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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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비평 ‘다정함’ 담론과 여성 가장의 이중 책무
실비아 페데리치는 근대 초기에 여성의 가정 내 돌봄 노동을 착취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시초축적이 가능했다고 주장13)하는데, 오늘의 가정 정치는 여성의 경제적 노동과 가정 내 돌봄 노동을 ‘모두’ 착취하며 유지된다. 가정 안에서 여성의 경제 활동은 언제나 부차적이고 보조적인 것으로 명명되며, 육아를 전담하고 이해심을 발휘해 가족 구성원들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 일은 그저 ‘다정함의 발현’으로 당연한 것처럼 요구되는 실정이다. 사라 아메드는 2014년에 『감정의 문화정치』 개정판을 출간하면서 꽤 긴 후기를 덧붙여두었는데, 책의 의의를 밝히는 이 글은 이렇게 끝난다. “이른바 올바른 감정에는 옳지 않은 것이 담겨 있다.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에 주목한다.”14) 본고에서 살펴본 여성 가장 서사들은 ‘무해·다정·안온’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다정’이 가정 안에서 요청될 때, 거기에 깃들어 있는 모종의 마음을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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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수필 아들이 물었다
남편은 그저 ‘모르는 권력’을 쥔 사람으로서 어머니가 만들어 놓은 모든 것을 누리기만 하면 되는 존재, 가정 내의 특권층이었던 것이다. 친정집은 1년에 여덟 번 기제사를 지냈다. 제사 때마다 여자들은 진종일 음식을 장만했고, 잿밥을 지어 상을 차렸다. 이상하게도 겨울 제사가 많았는데, 북풍한설 매서운 날 한밤중에 불 때서 밥 짓고 제상을 차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제사를 마치면 보통 새벽 한 시가 넘었고, 음복까지 하면 두세 시가 되는 것은 예사였다. 대청에서 제사를 마친 남자들은 따뜻한 방안으로 옮겨 앉아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자기들이 차린 제상에 절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던 여자들은 불기 걷혀가는 부엌에서 제꾼들 뒷수발을 들어야 했다. 그것은 내가 기억하는 남녀불평등의 기원이었다. 친정집의 불행은 큰오빠가 아들을 낳지 못하면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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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수필 벽문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노력해 수재들만 들어가는 과학고등학교에 입학한 학생의 학교생활을 담은 내용이었다. 열악한 가정 환경과 학습 여건에도 불구하고 과학고등학교의 높은 벽을 넘어 당당히 합격한 학생의 모습은 참으로 대견스러웠다. 매사에 열정적인 학생이라 입학 후 학교생활도 순조롭게 잘 풀려 나가리라 보였다. 하지만 재학 중의 학업 성적은 늘 하위권에 머물렀다. 빈부의 차이라는 또 하나의 높은 벽이 그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유한 친구들처럼 어릴 때부터 고액 과외를 통한 선행 학습을 받지 못한 탓에 아무리 치열하게 공부해도 성적이 계속 하위권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숙명이지만 부단한 노력을 통해 학업 성적의 벽은 뛰어넘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대다수 가정이 가난했던 옛 시절과 달리 빈부의 격차가 심해진 요즘은 그 또한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