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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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그것-우리 외 1편
그것 오은 중요한 순간, 중요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빨랫줄에 널려 있던 빨래가 날아간다 바로 그런 점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분산시키려고 시원하게 재채기한다 빨래집게의 손아귀가 자유로워진다 바로 그런 선에서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그 말이 재채기에 실려 날아갔어요 날아가던 빨래가 나뭇가지에 걸린다 바로 그런 면에서 열리고 닫히고 다물고 벌리고 점찍고 선 넘고 면을 이루어도 빨래는 마를 의지가 없고 단어는 돌아올 여지(餘地)가 없고 내 땅이 아니어서 산뜻 그것을 치지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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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제8회 문장청소년문학상_대상_이야기글] 비염
비염 최선혜(최 솔) 코끝이 간지럽다 싶더니 예상치도 못한 재채기가 우스꽝스러운 소리와 함께 킁, 하고 터져 나왔다. 콧물이 찔끔 흘러나오는 느낌에 서둘러 두루마리 휴지를 끊어 코를 훔치고선 큰 죄를 지은 대역죄인 마냥 펼쳐 둔 책 위로 고개를 숙였다. 칸막이에 가려져 있지만 모두가 눈을 들어 나를 쏘아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죄책감이 들 정도로 커다란 재채기였는데도 코 막힘은 여전했고, 내장 가장 밑 부분까지 답답해져 오는 느낌에 조심조심 킁킁대며 코를 풀었다. 조금 괜찮아지는가 했더니만 어느새 다시 간질간질 신호를 보내오는 덕분에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야 했다. 알레르기성 비염이 생겨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콘택트렌즈를 사용하면서부터, 그러니까 한 일 년 반쯤 됐나. 초반에는 이렇게 심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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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주머니 - 非 외 1편
주머니 차성환 내가 지금 입고 있는 바지의 주머니는 네 개이고 잠바에도 두 개가 있어서 왼손과 오른손을 이 여섯 개의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며 이리저리 집어넣어 보고 그러다 보면 내가 몸 안에서 덜컹거리기도 해 잘 맞지 않는 공간과 틈이 조금씩 벌어져 나는 헐거워지고 몸 주머니 안에서 빠져나올 것처럼 들썩이다 결정적인 재채기 한 방에 나를 훌렁 벗어 던져 순식간에 불량한 자세로 주머니에 손을 꽂은 내가 걸어간다 (연희문학창작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