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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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수필 다음에는 날 도와줄 거야? 외 1편
해방감 때문인지 그냥 체온이 내려간 건지 가슴까지 후련하다. 마리나는 여기까지 왔는데 아쉽다며 한차례 평영을 하고, 클레어는 새, 거북이, 물고기도 다 같이 있는데 물속이 어떻겠어, 라고 트집을 잡으면서도 깔깔 웃으며 수다를 주도한다. *** 각자 수강 중인 선택 과목들을 비교하고 있을 때, 산책로 쪽에서 누군가가 나를 정면으로 쏘아본다. 캡모자를 거꾸로 쓰고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그 남자는 대여섯 명이 줄지어 지나가는 무리 속에 있는데, 호리호리하고 얼굴이 앳된 것이, 십 대 후반인 듯하다. ‘왜 쳐다보지? 하긴, 십 대들한테는 누드 일광욕이 자극적이겠지.’ 햇살 아래서 한껏 너그럽고 평화로운 나는 십 대 아이들이 귀엽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날 쏘아보던 남자애가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폭발하듯 소리친다. “니하오! 니하오!” 꼭 화난 사람처럼 인상을 찌푸리고 힘껏 소리치는 그의 입에서 ‘안녕’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 너무 어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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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얼굴을 비울 때까지
삼층 층계를 내려가다가 미끄러져 셋이 모두 굴러 떨어질까 봐 조심조심 한 계단씩 내려갔다. 한 층을 내려오니 빛이 한 단계 어두워졌다. 마네킹의 머리 쪽을 잡고 있던 서영은 어둠 속에 멈추어 서서 상체를 돌려 내 시선을 찾았다. 그 순간 나와 서영은 동시에 우리를 사로잡은 이상한 기분에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에 둘이 공모해 해치운 시체를 옮기는 것만 같은 묘한 느낌. 그러나 서영은 이내 딴청을 부렸다. “에잇, 이대로 저 밑에 던져버릴까?” 갑자기 우리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고 그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웃다 보니 양손에 힘이 빠져 하마터면 진짜 마네킹 시체를 놓칠 뻔했다. 마네킹을 어두운 골목에 버려두고 우리는 막 떠나온 빈 〈말타〉를 올려다보았다. 실내에 불을 켜놓은 채였다. “내가 올라가 불 끄고 올게.” 어렵사리 내려온 층계를 다시 오르려 했을 때 서영이 내 팔을 잡아당겼다. “〈말타〉의 마지막 기억이 환해야지! 켜두고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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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엄마에게 물었다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난 현실감을 잃고 있었다. 화장실이 보였고 그 옆으로 커피숍의 불빛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이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바리스타인 최 양이, 뒷문으로 알몸을 하고 들어오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란다. 커피 라떼를 만들려고 들고 있던 우유 곽을 떨어뜨린다. 자전거 라이더 복장을 한 손님들이 돌아보며 입을 딱 벌린다. 몇 명은 웃음을 터트렸고 여자들은 비명을 질렀다. 아니다. 난 문을 열다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고 그래서 주춤거렸고, 뒤로 나 있는 계단을 밟고 3층 숙소로 올라갔다. 난 그때 3층 숙소로 올라갔다고 생각했다. 문에 있는 잠금 장치를 풀고 들어가 곧장 침대에 몸을 던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올라간 것은 숙소로 가는 계단이 아니라 다이빙대 사다리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 사무실 계단으로 올라갔는데 보니까 내가 다이빙대에 서 있더라고. 며칠 뒤, K에게 그 얘기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