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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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통사 - 사람 외 1편
통사 김연필 수명이 다한 낡은 집을 본다. 집은 언제까지고 어디까지고 살아 있을 줄만 알았다. 이제 집은 죽고, 집의 형체만 남고, 집의 형체만 남은 이것을 뭐라고 불러야 될지 모른다. 나는 이를 집의 잔해라고 부르련다. 집의 잔해를 보며 나의 잔해를 상상하련다. 나의 잔해 또한 이것처럼 단단할 것이고, 또한 이것처럼 초라할 것이고, 또한 이것처럼 아무런 입도 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수명이 다한 낡은 너를 본다. 수명이 다해 언제까지고 어디까지고 걸어가는 너를 본다. 나는 네게 잔해라 부르지 못한다. 너의 등에 어떤 문법이 붙어도 너를 잔해라 부르지 못한다. 나는 집의 잔해를 향해 다가가고, 나는 나의 잔해를 향해 다가가고, 나는 너의 잔해를 상상하고, 그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너의 잔해는 너무 단단하다고 생각하며, 너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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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내가 산란한 하루
붉은 원색으로 내 수명에 들어온 태초는 나의 하루하루를 먹어치우며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내 기억이란 육식성 이빨로 무장한 불사신이여; 내가 나를 산란하여 나의 태초가 된 첫사랑이여, 오늘은 기어코 널 방생하겠다. 나를 떠나 회항하지 말라! 내 마지막 하루까지 잡아먹고 영생할 너는 돌아올 것이다, 수명보다 하루 적은 수를 헤는 내 습관이 너의 회귀본능이었으므로. 부득이 나는 나에게 환생을 선고할 것이다. 첫사랑의 하루를 기억하고 죽는 사람은 자연이 사람에게 지은 죄를 모두 사한 것이므로. 그리하여 첫사랑은 또다시 산 사람의 수명에 들어 원색을 산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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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로봇 단테 1
수명그룹 총수 장수명 회장은 단테를 구입하는 대가로 드림 차일즈에 제2공장 건설 부지를 내놓았다. 수도권 서쪽에 자리한 삼십만 평 공장 부지는 장 회장이 지닌 수십조 원 재산의 원천인 곳이었다. 장 회장은 작은 뻘밭에서 소금을 긁어 파는 일로 장사를 시작해 지금과 같은 거대 무역회사 수명그룹을 키워낸 전설의 인물이었다. 정확한 나이나 출신 배경은 아무도 몰랐다. 일찌감치 고아가 되었다는 전설의 시초만 창업주 홍보물 도입부로 지겹도록 등장했다. 어차피 세상은 과거에 큰 관심이 없었다. 장 회장이 지닌 현재 부의 크기, 앞날의 전망에 더 치중했다. 다행히 장 회장은 맨주먹으로 큰 부를 이룬 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전노 노랑이과는 아니었다. 세상을 위해 부를 호쾌하게 쓸 줄 알았다. 자선단체치고 수명그룹의 후원을 받지 않은 데는 거의 없었다. 장수명 회장이 우주선 수명호를 띄우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놀란 건 당연했다. 수명그룹이 우주 사업에 뛰어들려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