을 뿐

나는 동생의 잠자리채를 떠올렸네

어떻게 하면 저런 어여쁜 색시를 채 올까




* 이족의 처녀가 시집을 갈 때, 신랑 측에서 사람을 보내온다. 이때 신부의 친구들이 그를 저지하는데, 그러면 신랑 측 사람들이 신부를 잡아온다. 이때 신부를 ‘채 온다’고 하는데, 아주 재미있는 광연을 이룬다.






● 시_ 지디마자 - 1961년 중국 쓰촨 성(四川省) 량산(凉山)에서 소수민족인 이족으로 출생. 1985년 첫 시집 『첫사랑의 노래』를 발표한 이래 현재까지 『어느 이족의 꿈』, 『땅속에 묻힌 단어』 등 10여 편의 시집을 출판했다. 신시(新詩) 상, 전국소수민족문학시가최고상, 쓰촨 성 문학상, 민족문학시가상, 충칭 문학상 등 중국의 국가문학상을 여러 차례 수상했다. 그의 시는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스페인어, 불가리아어, 세르비아어, 마케도니아어, 루마니아어, 몽골어 등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국제 시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2006년에는 러시아작가협회로부터 숄로호프문학상을, 불가리아작가협회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중국소수민족작가협회 회장, 중국시가학회 상임 부회장, 중화전국청년연합회 부주석, 10차 전국정협(政協) 정협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칭하이 성(靑海省)의 부성장을 맡고 있다.


● 낭송_ 황종권 - 시인. 1984년 전남 여수 출생. 2010년 경상일보 신춘문예에 시 「이팝나무에 비 내리면」이 당선되어 등단.

● 출전_ 『시간』(문학과지성사)

● 음악_ 최창국

● 애니메이션_ 송승리

● 프로듀서_ 김태형





배달하며


태양의 계절이 가고 달의 계절이 옵니다. 양의 기운이 접히고 음의 기운이 어김없습니다(이 어김없다는 데에 희망이라는 씨앗이 숨어 있는 줄 압니다!). 가을은 달의 계절입니다. 태양은 정수리 위로, 등 뒤로 지나가지만 달은 가슴으로, 눈으로 맞아들이는 천체의 아가씨입니다. 그러하니 동양에서는 고대로부터 노래의 여왕이고 또 달을 즐기는 것이 멋의 진수였습니다. 내 유전자에는 달밤이면 뱃놀이를 하고 싶은 본능이 뭉게뭉게 피어 오르기도 합니다.

이 시를 보니 우리에게는 낯선, 저 먼 고장의 민족에게도 달은 어김없이 절절하고 매번 ‘새로운’ 노래임을 느낍니다. 첫사랑이고 아쉬움이고 위로의 손길이기도 했을 듯합니다.

첫사랑이 ‘꽃 안장 위에 올라 탔을 땐 나의 신부가 아니’었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요. 그날 그녀의 노래가 가득 묻은 옷을 꺼내서 물끄러미 바라봤을 겁니다. 얼굴엔 달빛이 번득이며 흘러내렸을 거고요.

추석이면 고향에 가고 고향에 가면 누구도 모르는 첫사랑의 감정을 달빛은 꺼내놓습니다. 달은 모든 이의 첫사랑의 대형 금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소박하나 빼어난 시로 보입니다. 제 ‘로컬리티’에 충실하니 더더욱 그러합니다. 시인의 이름이 본명이지 필명인지 알 수 없으나 새겨볼 만합니다. ‘길한 오랑캐에 말을 보태다’, 뭐 그러한 뜻으로 문외한은 재미있게 해석해 봅니다. 스스로 ‘오랑캐’임을 자각하고 환하게 드러낸 뼈 있는 이름인 듯 인상적입니다.


문학집배원 장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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