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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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대기의 강
대기의 강 이병국 제 몫의 우산을 기다리는 아이가 천변을 걷는다 풀 위로 허리가 베인 풀 위로 비는 쏟아지고 적요한 걸음에 놓인 무성한 층계참 날카롭게 긋는 물비린내 넘실거리며 밀려난 이들의 빗금 친 얼굴 사이로 일렁이는 그림자 둔한 발끝과 저물녘 강물에 끓어 넘친 삶과 붉은 터널과 기록적인 폭우 멈추지 않더라는 닫힌 결말을 상상하며 젖은 몸을 뒤집어쓴 아이가 납작한 거울 속에서 모르는 이름을 줍는다 완만한 깊이로 잠든 물빛과 기다리던 꿈의 얼룩 외면한 채 질척거리는 여름과 뒤틀린 이후의 필연 쾌청한 날을 알고 있던 아이가 기울어진 우산 너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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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강물의 깊이
[단편소설] 강물의 깊이 이승우 그녀는 일주일 전에 처음 그를 보았다. 그는 강물을 향해 앉아 있었다. 강물이 그의 발끝을 핥으려고 몸을 쭉 펴서 다가왔다가 둥글게 말아 물러났다. 강물은 그 움직임을 지치지도 않고 반복했다. 그곳은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이고, 또 풀이 우거져 있기 때문에 멀리서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산책을 나온 사람들은 강변을 따라 잘 조성된 산책로를 걸었다. ‘이곳은 수심이 깊어 위험하니 들어가지 마시오.’라고 적힌 경고판을 무시하고 안쪽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없었다. 그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그 경고판을 무시한 사람은 그녀가 유일했다. 아닐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주로 해가 질 무렵에 집에서 나와 강가를 걷거나 뛰었다. 그녀에게 걷거나 뛰라고 권유한 사람은 ‘마음클리닉’의 원장이었다. “땀을 흘리세요. 뛰거나 빠른 걸음으로 걸으세요. 피곤해질 때까지 몇 시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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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북한강 - 강의 사막을 듣다 外
북한강 정영주 누구에게 이렇게 막막히 들어간 적이 있을까 내 안에 나와 한번도 합일되지 못한 강 그 속을 들여다보니 깊이 고랑이 패여 있다 고독한 저 곡괭이 자국 누가 흐르는 땅에 곡진한 씨앗을 심으려 했을까 한번도 심지 깊은 눈길 주지 못한 스스로 강이 되어 비껴간 시간들만 물 속에 주름 접혀 있다 물길 깊은 강 금기의 깡통 속에서 종을 쳐대던 바람이 강물의 표피만 긁고 간다 강물에서 이명소리가 난다 그도 귀앓이를 하는 모양이다 속 깊은 아픔을 바람도 건드리지 못 한다 제 몸을 끊임없이 갈아엎어 논 물 속의 토지에 내가 버린 발바닥이 꾹꾹 찍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