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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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바다
바다 김유태 지하의 탁자에서 잠깐 잠이 들었을 때 누군가 나의 어깨를 잡아끌었네 눈을 뜨자 모자를 눌러쓴 뒷자리 노인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사전을 넘기며 노트에 다른 단어를 같은 모양으로 베끼고 있었네 하얀 분장을 한 피에로가 두 손을 번갈아가며 자기의 이마를 때리던 중이었고 졸린 눈의 어린 성악가는 몇 개 남지 않은 이로 복화술을 하며 빠르게 병에 걸려 죽어갔네 검은 옷을 입은 환자들은 한 컵의 물을 다른 컵으로 천천히 옮겨 담기를 반복하다 한 곳을 바라보았고 문득 나는 이곳이 퇴실 없는 밤중의 도서관이 아니라 세계로부터 유실된 사람들이 모여든 나의 잠 속이란 걸 알게 되었네 떼를 지어 이리저리 잠 속을 이동하다 지쳐 탁자에 모인 기생의 유령이 노래가 담긴 가방을 가지고 나의 잠 앞에 모여들었네 저 잠의 경계에서 본 백색 유령의 허연 이마가 나의 백지이자 시의 연안이었다는 것을, 노인의 노트가 나의 산책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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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바다 묘지
바다 묘지 채인숙 여전히 믿을 수 없지만 나는 살겠지 비가 되려다 멈춘 물보라가 사정없이 얼굴을 치고 새들이 폭격기처럼 솟아오르는 바다를 바라보겠지 너도 살아야지 가령, 당신은 사라지고 세상에 몸이 아닌 건 없었다고 불안하고 하찮은 기억들을 추스르겠지 언젠가 당신이 하려던 말이 언젠가 당신에게 하려던 말이 검은 비석 아래 까마득한 수심으로 잠기고 용서를 바라지 않아도 파도는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겠지 그만 가보자고 가서 살아 보자고 남은 생을 바다 쪽으로 힘껏 당겨 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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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최원준 다만 네가 출렁이는 내 삶의 단 하나의 부표이기를 지쳐 멍하니 수면만 바라보고 있을 때 잔물결 일으키며 그 곳에 네가 있어 주기를 이렇듯 끊임없이 흔들리는 게 살아가는 일 아니겠느냐며 내 삶의 맞은편에서 너 또한 흔들리고 있어 주기를 그래 어느 날 낡고 부서져 헐거워진 몸으로라도 그대를 찾는다면 균형을 잡지 못하는 기우뚱한 어깨 위 이제 흔들리지 않아도 된다는 위안처럼 소금기 짙은 편지 한 통 띄워 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