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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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나혜석을 보는 나혜석 - 부디 나무뿌리처럼 늙어라 外
나혜석을 보는 나혜석 -수원 莞葉에게 고형렬 자신의 딸 같은 나혜석이다 자신을 쳐다보는 나혜석을 모르는 나혜석은. 나혜석을 향해 가는 장님달 나혜석은 자신의 시간을 해체할 수 없다 핸드백을 팔에 걸고 하늘로 솟아버릴 듯 어디론가 출타하는 나혜석, 멀리 나앉아버린 생 자기 앞의 전기 나혜석 자신의 어머니 같은 나혜석의 후기 생 이 거리에선 다른 나혜석이 존재하지 못한다 이제 자신을 잊어가는 부조浮彫의 나혜석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껍데기 여름에도 겨울에도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다 두 손 포갠, 조용한 망각의 한 여자 하나는 둘 하나는 둘 아닌 말없는 나혜석 한밤 혼자 꿈 안 꾸는 나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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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흰 비둘기 아파트 외 1편
흰 비둘기 아파트 고형렬 오랜만에 찾아온 그 아파트는 따뜻하였다 양평에선 광열비가 무서워 이불 속에서 장자를 읽고 여행을 간다 십 년 파란 하늘 아래 어느 낯선 이의 한 구절이 지나가는 아파트는 언니 집 근처에서 구름과 사는 칠층 하늘 바라보고 누워서 늘 눈 감던 그 창과 그 발코니와 그 거실들 남의 아파트 사이로 김포 강안이 내다보이는 서울 서쪽은 늘 불안하게 해가 떨어지던 곳 흰 페인트칠한 한낮의 아파트 너머로 정오는 몇 마리 흰 비둘기를 넘겨주고 있다 다치지 않은 머리 위 높은 옥상 끝에서 그날의 햇살들은 여전히 쪽쪽, 쪽쪽거리며 작은 젖니로 고드름을 빨며 놀고 있는 오늘 오전 11시 14분, 시간은 소리가 없다 실내는 하얗고 추억은 파랗게 물든다 삼십대는 육십대가 되었고 학교에 가 있는 여학생은 삼십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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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북양평읍에서 - 흰 비둘기 아파트 외 1편
북양평읍에서 고형렬 북양평읍에서 보는 오빈리 산 129-1번지 산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밤이나 낮이나 봄이나 여름이나 겨울이나 가을이나 대형 태극기 하나가 펄럭인다 태극기는 내 몸을 둘둘 말고도 남을 큰 요만 하다 멸망과 식민, 해방과 전쟁, 개발과 독재 시대를 관통해 온 태극기가 누군가의 피눈물 아우성처럼 찢어지고 있다 소리 없이 매일 아침마다 나는 그 태극기와 마주친다 대개는 서울의 서풍을 맞아 동쪽으로 펄럭이는 깃발은 지금도 시련을 겪고 있다 남한의 여자 대통령이 감옥에 투옥되고 일 년 동안 재판받는 나라 무서운 나라 피 묻은 태극기만 찬 강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펄럭이는 태극기에 옷을 입혀 주고 싶지만 그는 얼어 죽을 것 같지는 않다 하늘에 슬픈 비행운은 고향 바다까지 그어지고, 이제 사랑의 주가는 추락하고 말았다 오늘 아침의 추운 우리나라 눈이 부시고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