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창 소설가의 『지구에 커튼을 쳐줄게』
- 작성일 2024-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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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경이 사는 곳은 용희가 익히 경험해 본 장소였다. 대학 시절 같은 과 동기의 자취방이 꼭 저랬다. 여름에 동기의 자취방은 주변에 햇빛을 가려 줄 만한 큰 건물이 없어 작은 냉장고에 몸을 쑤셔 넣고 싶은 집으로 탈바꿈했고, 매서운 바닷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에는 동면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한계를 뼈 시리도록 반성케 하는 집으로 변모했다. 도경의 집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가림막 하나 없는 여름 한낮의 옥탑방은 재난 지역으로 선포해도 무방했다.
딱 한 가지 좋은 점은 상쾌한 가을밤이 내려앉았을 때 옥상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담배를 피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캔 맥주가 손에 들려 있으면 더 좋았다. 용희는 옥탑방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생각했다. 도경에게 캔 맥주 한 박스를 몰래 사다 주는 것 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 같다고. 용희는 긴 한숨을 내쉬며 언덕길을 내려다보았다. 도경이 검은 봉지와 막대 아이스크림을 손에 쥐고서 자신이 있는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도경이 용희를 알아보는 데 쓰인 10초는 용희에게 머나먼 북극의 바다를 두어 번 갔다 오는 시간만큼 길게 느껴졌다. 당황한 용희는 마찬가지로 어찌할 바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도경을 향해 소리쳤다.
“제가 지구에 커튼을 쳐 드릴게요!”
도경은 입을 벌린 채로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용희는 도경의 집 옥상에 놓인 평상에 앉아 바다를 내려다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지난 5년간 얼핏얼핏 그려 왔던 일이, 지난 이틀간 문득문득 상상했던 순간이 눈앞에 당도했다는 기쁨에 용희는 이마에서 얼굴로 주르륵 흘러내리는 땀방울도 잊은 채 자신의 심장 소리에만 주의를 기울였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것을 처음 알게 된 순간에도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그러나 그 역시 정해진 트랙을 벗어나 날뛰는 소리는 아니었다. 용희는 심장이 악보 없는 음악에 홀려 무작위의 춤을 추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처음으로 천문대를 찾았을 때 광활한 우주를 탐사하며 느꼈었던, 거대하고 두려운 무언가가 눈앞에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예측불가능한 불안함 속에서도 주체할 수 없는 흥분으로 몸을 떨던 때의 심장 소리였다. 그때, 도경이 옥탑방에서 나와 유리컵 두 개와 감자칩을 담은 그릇을 평상에 내려놓았다.
도경은 평상에 편하게 앉더니 검은 봉지에 든 맥주 세 병을 꺼냈다.
“병맥주 한 병을 마셨을 때 기분이 제일 좋아요. 그제 제 주량이에요. 더 마시면 정신 줄 놔요.”
용희는 물었다. 그런데 왜 세 병을 샀느냐고.
“술이 술을 부르니까.”
용희는 빙긋 웃었다. 도경은 용희의 컵에 맥주를 따른 후 자신의 컵을 스스로 채웠다. 건배 없이 도경이 먼저 맥주를 들이켰다. 용희도 마셨다. 도경이 말했다. 정말 화를 참을 수 없었다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내 탓은 아닌 것 같은데, 정말 내 잘못은 아닌 것 같은데.”
용희는 위로하듯 말했다. 폭염이, 도경 씨 잘못은 아니라고. 도경은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이후 침묵이 찾아왔다. 검은빛을 내며 출렁이는 바다가 대화를 대신했다. 건배 없이 술잔이 꺾이고 또 꺾였다. 도경이 두 병을 마셨고, 용희가 한 병을 마셨다. 도경이 술을 더 사 오겠다는 것을 용희가 말렸다.
도경은 두 팔을 뒤로 뻗어 평상을 짚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용희도 똑같은 자세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용희는 생각했다. 지구에 커튼을 치면 저 별빛도 가려지는 것 아닌가? 도경이 불쑥 물었다. 춤출래요? 용희는 깜짝 놀랐고 손을 저었다.
“탱고 알죠? 어렵지 않아요. 제가 가는 길을 따라오기만 하면 돼요.”
도경이 휴대폰으로 음악을 틀었다.
“이제 제일 유명한 곡이에요.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리베르탱고」. 근데 이 연주는 아이세 데니즈가 편곡한 거예요. 더 빠르고 격정적으로.”
두 사람은 출구 없는 열대야 속에서, 술과 대기 온도의 절묘한 조합으로 불콰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아이세 데니즈의 연주를 잠자코 들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게 만드는 곡이라고 용희는 생각했다. 연주가 막바지에 이르자 도경이 평상을 내려가 용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용희는 계속 거절하다가 못 이기는 척 도경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김기창 「지구에 커튼을 쳐 줄게」,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 민음사, 197-201p.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이라니. 지난여름 어찌 나셨나요? 인간의 체온보다 높은 기온. 역대 최악의 폭염. 역대 최장기간 열대야. 여름의 역대 기록을 경신하는 것은 이제 놀랍지도 않습니다. 내년 여름에도, 후년에도, 그 후년에도 기록경신은 계속 이어지겠지요.
집이 너무 더워 머물 수가 없다고 민원을 넣은 남자를 찾아가, 지구에 커튼을 쳐 주겠다 말하는 여자. 저 하늘의 별을 따 주마보다 신선한 고백입니다. 옥상 평상에 앉아 시원한 맥주를 나눠 마시고 탱고를 추자고 제안하는 남자. 여기까지는 꽤 낭만적인 출발처럼 보입니다. 이제 날카롭고 뜨겁고 격정적인 탱고의 스텝을 밟으면 될 일.
그런데 왼발 오른발 빠르게 밀고 느리게 밀리며 알게 된 이야기. 여자에게 사랑의 예감을 준 남자의 눈빛은 신호가 아니었다는 것. 공무원 시험 합격만이 인생의 다음 발판이라 여기며 견뎌온 지옥 같은 날들. 남자는 자기가 있어야 할 곳에 앉아 있는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 민원을 넣어 괴롭히고 쫓아내고 싶었을 뿐이라는 것. 차라리 폭염으로 지구가 폭삭 무너져 내렸으면 좋겠다는 심정이 들 수밖에. 기후변화는 위기가 아니라 재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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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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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2024-07-25
봄을 세 번 나는 동안 벌통들에서 차례로 벌들이 부활했다. 벌들로 들끓는 벌통들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죽은 아버지가 되살아난 것만 같은 흥분에 몸을 떨었다. 아카시아꽃이 지고 온갖 여름 꽃들이 피어날 때, 마씨와 나는 벌통과 함께 산에 들었다. 마씨는 벌들이 날아가지 못하게 벌통을 흰 모기장으로 감싸고 지게에 져 날랐다. 마씨의 뒤를 따르는 내 손에는 해숙이 싸준 김밥 도시락이 들려 있었다. 그날따라 너무 깊이 드는 것 같아 주저하는 내게 그가 재촉했다. “꽃밭을 찾아가는 거야. 조금 더 가면 꽃밭이 있지.” 정말로 조금 더 가자 꽃이 지천이었다. 토끼풀, 개망초꽃, 어성초꽃, 싸리나무꽃··· 홍자색 꽃이 흐드러지게 핀 싸리 나무 아래에 그는 벌통을 부렸다. 벌통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마씨와 내가 알몸으로 나뒹구는 동안 벌들은 꿀을 따 날랐다. 고슴도치 같은 그의 머리 위로 벌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나는 꿈을 꾸듯 바라보았다. “당신 아내가 그러데, 나비를 기르면 좋을 거라고. 나는 나비가 벌보다 무서워. 우리 할머니가 나비 때문에 눈이 멀었거든. 도라지밭을 날아다니던 흰나비의 날개에서 떨어진 인분이 눈에 들어가서···” “해숙은 착한 여자야.” “착한 여자는 세상에 저 벌들만큼 널렸어!” “널렸지만 착한 여자와 사는 남자는 드물지.” 여름내 마씨와 내가 벌통을 들고 산속을 헤매는 동안 해숙은 아들과 집을 보았다. 우리가 돌아오면 그녀는 서둘러 저녁 밥상을 차려내왔다. 먹성이 좋은 마씨를 위해 그녀는 돼지고기와 김치를 잔뜩 넣고 찌개를 끓였다. 그녀에게 나는 산속에 꽃밭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벌과 나비가 어울려 날아다니는 꽃밭이. “우리도 데려가면 안 돼?” 그녀는 꽃밭을 보고 싶어 했다. “꽃밭까지 가는 길이 험해서 안 돼. 가는 길에 무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무덤들 중에는 내 아버지 무덤도 있지.” “근데 읍내 정육점 여자가 내게 묻더라.” “뭘?” “사내 하나에 계집 둘이 어떻게 붙어사느냐고.” “미친년!” “정말 미친년이야. 내가 살코기하고 비계하고 반반씩 섞어 달라고 했는데, 순 비계로만 줬지 뭐야.” 눈치챘던 걸까. 아니면 벌과 나비가 어울려 날아다니는 꽃밭을 보고 싶었던 걸까. 그날도 마씨와 나는 벌통과 함께 산에 들었다. 해숙이 우리를 몰래 뒤따르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나는 모르는 척했다. 해숙은 산벚나무 뒤에 숨어 마씨와 내가 토끼풀밭 위에서 알몸으로 나뒹구는 것을 지켜보았다. 날이 어두워져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들은 마당에서 혼자 울고 있었다. 부엌 도마 위에는 해숙이 정육점에서 끊어온 돼지고기가 덩그
- 관리자
- 2024-06-27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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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뜨거운 공기를 붙잡던 커튼이 펄럭거리듯, 용희 마음이 펄럭거렸다. 열정의 거리는 폭염과 무관하다. 즐겁게 잘 듣고 일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