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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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구두
여자의 구두가 거기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나는 주방으로 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한 잔 따라 마시고 다시 현관 앞으로 가서 구두 앞에 잠시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구두는 어제 저녁 여자가 벗어 놓은 바로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조금 비뚤게 놓여 있는 구두를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있는데 그게 점점 더 불길한 물건처럼 느껴지더군요. 얼른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지만 구두에 손가락이 닿는 것조차 꺼림칙했습니다. 그 여자가 내 구두를 탐낸 거라면, 그래서 바꿔 신고 간 것뿐이라면 그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고작 구두 한 켤레쯤은 없어져도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전 자꾸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 여자가, 자기가 나인 줄로 착각하고 내 구두를 신고 갔다는 생각 말이에요. 《문장웹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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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물구두와 달 외 1편
물구두와 달 신영배 구두가 나에게 달을 설명하고 있었다 또각또각 어딘가를 열고 있었다 당신은 떠나며 다리를 둥글게 말았다 달이 뜨지 않고 달에게 던진 말들도 뜨지 않는 창가에서 다리는 어두워졌다 꿈에서 달, 달이 책상 위에 앉았다 말을 건질 때마다 책상이 출렁였다 달이 옷걸이에 걸렸다 말을 벗느라 안간힘을 쓸 때 옷걸이엔 내 비틀린 사지가 걸렸다 물이 뚝뚝 떨어졌다 구두가 여전히 나에게 달을 설명하고 있었다 당신은 어둡고 멀고 둥글다 당신과 나의 간격엔 달빛 달빛엔 강이 흐르고 나도 둥글게 만 다리를 안고 있었다 간격엔 달빛 걸을 수 없는 말들을 안고 젖은 구두가 돌아다녔다 닿을 수 없는 말들 사이에서 또각또각 소리가 났다 강이 마르는 거리에서 걸어가는 사람들 속에서 떠오르는 구두 가라앉는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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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돌아온 빨간 구두 이야기
[글틴-동화] 돌아온 빨간 구두 이야기 임어진 “빨간 구두 소문 들었어?”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오래전 한 소녀를 불행에 빠뜨리고 어딘가로 멀리 떠났다는 구두였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잊지 않았다. 이야기 속 소녀는 세례 뒤 성사에 신을 새 신발로 빨간 구두를 고른다. 눈이 어두운 할머니는 소녀가 고른 신발 색깔을 알아보지 못했다. “예배당에는 검정 신을 신고 가야 한단다.” “예, 할머니. 까만 구두를 신었어요.” 예배당에 들어가려는 소녀에게 빨간 수염 노인이 다가와 구두를 톡톡 치며 말했다. “참 예쁜 신이군요. 춤출 때 꼭 신도록 해요!” 소녀는 노인 말대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한번 시작한 춤은 멈출 수 없었다.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춤을 추던 소녀는 벌을 받고서야 구두에게서 벗어나고, 구두는 저 혼자 춤을 추며 어딘가로 떠났다. 사람들은 빨간 구두를 꺼리고 소녀를 탓했다. 빨간 구두를 꺼리는 사람은 이제 없었다. 오히려 반대였다.