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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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화병이 놓였던 자리 外
고영민의 시가 몸을 통과하는 방식은 ‘웃음’에 있다. 웃음은 근대 미문주의와 숭문주의 전통에 젖어서 문자문화적 감수성을 내면화한 채 잔뜩 긴장하고 시를 읽던 독자들을 일순간에 해방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니! 시인은 시를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고매한 영혼들이 상을 찌푸릴만한 이 시의 구김살은 마침내 부드러운 결이 되어 몸에 가장 친근한 언어적 형식으로 귀환한다. 고영민 시의 웃음은 친숙한 사물들을 유쾌하게 뒤틀면서 자동화된 의식을 부드럽게 깨트리는 데서 발생한다. 이 ‘뒤틈과 부드러운 파격’은 싸늘한 지성에 의해 향유자들을 주눅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결리고 뭉치고 맺힌 동시대의 삶을 다감한 눈길로 풀어준다. 즉 심야의 아파트 못질 소리도 “즐거운 소음”으로 만들고, 낯선 여자와의 남루한 동승마저도 천불천탑을 쌓는 황홀한 동침으로 변모시켜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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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기어가는 기분 외 1편
기어가는 기분 고영민 고영민 뱀을 보았다 뱀은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낮은 풀들 사이를 꼿꼿이 선 채 걸어가고 있었다 길고 검은 그림자 하나가 같은 보폭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끈이 풀린 것처럼 나는 갈림길에 서 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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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공손 외 1편 (윤성학)
공손 윤성학 호각이 울리고 프리킥이 선언되자 파울을 저지른 자들 억울하다며 길길이 날뛰다가 억울한 자들이 그러하듯 옹기종기 어깨를 맞대고 서서 뭐 대단한 거라고 낭심 위에 공손히 손부터 올려놓았다 * * 고영민의 시 「공손한 손」에서 빌려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