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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버지니아 울프를 만났다」

  • 작성일 2008-08-21
  • 조회수 4,406



 

「버지니아 울프를 만났다」조경란

 

  나는 거의 아무도 눈에 띄지 않을 것 같은 희미한 회색 색연필을 쥐고는 동그란 원들이 얽혀 있는 패턴이 인쇄된 방바닥을 칠하고 있었다. 내가 원과 삼각형, 사각형을 그린 그림을 내밀었을 때 할머니가 나를 바라보던 눈빛이 생각난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 할머니가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던 그림을 도로 집어 맨 처음에 그린 원 하나만 남기곤 그 옆에 있던 세모와 네모를 지우개로 쓱쓱 지웠다. 그리고 처음에 그렸던 동그라미 옆에 나란히 제각각 크기가 다른 세 개의 원을 더 그렸다. 두번째 원은 노란색 크레파스로 칠했고 세번째 원은 마블 느낌이 나도록 초록색과 보라색을 뒤섞여 칠했다. 마지막 원에는 중간에 둥근 띠를 그렸다. 그리고 나는 할머니에게 말했다.

자, 봐 할머니. 나를 지구라고 치자.

나는 맨 처음에 연필로 그린 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게 나야. 그 옆에 이 노란색은 화성이겠지. 그 옆은 목성일 테고, 그 옆에 띠를 두른 건 토성. 지구랑 가장 가깝게 붙어 있는 이 노란색 화성이 바로 할머니야.

나는 모처럼 내 생각을 제대로 표현한 것 같아 약간 우쭐해지기까지 했다. ……화성 안으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지금은, 우는 할머니도 볼 수가 없다. 나는 플리니의 방바닥에 그려져 있는 여러 개의 원을 색칠했다. 떠나는데 아무것도 줄 게 없어서 동그라미 하나를 유독 진하게 색칠하고는 너는 나의 토성이야 소냐, 라고 혼잣말을 했다. 그럴싸하게 띠를 그려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나의 책. 아직 씌어지진 않았지만 이렇게 읊조릴 때마다 안도가 되는 것을 느낀다. 내가 만약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면 내 인생은 그냥 빈 종이로만 남을 것이다. 이제 원하는 게 생겼으니 늦어도 내일은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나는 나의 지난여름과 할머니와 소냐,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에게 작별 인사를 할 요량으로 창밖을 향해 목을 길게 빼곤 아우우, 아우우, 짐짓 구슬피 우는 시늉을 해본다.

  

● 출처 :『풍선을 샀어』, 문학과지성사 2008

 

● 작가 : 조경란-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나 199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로 등단. 소설 『식빵 굽는 시간』『불란서 안경원』『코끼리를 찾아서』『혀』『풍선을 샀어』등이 있으며, 현대문학상, 문학동네 작가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등을 수상함. 

 

● 낭독: 주인영- 배우. 연극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 <내 동생의 머리를 누가 깎았나> <선착장에서> 등에 출연.

지구의 옆에는 화성이 있고, 금요일의 옆에는 토요일이 있고, 레종의 옆에는 던힐이 있군요. 메타세쿼이아의 옆에는 느티나무가 있고, 시집 <사무원>의 옆에는 과학책 <여섯 개의 수>가 있고, 바람의 옆에는 흔들리는 나뭇잎이……. 아마도 살아가면서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찬사는 “내 옆에는 네가 있어”라는 말이 아닐까요. 방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리든, 가게에 가서 레종과 던힐을 사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가리키든, 그게 얼마나 웃긴 말이든, 그게 “내가 레종이라면 너는 그 옆에 붙어 있는 던힐”이라는 말이든 부디 말할 기회를 놓치지는 마세요. 우는 할머니도 볼 수가 없게 되기 전에.

 

2008. 8. 21. 문학집배원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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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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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3건

  • 익명

    내 감성을 지켜준 그 곁에는... 늘 김연수의 글이 있었죠. ㅎㅎ

    • 2008-09-16 12:00:53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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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그래, 지구 옆에는 화성이 있어. 왜, 우린 오래전에 '수금지화목토' 이런식으로 외웠잖아. 그래서 그런지 화성이라는 말이 너무 익숙해서 아주 가까이 있는 것 같아. 그러니까 우주적으로 얘기하면 정말 아득히 먼 거리잖아. 나는 그래서 종종 떠올려 '수금지화목토...'

    • 2008-08-25 09:13:51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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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김연수 작가를 좋아하는 19살 수험생입니다. ^^ 메일로 배달되는 문장 항상 잘 보고 있어요. 처음으로 로그인해서 글 남겨봐요. 좋은 문장 배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나라 교육제도는 열아홉의 감수성을 짓눌러버려서 항상 뭔가 부족하고 갈급한 느낌이 들었는데 매주 이런 문장들 배달받고는 뭔가 마음이 가득 찬 느낌을 받습니다. ^^

    • 2008-08-22 13:59:32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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