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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홍규,「투명인간」중에서

  • 작성일 2012-10-18
  • 조회수 2,483




  손홍규,「투명인간」중에서
 
 
  우리는 지난해에 어떤 방식으로 아버지의 생일을 치렀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여느 해처럼 그냥 슬쩍 넘어갔을 수도 있고 조촐한 파티를 벌였을 수도 있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외식을 했을 수도 있고 영화를 관람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딱히 지난해의 오늘이 어땠는지를 기억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를 투명인간으로 만들자는 건 농담이었을 뿐인데 어머니와 동생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
  식탁 가운데 놓인 둥그런 케이크는 동생과 내가 돈을 모아 샀다. 초콜릿 시럽으로 그린 하트 문양 둘레로 딸기와 키위 조각을 얹은 생크림 케이크였다. 과일과 포도주는 어머니가 준비했다. 초를 꽂을 때 잠깐 다퉜다. 어머니는 그것도 모르느냐며 우리를 힐난하더니 집게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르고 슬며시 안방에 들어갔다 나왔다. 그리고 마흔여덟이라고 말했다. 동생은 쿡쿡 웃었다.
  “엄마, 아빠는 엄마 서방이지 제 서방이 아니잖아요.”
   (……)
   아버지는 식탁에 다가와 손을 번쩍 들었다. 반갑다는 뜻이었다. 때로는 다른 의미일 수도 있었지만, 하마터면 나도 손을 마주 들 뻔했다. 동생 덕분에 그런 실수를 피할 수 있었다.
   “아빠는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오빠, 가서 문 닫아버려.”
   (……)
   아버지는 주연으로 발탁된 무명 배우처럼 쑥스러워했다. 나는 지루한 척을 하느라 엉덩이를 의자 끝에 걸치고 거만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자세로 고쳐 앉았고 아버지와 눈길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
  “애들아, 여기 뭐가 있는 것 같지 않니? 무슨 소리가 난 것 같구나. 그런데 언제 이렇게 의자가 밖으로 나왔지?”
  존경스런 어머니였다. 그 말을 동생이 두꺼비가 혀를 내밀어 파리를 낚듯 날름 받았다.
  “그건 내가 발로 밀었어.”
  끈끈하기 짝이 없는 대화였다. 모녀는 죽이 척척 맞았다.
   (……)
  식당에 앉은 채로는 아버지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나만 깨달은 게 아닌 듯했다. 어머니가 맨 먼저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갔고 동생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마저 사라지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베란다를 택했다.
  (……)
  아버지는 어떤 기분일까. 식구들이 자신을 모른 체하는 게 혹시라도 무시하는 것처럼 여겨지지 않을까.
  (……)
  거실 한구석에 아버지는 말라 죽은 고무나무처럼 섰다. 나는 아버지가 손뼉을 치며, 자자, 내가 졌으니까 이제 그만하자. 이만큼 놀렸으면 충분하잖아,라고 말해주길 기다렸다. 조금 과장된 포즈를 취한대도 분노를 터뜨리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쯤에서 신경전이 펼쳐진 듯했다. 그러니까 어느 쪽도 먼저 항복하기 싫었던 것 같다. 우리는 우리대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상대쪽이 먼저 고개 숙이길 바랐다. 
 
 
작가_ 손홍규 - 1975년 전북 정으에서 태어나 2001년 《작가세계》신인상으로 등단. 소설집『사람의 신화』『봉섭이 가라사대』『톰은 톰과 잤다』장편소설『귀신의 시대』『청년의사 장기려』『이슬람 정육점』등이 있음.
낭독_ 변주현 - 배우. 연극 <흑인 창녀를 위한 고백> 등에 출연.
강선희 - 배우. 연극 <죽음(혹은 아님)>, <수업> 등에 출연.
변인숙 - 다페르튜토 스튜디오 드라마터그, 신촌콘서트 피디.
출전_ 『톰은 톰과 잤다』(문학과지성사)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메이션_ 박지영
프로듀서- 김태형

  생일 이벤트로 시작한 투명인간 놀이가 점차 아버지를 잃어버리는 국면으로 접어듭니다. 실상 오래 전부터 그 가장은 아내와 자식들에게 투명인간이었는지 모릅니다. “아버지를, 아버지의 삶을 닮지 않겠어요!” 우리의 현대사를 대변하는 여러 말 중에 아들들의 이 목소리만큼 유력한 소리가 또 있을까요. 아들들에게 아버지는 가부장적이고 무뚝뚝하고 비굴하고 무능해서 때로는 사라지기를 바라는 존재로 기억되곤 합니다. 프로이트의 진단까지 곁들이면 이 목소리는 더 유구했는지도 모릅니다. 요즘 젊은 세대 작가들이 그리는 소설에서도 아버지의 초상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머니들이 더러 아버지와 같은 초상으로 호명되기도 한다는 점이 조금 다르다고 할까요. 아버지의 자리는 저에게도 여전히 숙제입니다. 자라면서 아버지를 원망하고 부정하고는 했지요. 이제는 아버지 된 입장에서 좋은 아버지로 남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쉽지 않지요. 요새 들어 이런 생각을 중얼거려보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자식의 몫이다.” 이 말은 내 아버지에게로, 아이들에게로 향해 있습니다. 이 오답이 앞으로 어떻게 수정될지 모르지만 얼마간 갑갑한 숨통이 놓이는 건 사실입니다.
 
문학집배원 전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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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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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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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익명

    공감합니다. " 부모는 자식의 몫이다" 부모의 영향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있는 삶이 얼마나 될까요??

    • 2012-11-04 12:30:32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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